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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영... 그대는 행복한가요...

김정윤 |2008.03.31 13:04
조회 423 |추천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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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절의 거짓말 같은 죽음

 

그의 죽음은 ‘거짓말’이었다. 모두들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 그대로 믿을 수만은 없었던 진실. 4월1일, 남을 속이는 게 통용되던 만우절 저녁에 장국영은 청춘의 심장을 멈췄다. 그의 죽음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세상 모든 건 다 변해도 내 얼굴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농담을 하곤 했던 ‘만년 청년’ 장국영은, 홍콩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24층에서 스스로의 삶을 정지시켰다.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쉬던 ‘발 없는 새’의 슬픈 하강이었다. 죽을 때만 땅에 내려앉는다는 <아비정전>의 그 새. 장국영이 차가운 아스팔트에 몸을 던진 시각은 오후 6시40분을 막 넘긴 때였고, 앞에 보이는 홍콩 구룡 반도에는 축축한 어둠이 깔려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하강하면서 바로 죽음에 이르지 못했다.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떨어졌을 때, 그는 전신 골절상을 입은 상태였고,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근처 퀸 메리 병원에 옮겨졌다. 그곳에서 그는 곁을 지키던 사람들을 오랫동안 쳐다보다 오후 7시6분경에 숨을 멈췄다. 그날 저녁 장국영은 전 매니저 진숙분과 차를 마시기로 했고, 친구 당학덕과 배드민턴 시합을 하기로 약속한 상태였으나, 두 약속을 모두 지키지 못했다. 아니, 지키지 않았다. 그는 내용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유서 한 장을 달랑 남긴 채 “화려했으나 고통스러웠고, 즐거웠으나 한편으로는 슬펐던” 삶을 끝냈다.

장례식은 사망 일주일 후인 8일, 홍콩 페이지아오 장례식장에서 치러졌다. 장례식장은 전날 밤부터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팬들로 북적거렸고, 침울한 공기는 팬들이 부르는 노래로 채워졌다. 복숭아나무로 만들어진 관에는 평소 장국영이 좋아했던 유품들이 함께 담겼다. 마작 패와 배드민턴 채 그리고 몇 개의 음반들. 장례식장엔 팬들뿐 아니라 생전에 우정을 쌓았던 주윤발 매염방 등의 스타들이 참석해 그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연신 부은 눈을 매만졌다. 홍콩영화제는 시상식 일정까지 바꿔가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아시아 전역에서는 장국영의 죽음과 장례 내용이 대서특필됐다.

동성애(20대의 젊은 연인 케네스와 오랜 친구 당학덕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는 보도), 우울증(유작 <이도공간>에서 투신자살한 치과의사를 연기한 후, 현실과 실재를 구분하지 못해 정신과를 찾았다는 보도), 건강 악화(“나는 열심히 살아왔는데 왜 이 모양이 되었는가”라는 유서 내용을 건강 악화로 추론하는 보도) 등, 그토록 말이 많았던 장국영의 죽음은 어떤 해답도 내놓지 못한 채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가요계의 샛별이 되다

내성적인 소년은 학교 생활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고,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고 직감했다. 수학을 좀 더 쉽게 배울 수 있는 곳으로. 그의 첫 번째 유랑은 이렇듯 비교적 단순한 이유로 이른 나이에 시작됐다. 전형적인 문과 기질이었던 그는 영국에서 D.H. 로렌스의 소설과 셰익스피어의 희곡, 다양한 그림에 재미를 붙여 나름대로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가업을 물려받길 원했던 아버지 때문에 자신은 그다지 원하지 않았던 방직 관련 학과에 진학했고, 그나마도 학업을 끝까지 마치지 못한 채 홍콩으로 돌아와야 했다. 홍콩을 믿지 않았던 아버지가 중국 본토로 돈을 가지고 갔다가 문화혁명 시절 전 재산을 탕진했기 때문이다. 홍콩으로 돌아온 장국영은 단순히 ‘한 번 놀아보자’는 심정으로 RTV에서 주최하는 가요제에 나갔다가 2등상을 받았고, 그 길로 연예산업에 진출했다.

스타덤에 오르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데뷔 앨범이 신통한 반응을 얻지 못하자 좌절감에 휩싸인 그는 방에 틀어박혀 한동안 두문불출했다. 그는 가난했지만, 당시 그를 괴롭혔던 것은 돈 자체가 아니라 돈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지 못한다는 좌절감이었다. “돈이 없어 좋아하는 사람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할 수 없었을 때가 정말 괴로웠다. 첫 출연료로 1천 홍콩달러의 돈을 받았지만, 집세로 500 홍콩달러를 내고 방송국 매점에서 세 끼 식사를 때우고 나면 몇 십 원이 남았다. 정말 괴로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장국영은 후회와 번민으로 젊은 시절을 낭비하진 않았다. “비록 내세울 건 없었지만, 나만이 그런 생활을 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라는 낙관주의가 그에겐 있었다. 7년간의 긴 무명 생활을 견딘 끝에 드디어 그의 삶에도 광명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바람아 계속 불어라’가 홍콩 차트에 진입한 후, 그는 ‘매혹적 꽃미남 스타’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열광적인 팬들의 환호성이 뒤따랐다. 
전설의 시대

영화는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초창기 출연작들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욕심으로 아무렇게나 골랐지만, 그때의 이력에 대해 별다른 미련은 없었다. 당시 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난 방송국에서 정규적으로 연기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연기의 기본적인 요구인 ‘몸의 움직임’에 대해 누구보다 정확히 연기할 수 있다.”

