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코피!
1. 여는 글
저는 89년에 전도사 사역을 시작했고, 95년에 목사 안수를 받아서 올 해가 교역자로서 사역한 지 만 20년째가 되고, 목사로서 교회를 섬긴 지는 14년째가 됩니다. 지난 20여 년의 세월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그 중에는 기쁘고 감격스럽고 보람된 일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던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더니 회심(回心)하여 크리스천이 된 일, 열심히 땀 흘리며 전도와 사역에 힘썼더니 담당 부서(중고등부, 대학, 청년부)가 부흥 성장하던 일, 세월이 흐른 후에 어떤 성도가 찾아와서 ‘그때 목사님의 설교(권면)를 듣고 이렇게 새사람이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말을 듣는 일, 가르치고 훈련시켰던 학생들과 청년들이 선교단체의 간사로, 목회자로, 선교사로 사역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든든히 확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는 일, 그런 사역자들이 저에게 ‘목사님은 저의 영원한 스승입니다. 저의 든든한 멘토(mentor)입니다. 오늘의 저는 목사님 때문에 있습니다’라는 말들을 들을 때 등등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힘들고 괴로우며 눈물 나던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20년의 세월에 많은 일들을 경험하고 겪어왔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저는 목회자 생활 20년 만에 이상한(?) 일을 겪었습니다. 어쩌면 평생을 목회하면서 겪지 않고 지날 수 있는 일이고, 별로 대수롭지도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참으로 큰 의미로 와 닿은 일이기에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 일이 어떤 일인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 일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전에, 지금은 기독교에서 ‘사순절’(四旬節, The Lent) 기간입니다. 사순절을 뜻하는 영어 Lent는 고대 앵글로 색슨어 Lang에서 유래된 말로, 독일어의 Lenz와 함께 ‘봄’이란 뜻을 갖는 명칭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40일간의 기념일’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테살코스테’를 따라 ‘사순절’로 번역합니다. 이는 부활 주일을 기점으로 역산하여 도중에 들어있는 주일을 뺀 40일간을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 묵상하며 경건히 보내고자 하는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40’ 이란 수는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 받으심, 40일간 시내 산에서의 모세의 금식, 이스라엘의 40년간의 광야 생활, 예수의 부활에서 승천까지의 40일 등과 같이 성경에 여러 번 고난과 갱신의 상징적 기간으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고난 주간을 포함하여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구속을 위해 고난을 당하신 사건에 담긴 구속사적 의의를 살펴보며 자신의 신앙을 각성하고자 비교적 긴 40일간의 절제 기간을 갖는 것이 바로 사순절입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主日, 3월 16일)은 ‘고난 주일’(종려주일)이었고, 지금은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입니다.
그런데 바로 사순절의 막바지인 지난 주 수요일(3월 12일)에,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고난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고난 주일(혹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무리들의 환영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기 때문에 종려 주일이라고도 함)에 두 번씩이나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2. 절묘한 타이밍
3월 12일, 수요일 저녁 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예배 전에 뜨겁게 찬양을 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13-26절을 읽고 ‘진정한 십자가의 도(道)를 세우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성도들에게 우리는 타협의 십자가가 아니라 진리와 정의의 십자가를 지는 성도와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십자가의 보혈(寶血)의 공로를 헛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빌라도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을 선택하는 대신에 바라바를 선택한 빌라도. 지금 여러분이 예수님 대신에 선택한 바라바는 무엇이냐고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구레네 시몬과 같이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성도가 되자고 호소했습니다. 비록 원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짐으로 주님에게 잠시 동안의 숨 돌릴 여유와 안식을 주었던 구레네 시몬. 그 시몬처럼 우리도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고, 즐거움을 드릴 수 있는 성도가 되고 교회가 되자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보혈의 은혜와 능력이 우리 가운데 있음을 나타내자고 설교했습니다. 설교를 하는 동안 저의 가슴은 뜨거웠고, 저의 눈은 어느 샌가 눈물에 젖어있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합심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마무리 기도를 했습니다. 설교를 할 때는 억제하고 참았던 가슴의 뜨거움이 기도하는 도중에 눈물로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뜨거운 눈물만이 아니었습니다. 아시겠지만 눈물이 나면 콧물도 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콧물이 확 쏟아지는 겁니다. 아무 생각 없이 눈물을 닦고 콧물도 닦으며 기도를 하는데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기도하면서 눈을 떴더니 콧물이 아니라 코피가 터진 것입니다. 손수건이 피범벅이 되었습니다. 코언저리가 피로 얼룩졌습니다. 더 이상 기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서둘러 기도를 마치고 예배를 마쳤습니다.
