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가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눈부신 햇살에 찰랑거리는 바람, 아직은 쌀쌀하지만 꽤 좋은 날씨였습니다.
소녀는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는 오늘 하루 왠지 기분이 좋을 것 같은 에감에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렇게 길을 걷던 중, 한 인형가게 앞에서 소녀는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쇼윈도에 앉아있는 묘한 매력을 가진 백발 인형에게 눈길을 뺏긴 것입니다.
소녀는 급하게 가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딸랑'
"아저씨, 저기 있는 저 인형은 얼마죠?"
"저기 저 인형을 말하는 건가?"
소녀가 본 백발의 예쁜 인형을 아저씨가 가르켰습니다.
"미안하지만 귀여운 아가씨, 저 인형은 파는 게 아니랍니다."
"어째서요?"
"저 인형은 팔려간 뒤, 꼭 다시 가게로 돌아오지.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순 없지만,
아무튼 그 뒤론 저 인형을 팔고 있지 않아요. 다른 인형도 많으니 쭈-욱 한 번 둘러보도록 해요."
"아저씨, 저는 저 인형이 아니면 안되요. 다시 바꾸러 오지 않을테니 저 인형을 저에게 팔면 안될까요?"
소녀는 인형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소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챈 아저씨는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아가씨에게 저 인형을 그냥 주겠어요. 하지만 절대로 저 인형을 다시 가지고 와선 안되요.
그땐 인형을 받아주지 않을테니까."
소녀는 알겠다고 하고선, 인형을 건네 받았습니다.
기분 좋게 가게를 나온 소녀는 인형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습니다.
"인형아, 나만은 절대 널 버리지 않을게."
그때 갑자기 인형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사랑해.'라고. 소녀는 인형을 쳐다봤습니다.
왠지 웃고 있는 듯한 인형을 보며, 소녀도 웃었습니다.
그 날부터 소녀는 매일 인형만 바라봤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소녀의 옆자리엔 항상 인형이 있었고, 잠을 잘 때도,
밖에 나갈 때도 소녀의 옆자리엔 늘 인형이 있었습니다.
소녀는 인형과 항상 함께 했습니다.
소녀는 인형에게 너무나 많은 시간을 뺏겼습니다.
소녀는 해야할 일도 미뤄놓은 채, 인형과 함께 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던 소녀의 생활은 조금씩 무너져갔고, 소녀는 힘들어하기 시작했습니다.
"난 단지 너와 함께 하고 싶었을 뿐인데, 너와 함께 하는 시간을 세상이 허락해 주질 않아.
어떡하면 좋겠니?"
"사랑해." 인형이 말했습니다.
"나도 널 사랑해. 그래, 이 세상 모든 걸 포기해야 할지라도 난 너와 함께라면 견딜 수 있어."
하지만 말과는 달리, 소녀는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소녀는 자신이 인형을 사랑하는 만큼, 인형도 소녀를 사랑해주고 있다는 생각에 행복했습니다.
그 어떤 고통도 참을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주위 사랑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모두 그 인형을 버리라며, 그 인형 때문에 소녀의 인생이 점점 망가져 가고 있다고, 인형을 욕했습니다.
소녀는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인형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하지만 소녀는 인형을 버려야겠다고 결국 결심합니다.
인형을 다시 인형가게에 가지고 갈 순 없었습니다.
아저씨가 인형을 받아주지 않겠다고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소녀는 늦은 밤, 집에서 나와 인형을 안고 뚜벅뚜벅 걸었습니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소녀는 하늘을 쳐다봤습니다.
"인형아, 제발 울지마.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미안해, 널 너무 사랑하지만, 널 너무 사랑해서 이럴 수 밖에 없는 날...
용서해줘. 더 이상은 내가 무너져가는 걸 견딜 수가 없어.
이대로 더 있다간 나도 없고, 더 이상 너도 없어.
널 마음에 품을 수 있도록, 이렇게 하는 날 이해해줘.
내가 없으면 내 마음에도 니가 있을 수 없잖아."
소녀는 그렇게 인형을 끌어 안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한참 뒤, 비가 멈추자 소녀도 울음을 그쳤습니다.
소녀는 가로등 옆에 살며시 인형을 앉혀 놓았습니다.
"이젠 정말 안녕."
소녀가 돌아서자 인형이 말했습니다.
"사랑해."
소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습니다.
"미안해, 나도 널 너무 사랑하지만 이젠 어쩔수가 없어."
"사랑..."
비를 맞은 인형은 고장이 나 소리를 잃어버렸습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소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집으로 뛰어갔습니다.
씻고 침대에 누웠지만, 인형 생각에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소녀는 밤새 소리없이 울었습니다.
날이 밝고,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소녀는 인형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옆에 없다는 생각을 하니 참을 수가 없어, 도저히 안되겠다며 인형을 찾아나갔습니다.