그의 분석은 옳았다. 그는 영화 속에서 몸의 움직임에 능숙한 만큼이나, 실생활에서도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능동적 엔터테이너였다. 조용한 파격과 결단 있는 이벤트의 연속. 자신의 젊은 시절을 ‘전설의 시대’로 만들어버린 남자는, 그러나 원치 않는 경쟁심 때문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처음엔 장국영 역시 그런 경쟁 관계를 즐기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황색 언론과 팬들의 횡포는 너무 심했다. 특히 그를 힘들게 했던 것은 알란 탐과의 비교였다. 청소년들의 우상으로 군림할수록, 한편에선 음해성 소문이 접착제의 파리처럼 달라붙었다.

“장국영은 아직 노래로선 알란 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알란 탐 팬들의 음해성 소문에 발끈한 그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고, 알란 탐과의 사이도 점점 벌어졌다. 팬과 팬의 대결 구도에 지쳐가던 그에게 방법은 단 하나였다. 자신이 동경했던 한 일본 가수처럼 정상에 있을 때 사라지는 것. 그는 캐나다로 떠날 준비를 은밀히 마쳤고, 1989년 고별 콘서트를 했다.

고별 무대는 눈물과 열정으로 채워졌다. 요란한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어둠을 뚫고 등장한 장국영은 검은 망토를 입고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다는 팝송 ‘American Pie’를 불렀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며 울먹이던 목소리, 진숙분에 대한 감사를 “어머니 같다”는 말로 대신하던 이야기 하나까지, 팬들은 그와 한 마음이 되어 마지막 가는 길을 빛내주었다.

그는 고별 콘서트에서 자신의 은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금 나는 스타로서 최정상에 있습니다. 최고일 때, 영원히 빛을 잃지 않는 별과 같이 여러분의 머릿속에 남고 싶습니다.” 붉은 카네이션을 던지며 고별 무대를 마쳤던 장국영은 격렬했던 과거를 정리하고 캐나다로 숨어들었다. 아무도 자신을 알지 못하는 그곳. 그는 “이제 배우나 가수보다 카메라 뒤에 설 준비를 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1년 남짓한 시간이 지나자 다시 홍콩으로 돌아왔다. 약속했던 영화 촬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종횡사해>와 <아비정전>은, 그가 은퇴를 결심하기 전 촬영을 약속한 영화였고, 그는 누구와의 계약 때문이 아니라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렵게 영화를 다시 시작했다. 
은퇴 번복, 새로운 날의 시작
<종횡사해> 현장에서 <스크린> 취재진과 만난 장국영은, 자신이 좋아하는 초콜릿 케이크를 함께 먹자고 권하며 “한국에서 내가 했던 초콜릿 모델을 유덕화가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내가 생각해도 멋진 배우다”라고 말했다. “한국엔 아직 당신을 잊지 못하는 팬들이 많다”고 전하자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준 한국 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가끔씩 그들이 보고 싶어질 것이다”라며 회한에 젖은 이야기도 덧붙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노래나 영화를 다시 할 생각은 없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었다. “노래와 영화, 양쪽 다 은퇴하겠다고 약속했으니 이제는 그만 둘 것이다.” 강력하게 은퇴를 주장했던 장국영을 다시 영화로 불러들였던 사내는 첸카이거다. “난 홍콩의 오락영화를 ‘소시지’라고 부르는데, 이런 영화 공장에서 ‘소시지 만들기’에 지쳐버렸다. 하지만 첸카이거라면 나에게 ‘소시지’가 아닌 ‘영화’를 만들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첸카이거를 믿었고, 오랫동안 썼던 광동어 대신 북경어로, 익숙한 코미디와 액션 연기 대신 경극 배우의 과장된 비장미로 관객 앞에 다시 섰다. <패왕별희> 이후, 그는 은퇴가 아니라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당시 그는 누구보다 편안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은퇴 전에는 상을 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은퇴 후엔 내가 좋아하는 음악, 내가 좋아하는 영화만 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 그래서 지금은 마음이 편안하다.”  발 없는 새, 고이 잠드소서....  <아비정전>(1990)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장국영은 자신이 맡았던 배역 중에서 ‘아비’가 자기 내면의 모습과 가장 비슷하다고 말한 바 있다.  <패왕별희>(1993)
베이징에서 이뤄진 촬영은 그에게 여러 가지 부담을 주었다. 북경어를 배워야 했으며, 경극의 기초를 익혀야 했던 것. 그래도 그는 이 작품에 자신의 미래를 걸었다. “난 이 작품을 통해 더욱 외롭고 고통스러워야 하는 배우의 내면을 발견했다.” <동사서독>(1994)
<패왕별희>의 결과에 만족하고 있던 장국영에게 주어진, 또 다른 내면 연기를 펼칠 수 있었던 기회. 그는 무정부주의자에 가까운 살인청부업자 구양봉 역을 맡아 산산이 조각난 내러티브의 파편들을 모아주는 역할을 했다.
<상해탄>(1996)
구국을 위해 뭉친 청년 집단의 멤버로 출연한 <상해탄>. 한국엔 ‘정우성의 홍콩 진출작’으로 더욱 알려졌다.  <해피 투게더>(1997)
사실 그는 개인적으로 <해피 투게더>의 보영 역할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보영의 제멋대로인 성격은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황폐한 눈빛은 아직도 팬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다.   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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