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왕릉은들은 곤광안내표지판이 크고 잘 보이지만, 이곳 선덕여왕릉은 차를 타고 가다보면 지나치기 쉬운곳이었다. 이것 또한 남녀차별인가?
입구에 차를 대고 약 10여M올라가니 넓게 펼쳐진 공터가 보였다.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터 였다.
이곳은 문무왕때 절을 짓고서 그 이름을 사천왕사라 하여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최초로 건립된 쌍탑가람(雙塔伽藍)으로서 호국사찰의 성격을 갖추었다고한다. 지금은 일제때 철도를 부설하면서 많이 훼손된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 앞에 놓인 광경은 참으로 황당한(?)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길이 끊겨있었다. 참으로 황당한 장면이었다. 철길이 놓여져 기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분명 선덕여왕릉의 입구라는 표지를 보고 길을 따라왔는데, 기차가 지나 가고 있다니.....
일제때 민족정기를 끊기위해 철도를 이렇게 길을 가로지르면서 놓이게 되었다고 한다.
독도가 제 나라땅이라고 우겨대며, 교과서에 넣게하려한다는 일본의 행각을 다시 생각하면서 울분이 치켜울랐다. 민족의 혼을 완전히 뿌리뽑고, 민족정기를 말살하기위해 온갖 짓을 저지르고도 아직도 저러고있는데, 이땅의 대한의 후예라 하는 우리는 먼 나라 얘기인냥, 지금도 아무생각이없이 살아간다는 그 자체에 격분이 치 솟아 올랐다.
오고가는 길인데, 안전장치 하나없이 그냥 방치되어있었다. 그것도 선덕여왕릉이라는 팻말이 있고, 또한 그곳을 오르내리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착찹한 생각을 하며 한 5-6분을 오르니까 앞에 반가운 표지판이 나를 맞이해주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다르게 화려하지도 않았고, 그저 안내 포지판이었다.

경주낭산에 대한 소개와 목적지인 선덕여왕릉을 알리는 표지판이 초라하지만 반갑게 안내하고있었다. 다시 기대를 안고 산길을 재촉하여 올랐다.
경주낭산(慶州狼山)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에 있는 산. 총 82만7845㎡. 사적 제163호. 보문동·구황동·배반동의 3개 동에 이어져 남북으로 장축을 이룬 야산이다.
신라시대에는 3사(三祠) 가운데 대사(大祠)를 받들던 중악(中嶽)으로, 서라벌의 진산(鎭山)이었다. 높이 115·102·100m에 달하는 3개의 봉우리를 따라 그 아래 능선을 중심으로 중요한 유적과 유물이 많이 있다.
그중 대표적 유적으로는 그 남쪽 끝에 있는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와 망덕사지(望德寺址)를 비롯하여 동북쪽에 자리잡은 신라왕실의 기복사찰이었던 황복사(皇福寺) 사지, 그리고 문무왕의 화장터로 추정된 능지탑(陵只塔)과 함께 남봉 아래 자리잡은 선덕여왕릉을 들 수 있다.
서쪽에는 신라의 궁궐로 이름 높은 반월성, 동궁으로 알려진 안압지가 있으며, 이와 매우 가까운 거리에 황룡사지와 분황사가 있는 등, 신라왕실과는 밀접한 연관을 지닌 산이다.
특히, 실성왕대(402∼416)에는 이 산을 신유림(神遊林)이라 하여 성스러운 산으로 추앙하였다. 즉, ≪삼국사기≫ 권3 실성이사금조(實聖尼師今條)에는 “낭산에서 구름이 떠올라 바라보매 마치 누각과 같고, 향기가 짙게 퍼지며 오랫동안 없어지지 아니하였다. 왕이 말하되, 이는 반드시 선령(仙靈)이 하늘에서 내려와 놂이니, 아마 이 땅이 복지(福地)일 것이라 하여, 이로부터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낭산의 중요 유적·유물을 북쪽에서부터 개관하면, 먼저 산의 동북단에 있는 황복사지를 주목할 수 있다. 이 절터 주변에서는 ‘皇福(寺)’ 또는 ‘王福’과 같은 명문의 기와조각이 발견되었으며, 삼층석탑 전방 금당지로 추정되는 지점에는 여러 개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매몰되어 있다.
