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27일 벌어진 수퍼웰터급 타이틀전을 본 사람들은 약간 어리둥절했을지도 모른다. 외모는 분명 흑인인데 트렁크 한쪽에 커다란 태극기를 달고 나왔다. 더구나 벨트라인에는 '경준'이라는 한국이름까지 새기고 있는 게 아닌가.
물론 이 '경준'은 그 국제사기꾼 김경준이가 아니다. 바로 이 흑인복서의 아들 '경준 필립스'의 이름이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트렁크에 새기고 타이틀매치에 임한 것이다.
카리브해에 위치한 소국 벨리스(Belize) 출신의 복서 버노 필립스. 그의 부인은 한국계로 그는 처갓집 나라의 국기를 트렁크 왼쪽에 자신의 조국의 국기를 트렁크 오른쪽에 달고 링에 올랐다.
'경준아빠' 버노 필립스는 1969년생의 노장이다. 호엘 카사마요르나 네이트 캠밸보다 2살이나 더 많다. 비록 과거 세계챔피언을 3번 지내기도 했지만 롱런하는 챔피언은 아니었고 엘리트 복서들에게는 패배의 쓴잔을 마셨다. 그의 전적은 54전 42승 (21KO) 10패 1무.
그러나 누가 감히 이 노장을 얕볼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세간의 예상을 뒤엎고 수퍼웰터급 최고령 현역 세계챔피언에 등극했다. 39세의 나이에 코리 스핑크스가 갖고 있는 IBF 라이트미들급(=수퍼웰터급) 타이틀에 도전하여 당당히 벨트를 차지한 것이다.
물론 코리 스핑크스는 수퍼웰터급 역대 최약의 펀치력으로 분류되는 솜펀치이긴 하다. 그러나 스스로를 디펜스 매스터로 자처하는 스핑크스의 전매특허 '도망 복싱'에 쓴잔을 마셔야 했던 강호들은 상당히 많다(심지어 잽주다나 마요르가 같은 하드펀처들까지). 더구나 스핑크스는 자타공인 판정마왕. 설상가상으로 시합이 벌어지는 곳은 스핑크스의 고향 세인트루이스... 38세의 노장 필립스에게 승산은 없어보였다.
노장들은 자신의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정신력과 독기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왠만한 젊은선수들보다 더 강력한 파이팅을 선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경준아빠는 38세의 노장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막강한 압박을 가했다. 물론 경준아빠는 잽주다 같은 초특급 공격력을 지닌 선수는 아니다. 그러나 블락을 확실히 한 단단한 디펜스를 앞세우고 돌진하는 경준아빠에게 스핑크스는 이렇다 할 공격을 전혀 하지 못했다.
스핑크스는 디펜스 매스터로 자처하기는 하나 '진짜 디펜스 매스터' 메이웨더에 비하면 방어 능력은 현격히 떨어진다. 하기야 스핑크스는 마요르가의 펀치를 팔 대신 뒤통수로 가드하여 감점을 마구 빼앗아내 판정으로 승리한 전력도 있다. 그러나 경준아빠는 무조건 냅다 갈기고 보는 마요르가와는 달리 막을 거 다 막은 다음에 반격하는 타입이다. 펀치력이 없고 가드가 낮은 스핑크스에게는 가장 까다로운 타입이었을 터.
물론 경준아빠도 헛손질은 많이 했다. 그러나 12라운드 내내 찰거머리 같은 압박을 가한 경준아빠의 퍼포먼스는 결코 빛이 바래질 수 없다. 스핑크스는 너무나 무기력했다.
12라운드 경준아빠의 체력을 보라. 젊은 선수들도 12라운드에는 저런 움직임이 나오기 힘들다. 경준아빠가 얼마나 무서운 각오로 시합을 준비했는지 알 수 있다. 체육관에서는 경준아빠의 동료들이 'you're not old'하고 외치면서 암시를 주었다고 한다.
38세의 나이에 세계타이틀을 차지한 경준아빠. 멋져용. 경준아빠가 돌진할 때마다 휘날리던 태극기. 정말 멋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