평소와는 달리 서둘러 예배를 마치는 일에 성도들도 의아해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인도하던 목사가 코피가 터지고, 피로 얼룩진 얼굴로 강단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목사님 왜 그러세요?” “목사님! 코피가!” “얼마나 피곤하셨으면!!”
모두들 놀라움과 안타까움의 말들을 한 마디씩 내뱉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혈을 설교하고 기도하던 중에 코피가 터져서 이것보다 더 좋은 시청각 자료는 없는 듯합니다. 때마침 그 타이밍이 얼마나 절묘합니까? 과테말라에서 사역하시는 다른 목사님께 이 이야기를 했더니, “역시 은혜로운 목사님은 달라! 어떻게 그때 코피가 다 나오나?” 합니다.
3. 어쩌다 마주친 눈빛
3월 16일, 고난주일 낮 예배. 저는 조금 긴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수요일에 코피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목, 금, 토 계속해서 코피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보통 흐르는 정도가 아니라 펑펑 솟아나는 샘물처럼 나왔기 때문입니다. 주일 아침 특별히 기도까지 했습니다. “오! 주님! 오늘은 예배 도중에 코피가 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두 번씩이나 코피가 나면 별로 덕스럽지 못한 듯합니다. 오늘만이라도 제발 코피가 터지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그런데 예배 전에 코피가 또 터졌습니다. 코 안도 시원하지 않고, 코피가 목으로 넘어가서 그런지 목도 가래가 있는 것처럼 시원하지 않았습니다. 겨우 지혈을 하고 예배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어느 때보다도 긴장된 마음으로 강단에 섰습니다. 경험들이 있으시겠지만, 코피가 목에 있어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서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배를 잘 마쳤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10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빈 무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성찬식을 집례 했습니다. 주님의 살을 기념하는 떡을 나누고, 주님의 피를 기념하는 잔을 나누었습니다. 사실 예배를 인도하면서, 성찬을 집례하면서 마음 한 구석에서는 ‘코피가 또 터지지 말아야 할텐데!’라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무사히 성찬을 집례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기도를 했습니다.
오늘 설교 말씀을 다시 되씹으면서, 성찬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묵상하면서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힘을 썼나 봅니다. 너무 열성적으로 기도했나 봅니다. 너무 감정이 뜨거웠나 봅니다. 뜨거워진 눈시울과 함께 코피가 또 터지고 만 것입니다. “오! 주님!”
또 훌쩍거리는 소리에 성도들이 눈을 뜨고서는 앞을 바라봅니다. 그 눈뜬 성도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기도하던 중에 목사와 성도가 서로 눈이 마주친 것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코에 하얀 휴지를 막고 인사를 하는 저에게 모두들 한 마디씩 던집니다.
“목사님 병원에 가보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목사님 코피가 계속 나오는가보죠?” “목사님 좀 쉬셔야겠어요!” “아이고! 우리 목사님 어떡하나!” “목사님 코피 지혈에는 연뿌리가 최고입니다!”
걱정해 주고 염려해 주는 성도들이 고맙고,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되새기는 고난주일,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흘리신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이 있는 주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설교하고 증거 하는 시간에 목사의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으니, 이미 말했던 것처럼 이것보다 더 좋은 시청각 자료는 없는 듯합니다. 코피까지 흘려가면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로 설교를 하고 예배를 인도하니 은혜 받지 않을 성도가 누가 있겠습니까?
사역을 시작한 지 20년이 되었지만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다른 선배 목사님들이 말씀을 들려주시지 않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런 이야기를 지금까지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3. 진짜 이유
수요일과 주일에 두 번씩이나 연이어 예배 시간에 코피가 터지고 보니 성도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사실 걱정해주는 성도들의 말과 마음이 싫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유치한 생각도 해봅니다. ‘코피 자주 나야겠네!’
다른 때도 아닌, 사순절 기간에, 고난주일과 전(前) 수요일에 두 번씩이나 코피가 터지고 보니 그것이 한편으로는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시청각 자료로 진짜 피를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의 피와 어딜 비교하겠습니까만!
그리고 목사가 이렇게 기도하고, 설교하고, 예배를 인도하고, 심방하고, 연구하는 목회 사역에 열정을 다해서 코피까지 터져가면서 하는 모습에서, 성도들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과 모습을 조금이나마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목사에게 더 영광스럽고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비록 코피는 흘렸지만, 성도들은 걱정하지만, 감사함으로 마음을 추슬렀습니다.
