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coupe

박광호 |2008.05.03 23:41
조회 125 |추천 0


쿠페, 가장 아름다운 허영

 

 


“도대체 슈퍼카에 그렇게 몰두하는 이유가 뭐죠? 성능 때문인가요?” “천만

 

에…. 내 삶을 지배할 정도로 아름답기 때문이죠. 그 2도어 차체를 한번

 

찬찬히 바라보세요.”

 

 

 지난해 9월, 이탈리아에서 날아온 호라치오 파가니 씨를 만났다. 핸드메이

 

드 슈퍼카 브랜드 파가니의 설립자인 그는 유독 2도어 스포츠 쿠페 디자인에

 

강한 집착을 드러냈다. “죽기 전에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차를 만들어내

 

는 게 꿈”이라는 그의 말은, 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자동차의 원초적 아름다

 

움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그는 도어가 여럿 달린 긴 차체가 싫다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자동차의 이상적인 도어 개수는 오로지 두 개. 이유는 간단하

 

다. 도어가 두 개일 때 가장 아름다운 차체를 그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자동차는 도어를 두 개 가졌을 때 가장 아름답다. 스타일링을 결정

 

짓는 루프라인이 가장 예쁘게 내려앉을 수 있고, A필러와 C필러가 가장 아

 

찔한 각도를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쿠페다. 그러면 겉멋 때문에 포기한 뒷좌

 

석 공간은 어떻게 할 거냐고? 하지만 자동차에는 뒷좌석만 있는 게 아니

 

다. 차의 크기에 비해 운전석이 가장 편안한 차가 바로 쿠페다. 이 세상 모

 

든 차가 뒷좌석을 위해 스타일을 희생해야 할 이유는 없다. 어차피 자동

 

차의 진수는 운전석에서 맛보는 것이고, 그러자면 오로지 그 맛에만 몰두할 수

 

있는 매개체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쿠페다. 대다수의 쿠페가 스포츠성

 

을 강조하는 이유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한 세기 전, 처음 태어난 자동차는 지금처럼 온 가족을 위한 물건이 아니

 

었다. 자동차는 철저히 개인의 공간이었고, 주인공은 뒷좌석에 앉아 신문을

 

펼쳐 든 VIP가 아니라 운전석에 앉은 드라이버였다. 기술적 혹은 디자인상

 

한계 때문이라는 반론도 물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세상에 처음 태

 

어났을 때 자동차는 분명 운송수단이기에 앞서 꿈을 담고 있는 기계였다. 쿠페

 

는 자동차가 보편화된 요즘 세상에도 본래의 존재감을 그나마 잃지 않는 존

 

재다. 세단이나 SUV에서는 느끼기 힘든 흥분과 열정이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쿠페가 사라진다면 전 세계 자동차 마니아의 절반 정도는

 

새로운 취미를 찾아 떠날 것이다. 쿠페에는 단순히 시장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성이 있어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메르세데스-벤츠나 혼다, 폭스바겐, 포르쉐처럼 속된

 

말로 차에 미친 사람이 만든 자동차 브랜드가 없다. 처음부터 산업일 뿐이

 

었다. 산업은 문화나 열정 따위와 연결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쿠

 

페는 생활필수품이 아니라 문화에 훨씬 가까운 존재. 우리나라의 토양은 근본

 

적으로 쿠페를 위한 밑거름이 되어주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쿠페가 ‘어

 

정쩡하게 낀 스타일’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쿠

 

페는 결코 낀 스타일이 아니다. 드라이버를 위한 꿈의 기계였던 차가 점차

 

일상 속으로 파고들어 생활필수품이 되면서 더 많은 도어와 더 넓은 뒷좌석,

 

더 넓은 짐칸이 필요해졌을 뿐이다. 그 정체성을 따지면, 어디에서든 꿀릴

 

이유가 없다. 그래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자동차는

 

처음부터 드라이버의 것이 아니라 가족 모두의 것이었다. 차 한 대로 아버지

 

의 출퇴근에서부터 가족 여행에 이르기까지 모든 걸 감당해야 했으므로 쿠페

 