가로등을 향해 뛰어갔지만, 인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놀란 소녀는 그 주변을 샅샅히 뒤져보았지만, 인형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상심한 소녀는 그 뒤로 밥도 먹지 못했고, 밖에 나가지도 못했으며,
밤에는 침대에 없드려 밤새 울고, 아침이 되면 지쳐 잠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몇일을 보내던 소녀는 오랜만에 햇빛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초췌해진 소녀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했지만,
소녀는 인형 없는 하루를 견뎌보기 위해 힘을 내서 걸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소녀의 맞은 편에서 걸어오는 한 여자의 품에 그 인형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여자는 인형을 보며 방긋 웃고는 그 인형을 꼭 안았습니다.
"사랑해."
인형은 말했습니다. 그러자 여자는 웃었고, 다시 꼬옥 안자 인형은 또다시 '사랑해.' 라고 말했습니다.
소녀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소녀는 인형만을 사랑하고 인형 또한 자신만을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인형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걸 들으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소녀는 여자에게 달려가 인형을 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당황한 여자는 실갱이를 벌이다가 소녀를 밀어 넘어뜨리고는 도망갔습니다.
소녀는 일어설 힘도 없어, 맥없이 쓰러져 멀어져가는 여자와 인형을 한참동안 바라보았습니다.
눈물이 고였지만, 흐르진 않았습니다.
더 이상 짜낼 눈물도 없을 정도로 울었기 때문에, 이제는 눈물도 흐르지 않았습니다.
"너 없는 나는 이렇게 죽어가는데, 너는 어째서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
미안해, 그 때 널 그렇게 버리는 게 아니었어. 내가 정말 미쳤었나봐.
미안해, 용서해줘. 제발 다시 돌아와줘."
소녀는 참을 수 없는 슬픔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소녀가 눈을 떴을 대는 침대였습니다. 소녀는 무의식 중에 그 가게로 찾아갔습니다.
가게 앞 쇼윈도를 바라보자 그 인형이 있었습니다. 놀란 소녀는 가게로 들어갔습니다.
'딸랑'
"아저씨! 이 인형이 왜 여기 있는거죠?"
"아가씨가 버렸기 때문에 다시 제라리에 돌아와 있는거요."
"죄송해요, 인형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어요."
"괜찮으니까 돌아가봐요."
"아저씨, 이 인형 다시 저에게 주세요. 네?"
"한 번은 그냥 줬지만 이번엔 그냥 줄 수 없어요.
그리고 이번에도 아가씨가 버릴 지 누가 알겠어?"
"절대 버리지 않을게요. 그 땐 제가 어리석었어요. 제발 이 인형을 다시 저에게 주세요.
전 이 인형 없으면 안 된단 말이예요."
"난 아가씨의 말을 믿을 수 없어요."
"아저씨, 제발이요. 어떻게 해야 제 말을 믿을 수 있겠어요?"
한참을 땅을 보며 고민하던 아저씨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가씨의 두 눈과 목소리를 나에게 줘요. 그러면 아가씨의 말을 믿어주지."
"하지만 아저씨, 제 두 눈을 아저씨에게 줘버리면 전 이 인형을 다신 볼 수 없어요.
그리고 목소리를 준다면 인형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일 수도 없어요."
"그렇다면 아가씨의 두 팔을 내게 줘요."
"두 팔을 줘버리면 인형을 따뜻하게 안아줄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두 다리를 내게 줘요."
"두 다리를 줘 버리면 인형과 함께 밖에 나갈 수 없어요. 인형이 집 안에서만 숨막히게 갇혀있는 걸 볼 수 없어요."
"그렇다면 아가씨는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지?"
"그건..."
"아가씨는 저 인형을 위해서 아가씨가 가진 것 중에 단 한 개도 포기할 수 없단 말이잖아.
그런 아가씨의 어디를 보고 내가 믿어야 하는 거지?"
"....."
"돌아가요."
"전 인형 없이 돌아갈 수 없어요."
"어서 돌아가요"
"아저씨, 제발 부탁할게요."
"더 이상 이 인형을 버림 받게 놔둘 수 없어요."
"제발, 제발 부탁드릴게요."
"...."
"그렇다면 아저씨, 제가 이 인형을 버리는 순간, 제 목숨을 아저씨에게 드릴게요.
이 인형이 없다면 전 더 이상 살아있을 수 없을테니까요. 이러면 믿어주실래요?"
"그 약속, 아가씨가 그 인형을 버리는 순간 이뤄지니 그때가서 후회해도 소용없어요."
소녀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습니다.
"네,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딸랑'
소녀는 인형을 품에 안고 말했다. 미안하다고 그러자 '사랑해'라고 인형이 말했습니다.
소녀는 그러게 인형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소녀는 그 인형을 안고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
잠에 빠진 소녀는 인형을 손에서 놓쳤습니다.
그러고는 영원한 잠에 빠졌습니다.
인형은 말했습니다.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