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친 후에 (Knocked Up, 2006)
저속한 것과 고급스런 것이 있다. 단순하게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예를 들자면 일류호텔과 뒷골목 여관의 차이라고나 할까? 일류호텔이 끝내주는 시설과 비싼 숙박비의 장단점이 있다면, 여관은 왠지 모르게 혐오스럽지만 싸다는 장단점이 있다. 사랑하는 이와의 단 한번뿐이라 믿고픈 결혼 첫날밤을 위해서는 호텔을 선택하겠지만, 술집에서 만난 이름 모를 그녀와의 욕구분출을 위한 만남에는 여관을 사용한다. 세상의 그 눈에 띄는 급은 형식과 욕구에 따라 모양과 의미가 달라진다. 솔직하면 저속한 것이고, 조금 숨기려 들면 고급스러워 지는 것이 세상의 모순이라 말한다면 그것은 과장일까? 영화가 보여주는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은 이 모순 속에서 갈등하는 두 남녀를 보여준다.
저속과 것과 고급스러운 것이 결합하게 된다면 어떤 접합된 모습이 탄생할까? 이 영화 <사고 친 후에>는 그 접합의 심포니를 꽤나 유쾌하게 표현한다. 절대 유쾌하진 않지만 말이다.
영화의 노출부분만 따로 모아서 보여주는 대단한(?) 홈페이지를 운영하며 사는 저속한남자 벤과 이제 막 승진이 되어 뉴욕의 일류 방송 앵커가 될 절호의 기회를 잡은 고급스런여자 앨리슨은 우연한 기회에 원나잇 스탠드를 하게 된다. 두 사람은 기분도 좋고 일도 잘 풀려서 하룻밤 잘 놀고 헤어지게 된다. 좋은 대화를 나누고 좋은 만남을 가졌지만, 대화를 통해 서로의 처지를 알아버린 두 사람은 서로를 하룻밤 상대로 규정짓게 된 것이다. 이유는 서로가 두 사람의 급이 너무도 다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달 후 두 사람의 하룻밤의 유희가 아기라는 창조물을 빚어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이를 지울 수 없다고 생각한 두 사람은 아이를 위해서 서로의 관계를 개선시키기로 다짐한다. 즉 그 말이라 함은 저급과 고급이 포개어지기로 한 것이다. 극 중 이런 대사가 나온다.
‘아이들의 대단한 점은 보잘 것 없는 비눗방울을 좋아한다는 점이야. 비눗방울 그 까짓게 뭐가 대단해? 근데 아이들은 환장을 해. 저 아이들의 웃는 얼굴이 즐거움을 잊어버린 나를 되돌아보게 해.’
아이들은 비눗방울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왜냐 그것은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니까. 시각적이든 촉각적이든 청각적이든지 간에 아이들을 자극하는 비눗방울의 가치는 아이들을 환장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리기에 그렇다고 우리는 흐뭇하게 바라본다. 하지만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우리는 정말 비눗방울이 곧 터질 보잘것없는 것이라는 진실을 알 수 있을까? 높은 빌딩 숲 속의 알 수 없는 그 가치를 찾아서 공부를 하게 되는 나를 발견한다. 나를 이끄는 것이 한낱 포르노 속 소녀라고 해도 그것을 완전히 숨긴 채 나를 포장할 수 있는 데까지 모두 묶어 넣어서 세상의 가치를 향해 무모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내게 익숙한 것을 개발하지 않고, 세상이 인정하는 것을 개발하는 자신의 모습에 괴로워한다. 허나 그것을 바꿀 수 없는 것이 세상의 급의 힘이다. 우리는 여전히 비누방울의 아름다운 모습에 팔을 헤저으며 세상을 산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빤히 보이는 그 급을 실감한다. 어색한 키스를 하고, 내키지 않는 잠자리를 가지고, 어쩔 수 없는 청혼을 하게된다. 환영받을 수 없는 아이는 뱃속에서 커져만 가지만, 두 사람의 애정은 커지지 않는다. 두 사람이 행복해서 좋은 가정을 꾸리며, 맑은 눈을 가진 아이가 탯줄을 끊자마자 두 사람을 보고 ‘엄마 아빠 저 소통이에요!’ 해주었으면 바랄게 없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두 사람은 어울리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의 없음에 실망하고, 남자의 무관심에 절망하게 된다. 남자는 여자의 민감함에 당황하고, 여자가 가진 아이가 두 사람이 아닌 3인 관계가 됨에 부담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높고 낮은 급의 충돌이 이제는 남과 녀의 문제로 발전될 때, 우리는 화성남자와 금성여자의 이야기가 아닌 지구여자와 지구남자의 현실적인 문제들에 쓴웃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런 대사도 있다.
‘난 춤을 추고 싶어. 근데 못 추겠어. 왜냐고? 내 배는 산만하게 불어나 있으니까. 왜냐고? 내 나이가 춤을 추면 사람들이 나를 막나가는 여자로 생각할 테니까.’
세상이 겪는 충돌의 문제들이 있다. 그건 즐거워도 춤을 출 때 자신이 처한 사회적 위치를 살피는 바보 같은 주문이라고 하면 적당하다. 요즘 시대는 눈에 보이는 것을 선호하는 시대라고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 속물이 아닌 시대다. 그래서인지 결혼할 사람의 손목시계와 집안사정까지 보려고 한다. 그래 좋다. 그것도 눈에 들어오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본질은 등한시한 체 외부요인에 너무도 집착한다. 솔직해지려다 진짜 보아야 할 것을 놓쳐버렸다. 속물이 되지 않으려다 더욱 속물이 되어 버렸다. 영화의 노출장면만 따로 모아서 보듯 단편화된 시각에 인생을 건다.
영화는 사람과의 관계를 시작함에 있어서 그릇된 우리들의 자화상을 조명한다. 영화는 시종일관 배를 잡듯이 웃기지만, 서로 다른 급을 가진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우스꽝스러운 주조물일 뿐, 진정한 행복에서 나오는 웃음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영화가 못난 것이 아니라 영화 속의 우리들 모습이 너무도 씁쓸한 블랙코미디이기 때문일 것이다.
탄생은 영화를 헤피엔딩을 향한다. 조금 억지스러울 수도 있겠으나 갓 태어난 아이를 앉게 된 두 남녀의 모습이 예뻐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은 가장 이상적인 혹은 원초적인 인간의 모습이기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경건한 탄생의 순간이 속세의 덧없음을 비웃는다. 우린 언제나 순수한 행복을 그리워함에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체념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하게 된다. 그 행복의 체념이 관계의 체념으로 이어지고 있지는 않는지 걱정하게 된다. 거창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도 나를 열어볼 수 있는 계기를 주는 사고 친 후에는 꽤나 좋은 영화로 내 기억에 남을 것이다.
윤리적인 코미디란 가장 만들기 어렵지만, 가장 사람들에게 쉽게 생각거리를 던져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