로선 애당초 호락호락한 토양이 아니었다. 감성이 빠진 자동차는 쇳덩이일

 

뿐. 현대 스쿠프 이후 간간이 면피용으로 등장한 국산 쿠페만으로는 도무지 성에

 

차지 않던 우리나라 자동차 시장의 숨통을 그나마 틔워준 게 수입차다. 물론

 

그래도 아직 갈 길은 멀다. 우리나라 시장에서만 통한다는 도어 네 개짜리

 

폭스바겐 골프 GTI나, 인피니티 G35 세단은 난센스다. 2도어일 때 가장 예

 

쁜 차들인데,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유난스럽게 4도어를 찾는 통에 진짜 매

 

력을 보여줄 기회마저 빼앗긴 듯해 볼 때마다 안타깝다.

 

첫손에 꼽을 만큼 아름다운 세단 하면 피닌파리나 디자인의 3세대 재규어

 

XJ 정도. 하지만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쿠페를 꼽자면 한참 동안 추리고

 

추려야 할 것 같다. 호라치오 파가니만큼 쿠페 애호가는 아니지만 말이다.

 

페라리 디노도 아름답고, 모든 포르쉐 911 시리즈도 빼놓을 수 없다. 잔고장 많

 

기로 악명 높았던 1958년형 애스턴 마틴 DB4도 보디라인만큼은 뭇 여성들을

 

안달하게 만들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아우디에 네 바퀴 굴림 명문의 영예를

 

안겨준 주역인 1983년형 콰트로 스포트도, BMW의 걸작 3.0 CSL(1971년형)

 

도 모두 너무나 세련된 쿠페형 보디를 자랑한다. 하지만 쿠페의 정수는 1954

 

년에 태어난 메르세데스-벤츠 300SL 걸윙. 독특한 도어로 주목을 받아왔는

 

데 낮게 깔린 스포티한 보디라인은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답다.

 

 

 현재 국내 시판 중인 차종 가운데 꼽을 만한 쿠페는 아우디 TT와 인피니티

 

G37. 운전하기 쉽고 콤팩트한 것을 좋아한다면 TT가, 액티브한 운동 성능을

 

원한다면 G37이 딱이다. G37은 스포츠 쿠페로서 차체가 다소 크긴 하나,

 

충실한 운전석과 확실한 주행 성능만큼은 비할 데 없이 만족스럽다. 2억원

 

정도의 거액을 아낌없이 쓸 준비가 돼 있다면 재규어 XK 쿠페도 군침을 삼

 

킬 만한 매력 덩어리다. 올 하반기 데뷔 예정인 현대 BK도 기다려볼 만하다.

 

 

 쿠페의 매력에 처음 빠져들었던 기억은 16년 전, 북미 대륙을 남북으로 종단

 

했던 때다. 그때 탔던 차는 지금은 단종된 포드 선더버드 쿠페. 5m가 넘는

 

거대한 차체에 도어라고는 달랑 두 개뿐인, 우리 관점에서 보면 터무니없는

 

차였다. 하지만 적어도 사흘 밤낮 북미 대륙을 달릴 때만큼은 최고였다. 쿠

 

페는 오로지 운전자만을 위한 차임을, 운전자만을 위해 만들어진 실내가 얼

 

마나 좋은지를 그날 밤 선더버드의 운전석에서 뼈저리게 깨달았다. 깊은

 

밤, 바둑판처럼 뻗은 북미의 고속도로를 혼자서 달리는 매력이 얼마나 강렬

 

한지도 그때 알았다. 가족들이나 친구들과의 왁자한 여행도 물론 즐겁지만,

 

때로는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럴 땐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혼자만의 공

 

간이 필요하게 마련. 그 공간이 멋지게 생겼다면 물론 더 좋다. 쿠페는 그래

 

서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다.

 

 

Words 김우성(월간 한국판 편집장)


 

 

나도 엄연히 쿠페 오너닷!!

 

"스타일링을 결정짓는 루프라인이 가장 예쁘게 내려앉을 수 있고"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