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에 만족스러운 답변을 발견하기까지는 긴장속에 있다.
성경적 기독교의 답변은 우리를 만물의 진정한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도록 인도하고, 인격이 존재하는 것의 본질이라고 진술한다. 그것은 우주를 신(또는 존재하는 것)의 본질의 연장이라고 보는 범신론적입장이 아니고, 삼위일체라는 고도의 질서에 따라 인격적이신 하나님이 다른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에, 삼위일체 안에는 진정한 사랑과 진정한 교제가 있었다.
이 진술에 이어서 성경은 이 인격적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셨음을 진술한다. 인격적 하나님은 만물을 비결정적 방식에 따라 자유롭게 창조하셨는데, 인간은 특별한 상황- 내가 창조의 특별한 범주로 부르고 싶은 것- 속에서 지음받았다. 인간은 하나님과 동일한 형상에 속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인격은 인간의 창조에 본질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고, 인간 역시 인격적이다.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그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여러분이 알프스 산의 정상에 서서 그 사이에 두 계곡을 두고 평행을 이루고 있는 세 산등성이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한 계곡은 호수를 이루고 있고, 다른 하나의 계곡은 말라 있다. 때때로 알프스 산에서 일어나는 일을 갑자기 여러분은 목격하기 시작한다. 그 전에는 아무 것도 없이 비어있던 두번째 계곡에 호수가 생긴다. 물이 차올라오는 것을 볼 때, 여러분은 그 원천이 어디인지 궁금하게 생각할 것이다.
만일 그것이 옆 계곡에 있는 호수와 똑같은 수면을 이룬다면, 여러분은 조심스럽게 측정해본 다음에, 그 물이 첫번째 호수의 수면보다 두번째 호수의 수면이 20피트나 더 높은 것으로 측정되었다면, 그러면 여러분은 그 원천이 옆의 계곡이라고 더 이상 생각할 수 없고, 다른 설명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인격이란 마치 이와 같다. 아무도 지금까지 인격이 비인격적인 원천으로부터 연원하는 방식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러므로 성경적 기독교는 인간 인격의 원천과 의미에 관한 적절하고도 합리적인 설명을 가지고 있다. 그 원천은 충분하다. - 즉 삼위일체의 고도의 질서에 따르는 인격적 하나님은 충분하시다. 이런 원천이 없으면, 인간들은 비인격적인 원천( +시간, + 우연) 으로부터 나오는 인격으로 귀착하고 만다.
두가지 대안은 아주 명확하다. 하나는 만물에 인격적 출발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인격적인 것이 시간의 흠름에 따라 우연히 만들어낸 것이 있다는 것이다. 두번째 대안이 내포어들로 말미암아 그 뜻이 다의적일 수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 용어들은 동양의 범신론에 의해서 사용되기도 하였고, 틸리히(Tillich)의 "존재의 근거" (Ground of Being)와 같은 신학적 술어들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질량(mass)으로부터 에너지 또는 운동(motion) 으로의 이동이라는 세속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견해는 결국, 시간과 우연이 덧붙여진, 비인격적인 것으로 귀착된다. 만일 이것이 인간 인격에 대한 참으로 유일한 답변이라면, 인격은 단지 하나의 환상 곧 아무리 말의 요술을 부릴지라도 결코 변경시킬 수 없는 일종의 허탄한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 인격이 비인격으로부터 연원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어떤 신비적 비약의 형식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테이야르 드 샤르댕이 견지했던 입장이었다. 그의 답변은 단지 신비적인 술어들로 이루어진 답변이었다.
이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적 사실들을 적합화할 수 있는 유일한 설명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형이상학적 마술가( metaphysical magicians) 가 된다. 시간과 우연이 덧붙여진 비인격적인 것이 어떻게 인격을 제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실재성을 입증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개념이나마 제공한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무수한 말의 홍수에 의해 유혹을 받고, 그리하여 인격은 마음대로 조작된 것으로부터 출현하는 것이 되었다! 이것은 원천보다 더 높이 솟아있는 물이다. 휴머니즘적,합리주의적 사상사 속에서는 아무도 해결책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사상가는 인격이란 부질없는 희망이기 때문에 인간은 죽었다고 말하거나 아니면 문 밖에서 그의 이성에 열쇠를 채우고, 절망의 새로운 차원인 신앙의 비약 속으로 뛰어들가지 않으면 안된다.
줄리안 헉슬리경 같은 사람은, 비록 무신론자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인간이 마치 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하면, 그가 기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나은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그 딜레마를 분명히 하였다. 이것은 순간적으로 그럴듯한 해결책으로 보인다. 즉 만일 여러분이 사회학적 자료를 컴퓨터 속에 집어넣었을 때 그 컴퓨터가 제공하는 종류의 답변처럼 들린다. 신은 죽었다. 그러나 그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행동하라. 그러나 조금만 반성해 보면, 이것이 얼마나 두려운 해결책인지 드러날 것이다.
노르웨이의 입센(Ibsen)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만일 인간에게서 거짓을 빼앗는다면, 그것은 그의 희망을 빼앗는 것이다. 이 사상가들은 결과적으로 만일 인간이 거짓(기독교의 인격적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이 참되다는 가정에 따라 행동한다면, 오랜 세월에 걸쳐 그는 인간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민감한 사람으로서 이것보다 더 깊은 절망을 발견할 수 없다. 이것은 낙관적이고, 행복하고, 합리적이고 또는 탁월한 답변이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암흑이자 죽음이다.
우주가 단지 자유로운 공기는 없고, 액체와 고체만으로 이루어진 물질로 존재한다고 상상해보자. 이 우주 속에서 물고기는 헤엄을 치고 있었다. 이 물고기는 확실히 자연적으로, 그 환경에 적응되고, 그럼으로써 계속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이 우리에게 믿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맹목적인 우연에 의해 이 물고기가 공기가 전혀 없는 이 우주 속에서 계속 살아감으로써 허파를 진화시켰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이 물고기는 더 이상 물고기로서의 그 위치를 유지하거나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허파를 지닌 새로운 상태속에서 더 고등해진 것인가 아니면 더 열등해진 것인가? 그것은 분명 더 열등해졌다. 왜냐하면 그 물고기는 질식해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만일 인간이 단지 비인격적인 것으로부터 우연에 의해 태동되었다면, 그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들- 목적과 의미에 대한 소망, 사랑, 도덕성과 합리성을 향한 운동, 미와 언어적 소통- 은 궁극적으로 성취될 수 없고, 따라서 무의미할 것이다. 이런 상황속에서 인간은 더 고등해진 것인가 아니면 더 열등해진 것인가? 그렇게 되면 그는 가장 열등한 피조물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바위에 끼어있는 푸른이끼가 인간보다 더 고등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하는 우주속에서 성취되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세계가 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곳이라면, 성취성이 없는 존재로서 인간(개인으로서 뿐 아니라 인류로서) 은 죽은 존재이다. 이 상황 속에서 인간은 잔디를 존중해야지 그 위를 걸어가서는 안된다. - 그 이유는 풀이 인간보다 더 고등하기 때문이다 !
- 프란시스 쉐퍼의 기독교문화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