그러나 이 코피에는 진짜 이유가 있습니다. 일주일 내내 코피가 펑펑 터진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목사가 신령해서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다가 흐른 코피가 아닙니다. 부끄러운 이유가 있습니다. 고백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요즘 저는 누군가를 굉장히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그 성도는 누구보다도 제가 기대하고 사랑하는 성도입니다. 큰일을 함께 이루어가리라고 생각하며 기둥같이 여기는 성도입니다. 그런데 그 성도가 저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습니다.
그 실망감 때문에 저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밥맛을 잃었습니다. 사역의 의욕이 시들해져버렸습니다. ‘이렇게 내가 사랑해주고 축복해주고 목양해 주면 뭘 하나’ 하는 생각 때문에 괴로웠습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자꾸만 섭섭했던 일, 실망스러웠던 일, 만족스럽지 못했던 일들이 생각의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그 성도를 위해서 기도하다가 밤을 새기도 했습니다. 그 성도를 위해서 목이 터져라 외치며 기도하느라 목이 쉬기도 했습니다. 그 성도를 위해서 너무나도 간절하게 절실하게 축복하며 축복하느라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겪은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성도를 위해서 흘린 눈물은 저의 무릎을 적시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사랑하고 더 기대했습니다.
‘기대하는 만큼 실망도 크다’는 말이 있듯이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 저는 너무 큰 실망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성도를 미워하게까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반석을 두 번 친 모세처럼, 화를 내며 ‘주님 축복 기도한 것 취소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 미움이 분노로 변했습니다. 그 분노는 저의 머리를 아프게 했습니다. 뒷골이 아프더니 결국 3월 10일(월)부터 코피가 터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꼬박 일주일동안 매일 코피가 펑펑 터졌던 것입니다.
“주님 이래도 되는 겁니까? 이래도 제가 저들을 참고 사랑해야 합니까? 이래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참아야 합니까?” 하나님도 섭섭해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성도를 미워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분노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인 목사라는 저는 자꾸 미워지고 화가 나니 어쩌면 좋습니까? 그것을 이기지 못해서 코피까지 펑펑 터지니 어쩌면 좋습니까? 남들은 목사의 건강을 걱정해 주는데. 신령하고 은혜로운 목사라서 고난주일에 코피가 다 나온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닌데 어쩌면 좋습니까?
물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코피가 난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배를 인도하다가 코피가 난 적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피에 대한 시청각 자료가 아닙니다. 저를 향한 주님의 메시지입니다. 물론 지금처럼 성도를 미워해 본 적도 처음입니다. 그만큼 어떤 성도에게 기대하고 사랑한 적도 처음입니다.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미워하고 분노하는 저에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목사! 그것까지도 참을 수 없니?” “너 지금 나의 십자가를 설교하고 가르치면서, 그것 하나 못 참니?” “나도 섭섭하고, 나도 못마땅하지만, 내가 미워하고 진노하면 그 어린 양은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을 모르니?” “사랑하는 나의 제자들이 모두 다 나를 버리고 떠나버렸을 때에도 나는 그들을 사랑했다. 이 목사! 너는 그럴 수 없겠니?” “그 성도가 실망을 주고, 아픔을 주고, 잘 따라오지 않아도 나처럼 끝까지 안아주고, 사랑해주고, 기대하며 기다려 줄 수 없겠니?”
예배 시간에 흘린 코피는 바로 주님의 이런 메시지였습니다. 코피 때문에 찰나이지만 예배가 중단되었습니다. 코피 때문에 성도들이 예배에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코피 때문에 인도자인 저의 마음이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코피 때문에 성도들의 마음에 걱정과 무거움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코피 때문이 아닙니다. 저의 미움과 분노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홀로 남은 저는 회개의 눈물을 또 한 번 흘려야했습니다. 이상하지요! 그렇게 눈물이 나오는데도 코피가 터지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저의 마음을 만져주셨습니다. 저의 두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 실망을 소망과 은혜로 갚아주마. 내가 그 아픔을 치유와 회복으로 보상해 주마. 내가 그 분노를 새로운 사역의 열정으로 변화시켜주마. 네가 아파한 것만큼 내가 하늘의 것으로 너에게 반드시 갚아주마! 미움과 분노와 상처와 실망. 이 모든 것을 나에게 맡겨버리고 너는 나처럼 그저 품어주어라. 그저 사랑해주어라. 그저 기다려주어라.”
글을 쓰는 지금도 모니터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글들이 겹쳐서 보입니다.
이렇게 회개하고 내 마음을 만져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경험한 후, 주일 그 이후로 지금까지 코피가 안 납니다. 제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앞으로도 또 코피가 나는 일은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배 시간에 코피가 또 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번과는 다른 코피입니다. 미움 때문이 아닌 진짜 피곤해서 과로 때문에 흐르는 코피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