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소설을, 그것도 단편을 읽는 것은
분명히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을 먹기 전의 기분과 같다.
무언가 색다르고 기대가 되고 겁이난다.
도서관에서 무심코 집었다가 김미현 교수님의 이, 을 보고
어, 이거 괜찮은데! 싶어서 당장 대출대로 달려갔다.
역시, 확실히 소설이 달라지고 있다.
그렇다고 무게감을 던져버리고 일본소설같은 퐁퐁 비누방울을 날리는 게 아니라
무겁게 짓누르던 역사의식, 그 강요를 벗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랄까.
좀 더 인간에 대한, 삶에 대한 성찰들이 담겨져있다.
김숨, 정미경, 천운영, 한강.
이들은 늘 나를 놀라게 하고 부럽게 한다.
다들 뚜렷한 작품세계가 있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항상 변한다.
'난 네가 왜 그렇게 M이랑 붙어 다니는지 이해를 못하겠더라'는 말을 자주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 친구가 조금씩 싫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이해라는 단어를 쓰는 게 싫었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는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리방패/김중혁
흙은 검고, 바위는 더욱 검다. 그 검음은 모두 옛날의 바다에서 왔다. 묽고 들큼한 습기가 어질머리 여름꽃을 피우고, 하지의 달이 섬의 공중을 구른다. 한 번도 비를 만든 적 없는 구름, 바름은 모든 돌들의 구멍을 센다. 검은 층층계의 장조와 단조의 화음은 노래가 아니다. 은빛 지느러미 오래도록 뒤척을 때, 섬의 거미들만이 땅이 식는 이유를 안다.
'행복하게 해 줄게'와 '불행하지 않게 해 줄게'는 다르다. '해 줄게'라는 말은 사실 더없이 이상한 말이다.
-이신조/ 앨리스, 이상한 섬에 가다
사람들은 자기가 한 말이 그냥 공기 중에 흩어져 버린다고 생각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말은 입 밖에 나오는 순간 새롭게 살아난다. 죽어가던 나무에 새 잎이 돋게도 하고, 듣는 이의 가슴에 환한 꽃다발로 걸리기도 하고, 때로는 못으로 박혀 파상풍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혜경/ 한갓되이 풀잎만
편하게 자란 아이들은 때로, 놀랍도록 보수적인 행태를 보인다. 제 부모세대보다 더, 제 삶을 그대로 두고, 변형시키지 않고, 필요한 것만 손 내밀어 집어들 수 있길 원한다.
사랑했다고? 그래, 목숨을 거는 사랑만이 사랑은 아니지. 백만 사람에겐 백만 가지 사랑이 있으니.
상실감과 죄책감은 봄과 함께 사라지겠지. 이젠 저지르는 죄마저 이렇게 하찮고 비겁하고 졸렬하다. 그런 나이가 되었다. 몇 번의 만남과 그보단 많았던 전화통화. 그 아이가 좋았던 나는, 사실은 그래서, 친해지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쓴 것 같다.
-정미경/ 내 아들의 연인
그는 길 한가운데 서서 녀석과 노파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수없이 무릎꿇고 절을 하고 굴종했으을 노파의 굽은 등. 순종하고 감추고 주눅들고 좌절했을 저 어린 녀석의 등. 그는 그 움츠린 두 등이 서로 쓰다듬고 위안하고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란히 걸어가고있는 두 등은 그렇게 서로 소통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는 자신의 너른 등짝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외면하고 고집 피우고 침묵하는 그의 등. 혼자 쓸쓸히 걸어가는 등. 바람이 그의 등을 휙 후려치고 지나간다.
-천운영/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
.....새장 밖으로 한 번 나온 새에게 가장 무서운 건 새장일 거야. 그런 새를 붙잡으려면 발톱이며 부리에 찢길 수 밖에 없겠지. 설령 새장에 다시 넣는 데 성공한다 해도 아마 새는 제 풀에 죽고 말거야. 네가 날 붙잡을 거란 얘기가 아니라, 만약 하나 붙잡았다고 해도 너한테 득이 될 거 없었을 거란 얘기야. 그러니까 잘 생각한거야. 미안해 할 것 없어.
-한 강/왼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