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마음

이영주 |2008.04.06 08:02
조회 38 |추천 0

 

 

마음 (Private Fears In Public Places, Coeurs, 2006)

감독 : 알랭 레네

 

 

 

 

쓸쓸한 눈발이 나를 위로한다

 

 

여든살을 훌쩍 넘긴 할아버지 알랭 레네 감독이 얼마나 대단한 감독인지 나는 모른다. 프랑스영화에 대해 문외한인 내게 알랭 레네라는 이름은 낯설었다. 이 영화를 본 건 순전히, 영화보기에 일가견이 있으신, 게다가 배우에 대한 취향도 나랑 꽤 일치해 주시는 한 이웃이 이 영화를 통해 영화감상 울기를 극복했다는 포스트를 보았기 때문이다. 마침 나도 한창 영화감상 울기를 지날 때였다. 도대체 요즘 영화들은 왜 이런 거야, 투덜거리고 있던 차에 그 포스트는 한줄기 빛 같았다.

그러나 정작 이 영화를 본 것은 그 포스트를 본 뒤 몇 주가 흐른 뒤였다. 그러니까, 영화감상 울기를 넘어 인생의 울기를 지날 때라고 해야 하나? 몸도 안 좋아지고, 그에 따라 마음도 안 좋아지던 시절. 불면증에 시달리다 어차피 잠도 못 자는데 영화나 보자 싶어서, 혹시나 이 영화가 영화감상의 울기뿐 아니라 인생의 울기를 극복하게 해주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에, 자꾸 가라앉는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모니터를 지켜보았다.

 

눈이 내렸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좀처럼 멈출 기세도 없이, 우산을 써도 어깨에 소복히 쌓일 정도의 함박눈이 내렸다. 잿빛 파리의 겨울은 흩날리는 눈발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눈발 사이로 사람들이 지나갔다. 눈발 사이로 사람들이 만났다. 눈발 사이로 사람들이 헤어졌다.

결혼을 앞두고 삐걱거리는 동거 커플, 부동산중개소의 사장과 직원, 원래부터 싱글이었는지 어쩌다 싱글이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각자 싱글로 동거 중인 늙은 오빠와 젊은 여동생, 몸도 못 가누는 병자에다 치매인지 정신분열인지 성격까지 고약한 아버지와 아들, 병든 아버지를 부양하는 아들과 어지간한 간병인은 감당 못하는 노인네를 특별한 기술(?)로 제압하는 인내심 많고 비밀 많고 신앙심 깊은 간병인, 직업군인이었다가 짤린 뒤 애인에게 얹혀 사는 주제에 매일 별 네 개짜리 호텔 바에서 술이나 마시는 날건달과 그런 손님을 일관된 친절함으로 대하는 바텐더, 포르노 보는 늙은 오빠더러 변태라고 욕하며 고고한 척하지만 매일 밤 '애인구함' 구인광고를 보고 낯선 남자를 찾아 나서는 내숭녀와 애인에게 차인 김에 급만남 한번 해보려는 얼치기 미남(?). 6번의 인연을 거치면 지구상 모든 인간이 다 아는 관계라더니, 이 영화 속 등장인물 7명(물론 그 중 한명은 얼굴 한번 나오지 않지만)은 딱 1번만 인연을 거쳐도 모두 아는 사이다.

나 처럼 각각의 관계가 만드는 독립된 이야기가 거미줄처럼 얽힌 이야기는 보통 "인간은 각기 개인인 것 같지만 모두 연관돼 있으며, 하기에 외로운 인생인 것 같지만 함께 걸어가는 누군가가 있기에 살 만하다"는 이야기를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영화 은 똑같은 이야기방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정반대의 이야기를 한다. 이렇게 얽히고 설켜 관계를 맺고 살아가지만, 그래서 완벽하게 혼자일 수는 없지만, 거미줄처럼 얽힌 관계 안에서 인간은 외롭기 그지없는 존재다. 함께 있으나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고, 대화를 하고 있으나 소통이 되지 않는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관계하고 있으나 관계로부터 소외된 존재다. 이 영화의 영문 제목이자 원작의 제목인 가 말해주듯 인물들은 공공의 장소에 있으나, 누군가와 함께 있으나, 외로움과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이쯤 되면 울증 치료제로 이 영화를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나는 이 영화에서 위로를 얻는다. 리오넬의 말대로 인생은 어차피 혼자 외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외롭다고 징징거릴 필요도, 혼자라고 세상 불행을 다 껴안고 있는 듯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억지로 안 외로운 척, 엄청난 구원이 있는 척 허세를 부리는 것 또한 우스운 일이다. 내 인생을 바꿀 노래란 원래 없다.

과장할 필요도 억지쓸 필요도 없는 평온함이 좋았다. 영화 내내 흐르는 눈발처럼 자연스러운 평온함이 나를 위로했다. 그리고 이렇게 외로운 인생들을 순간순간 키득거리는 웃음이 터져나올 정도로 가볍게 보여준 감독에게 고마웠다. 지지고 볶는 현실을 눈발 날리는 파리를 구경하듯 멀찍이서 관조할 수 있어서 좋았다.

 

역시 이웃님의 선택은 옳았다.

추천수0
반대수0

묻고 답하기베스트

  1. 언매 독학댓글0
더보기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