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대 총선 후보중 최대 전과자는 누구 일까요 ?
오늘은 저의 전과 기록에 대해서 한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아침 선거운동을 마치고, 신문을 보던중, 이번 총선 후보중에 전국에서 최다 전과 기록 보유자(전과4범)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해명 하고자 몆자 적습니다.
저는 83년 대학에 별다른 고민없이 입학을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80년 광주항쟁'의 진실을 확인하고, 많은 학생들이 학생운동에 뛰어들던 시기였습니다.
연일 학내에서는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던 시기 이지요. 당시에는 망원들이라고 경찰들의 첨자가 있어서, 학내시위나 가두시위의 비밀들이 경찰들에게 탐지되고, 시위에 나가보면 늘 경찰이 먼저 와서 허탕칠때도 많았던 시기였습니다.
저의 첫 번째 전과는 86년 10월 건대항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86년 10월 건대항쟁 사건은 좀 이상했습니다. 경찰이 정보를 확인하고 출동을 했는데, 이상하게도 학교로 들어가는것을 막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학생들이 집결 할 수 있었지요. 당시 학생들은 전국 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발족식(일명 애학투련)을 개최하고 있었는데, 집회 중에 경찰이 토끼몰이로 학생들을 사회과학관, 도서관등에 가두었습니다.
저는 당시 사회과학에 갖혀 3박4일을 꼼짝없이 갖혀 지냈습니다. 먹을것이 없어서 배가 무척 고파습니다. 학생들은 도서관과 사회과학관을 밧줄로 연결해서, 매점에 있는 빵을 나누어 먹기도 했습니다. 물론 빵 가격은 돈을 모아서 지불 했습니다. 사회과학관 모교수 방 냉장고에 쇠고기가 있어서 커피포트에 끌여서 국물을 나누어 먹기도 했지요.
연행당시 헬리콥터에서 물과 최루액을 뿌리고 건물아래에서 최루탄을 쏴서,참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저는 당시 연행자중 학년이 높다고 하여, 1심에서 징역형을 87년 6월 5일 2심에서 징역2년에 집행유예3년을 받고 풀려났습니다.
87년 6월은 시민항쟁이 폭팔하던 시기였지요. 박종철 학생이 죽고,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직선제 개헌 운동이 불길처럼 번지던 시기였지요. 학생운동 세력들은 건대항쟁을 평가하면서, 대중적 학생운동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고, 그 전환이 87년 6월 시민항쟁을 뒷받침하는 힘으로 작용했습니다. 6월 항쟁이 노태우의 6.29 선언(직선제 개헌 수용)으로 방향을 읽고 있을때, 전국의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서고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를 87년 7,8,9 노동자 대투쟁이라고 합니다.
저는 석방된 이후 동료들과 함께 구로공단에 취업했습니다. 자취방에서 예전의 등사기로 유인물을 만들어서 구로동 독산동의 쪽방집을 새벽에 돌아다니며 배포를 했습니다. 구로공단에서는 88년이 되면서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85년 구로동맹 파업으로 10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쫒겨나고 감옥에 갖혀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공장은 독산동에 있는 유진화성이라는 막걸리병과 우비 원단을 생산하던 회사였는데, 88년에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당시 저는 교육부장 활동을 하였습니다.
두 번째 전과는 97년 IMF 관리체체로 넘어가기 직전이었습니다. 96년 12월 26일 장로출신 대통령 김03씨가 국회에서 새벽에 안기부법, 노동법을 날치기로 개악하였고, 당시 민주노총은 총파업으로 투쟁할 때 였습니다.
당시 권영길 민주노총위원장이 투쟁을 지휘하고 있었고, 업종별 부문별로 요일을 맡아서 투쟁할 때 인데, 저는 97년 1월 16일에 연행되어 집회및 시위에곤한 법률위반으로 입건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불구속으로 조사를 받았습니다만, 나중에 노동운동으로 구속되면서 사건이 병합되 징역 1년 집행유예2년 처분을 받았습니다.
노동운동으로 구속된 시기는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IMF 관리체제로 넘어가던 시기였습니다. 97년 6월 30일 큰딸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나오는데, 사방에서 사복경찰관이 나오더니 어린이집 마당에서 연행을 하더군요. 당시 막내 우석이가 태어난지 채 2개월이 안되었을 때 다른 친구들 10명과 함께 연행이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공장을 다니면서 노동조합활동을 하며, 참세상을여는 노동자 연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을때 였는데, 대우자동차 해외매각 사건으로 노동자들이 부평과 수도권에서 매각 반대투쟁을 벌일때, 경찰청 보안국에서 공안사건으로 확대하려고 노동자 조직사건을 조작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참여노연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교육활동과 활동경험을 공유하는 수준의 조직이었고 내규에 '전체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전체를 위해'라는 표현이 있는데, 공안당국에서는 북한사회주의헌법 23조에 있는 '하나는 전체를 위해 전체는 하나를 위해'라는 표현과 비슷하다고 유죄추정을 받았습니다.
천주교 신협 입구에 '전체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전체를 위해' 쓰여진 글을 아주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우리국민 모두가 한번쯤은 봤을 '삼총사' 영화를 보면 기사들이 칼을 한곳으로 모아 구호를 외칩니다. 'One for the all, All for the one !'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의 내규 정신도 'One for the all, All for the one !'입니다. 축구 등에서도 모든 선수들이 'One for the all, All for the one !' 정신으로 그라운드를 누빕니다.
바로 우리나라 국가보안법이 이렇게 말도 안되는 억지로 10명의 노동자를 가두고, 국가보안법으로 단죄하였습니다.
다음으로 구속된것이 2001년 6월 26일입니다. 말도 안되는 이유로 참여노연이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로 단죄되어, 98년도에 평화와 통일로 가는 서울민주노동자회 라는 조직을 만들어서 활동했는데, 이번에도 10명을 연행해 구속를 했고 구속이유는 참여노연과 인적구성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탄압을 받았습니다. 2002년 1월 11일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으로 풀려났습니다.
네 번의 전과 기록을 살펴보면 주로 큰 선거를 앞두고, 아니면 노동자들이 막 투쟁에 나설때 공안당국은 조직사건을 조작했습니다. 노동자 투쟁에 붉은 덧칠을 해서 노동자와 국민을 분리시키려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여 있습니다. 그것이 생명을 다한 국가보안법의 진짜 모습입니다.
학생운동을 하고, 첫 번째 구속을 당하고 독산동 공장에 취업하면서 금천구와 인연을 맺은지 올해로 20년이 넘었다.
20년동안 많은 아픔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흔들리지 않고 한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운동에대한 신념, 사상에 대한 신념 보다는 사람에대한 연민과 부모님에대한 그리움이었다.
95년 소련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많은 학생출신 활동가들이 운동을 접고 보수정당의 품으로, 아니면 생활인으로 돌아갈 때, 현장의 노동자들과 노동자 조직운동에 참여하는 힘은 어머니 아버지가 못다가신 길은 나는 가겠다는 소박한 생각이 지금의 나를 있게한 원동력 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