또한, 그 남쪽에는 2구의 석조 귀부가 파손된 채 남아 있으며, 주변에서는 명문을 지닌 비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그 성격으로 보아 사적비 또는 탑비로 추정된다.
이곳의 석탑은 1942년 중수 때 발견된 2구의 순금불상과 사리구를 비롯하여, 금동함에 기록된 탑지(塔誌)의 내용에 의거해볼 때, 700년을 전후하는 시기에 왕실의 기복을 위하여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산의 서북쪽에는 시내를 바라보는 곳에 최치원(崔致遠)의 독서당이 남아 있으며, 그 아래에는 신라시대의 목탑지 또는 건물지가 있어 옛 자취를 살필 수 있다.
독서당 남쪽에는 중요한 절터가 있었으나 알 수 없고, 이곳으로부터 이동된 석조십일면관음보살입상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또 민족항일기에 옮겨진 석조관음입상을 비롯하여 석탑재들이 현장에 흩어져 있어, 당시 낭산이 지녔던 불교미술의 위치를 대변해 주고 있다.
특히, 현칭 중생사(衆生寺)의 마애지장보살상은 그 유례가 희귀한 피모보살상(被帽菩薩像)이며, 그 남쪽 약 250m 지점에 능지탑이 위치하는 등, 이곳 유적의 시사하는 바가 크다. 능지탑 동편 마을을 오늘날에도 강선리(降仙里)라 하는 것은 옛 사적을 따라 붙여진 전통적 명칭이며, 강선리 주변에도 탑재가 흩어져 있다.
남봉의 아래에는 선덕여왕릉이 현존하며 그 아래 사천왕사지가 있다. 사천왕사와 망덕사는 낭산의 남단에 있는 사찰로서 서로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사천왕사는 문무왕 당시 명랑(明郎)의 비법에 의하여 당나라 군사를 물리친 호국사찰로서 더욱 유명하다. 이와 같은 국방적 사찰이 이곳 낭산의 남단, 가장 중요한 신유림에 위치하였음은 낭산의 지리적 중요성을 인식하게 하는 단서가 된다.
사천왕사는 당시 조각의 명장(名匠)인 승려 양지(良志)의 작풍을 알게 하는 통일신라시대의 중요한 유적지임에도 불구하고, 민족항일기에 금당지와 강당지를 가로지른 의도적인 철도 개설로 인하여 파괴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당지 전방에 배치된 목조쌍탑지는 통일기의 사원 건축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그 전방에 놓인 2구의 석조 귀부 가운데 하나가 문무대왕비였던 점 또한 사찰 건립의 배경을 짐작하게 한다.
이와 같이 낭산은 역사·인문·지리적으로 중요한 산일 뿐 아니라, 고대 유적과 유물이 많이 남아 있는 산으로서 주목되며, 또한 호국사상의 본거지가 되었던 곳으로서 중요한 역사적 현장으로 평가된다.
그렇게 5분여 산길을 올라가니 한무리 사람들이 능앞에 있었다. 아마 이 지역 답사를 왔나보다. 드디어 선덕여왕릉에 오르게 되었다.
석양이 내리는 낭산의 남쪽 기슭에서 여황제를 이렇게 뵈었다. 이곳 경주에 와서 의미있는 답사의 일정이었다. 사실 선덕여왕의 업적이란 알고보니 엄청난 일을 했던 분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의 토대를 마련한 분이었도, 첨성대라던지, 문화적인 업적으로도 굉장한 일을 하였던 분이었다. 우리의 역사에서 그 진가를 드러내지 못한 분 중의 한분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태모님 또한 아직도 완전히 드러나지 않고 있는 신비의 인물이다. 우리의 한민족사에서 참으로 자랑스러울 역사적인 업적을 지니신 분인데도 철저하게 연구되지않고 신비의 베일속으로 사라져있는 분이다. 우리의 역사가 언제나 올바르게 서고, 제대로된 정신을 가지고 살아갈지 ......
착찹한 심경으로 길을 내려오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떠 올랐다.
우리대한의 혼이 언제쯤이면 다시 웅비 할 수 있을까?
-- 佑 redseeker -- www.openppl.net 칠성문화의 길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