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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를 칭한 고조선과 연나라 강역도!

김윤진 |2008.06.14 11:04
조회 393 |추천 0

ㆍ조선을 연나라 땅이라고 우기는 中역사서

“연나라는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에 이르는 장성을 쌓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등 5군을 두어 오랑캐를 방어하였다.”(사기 흉노열전·연소공세가)

“연나라는 전성기 때 일찍이 진번(眞番)과 조선을 공격하여 연나라에 귀속시켜 관리를 설치하고 요새에 성을 쌓았다.”(사기 조선열전)

중국 랴오닝성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전국시대 연나라 강역도. 랴오둥은 물론 한반도 청천강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 연나라가 한반도까지?

이런 자료를 토대로 역사를 요리하는 중국을 보면 부러움 반 자괴감 반의 복잡한 기분이 절로 든다. 랴오닝성 박물관에 붙어있는 전국시대 연나라의 강역도를 보자. 그 경계가 랴오둥(遼東)은 물론 한반도 서북부까지 이른다. 화가 치밀어올라도 어쩔 수 없다. 잘못 대들었다가는 일패도지(一敗塗地)할 수밖에…. 사료를 반박할 그럴듯한 근거를 대라 하면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그만한 사료도 갖추지 못했기에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성을 갖고 보면 그들이 신주 모시듯 하는 사료에 숨어있는 허점을 발견할 수 있다. 중국 측 자료는 어차피 중국의 역사를 쓴 것이고, 주변국의 역사는 자기 역사를 치장하기 위한 양념일 뿐이다. 따라서 소략하게 취급하거나 폄훼하거나, 왜곡하기 일쑤다. 우리는 이쯤해서 마음을 다잡고 중국 측 사료에 담겨 있는 구절을 일일이 따져보고, 그것이 품고 있는 함의에서 진실을 찾을 참이다. 하지만 책장에서만, 그것도 숨은 뜻을 찾고자 하면 그 또한 자기 위주의 해석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여기에 중국학계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고고학적인 뒷받침, 곧 증거를 댈 참이다.

먼저 기자(箕子)조선의 강역 문제이다. 최근 지린대(吉林大) 역사교과서인 ‘동북사’는 “주나라 초기의 기자국(箕子國)은 고조선 땅에 있었는데, 지금 한반도의 대동강 유역(周初的箕子國位于古朝鮮地 也就是在今朝鮮大同江流域)”이라고 해놓았다.

차오양(朝陽)에서 확인된 춘추시대 청동단검 거푸집과 청동끌 거푸집.즉 기자가 은(상) 주왕(紂王)의 폭정을 피해 본향, 즉 은(상)나라의 옛 고향인 랴오닝성 서부지역으로 간 뒤 곧바로 한반도로 이동했다는 것이다.(箕子首先遷到今天的遼寧省西部地區 而後又從這里遷往朝鮮半島) 그러면서 교과서는 랴오닝성 카줘(喀佐) 등에서 나온 ‘기후(箕侯)명’ 청동기 등 각종 은(상)의 청동예기들을 그 증거로 들었다. 청동기 명문인 ‘기후(箕侯)=기자(箕子)’임을 논증한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이 교과서는 여전히 ‘기자조선의 영역=대동강 유역’설을 철옹성처럼 지키고 있어요. 이미 살펴보았듯 기자(箕子) 일행이 신주 모시듯 하고 가져왔던 은말 주초의 청동기들은 랴오허(遼河) 동쪽에서는 보이지 않아요.”

이 고고학적 자료들은 기자(箕子)가 랴오허를 결코 넘지 못했다는 뜻이다. 대신 기자가 정착한 다링허(大凌河) 일대에서는 BC 9세기 무렵부터 기자 일행이 기존의 고조선 세력과 함께 만든 문화, 즉 발해연안식 청동단검(비파형 동검)을 중심으로 한 난산건(南山根) 문화가 성행했다. 또 춘추전국시대 중원의 북방, 즉 중산국과 고조선 등 동이의 나라들과 국경을 맞댄 연나라의 역사를 보면 몇가지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다. 주나라 무왕이 은(상)을 멸한 뒤(BC 1046년쯤) 소공(召公) 석(奭)을 연(燕)에 봉했다.

차오양 십이대영자에서 출토된 청동거울.그런데 소공이 연나라 땅에 분봉을 받았음에도 주나라의 도읍지 풍(豊·지금의 펑이:豊邑) 주변을 맴돌며, 결국은 섬(陝·지금의 허난성 산셴:陝縣)의 서쪽 지방을 관할하는 지위에 오른다는 것이 두고두고 이상한 일이다.

즉 “주나라 2대왕 성왕(成王·BC 1042~BC 1021년)이 소공에게 뤄이(洛邑·뤄양)를 건설하게 했고, 나중에는 섬(陝)의 서쪽 지방을 관장하게 하였다”(사기 주본기·사기 연소공세가)는 기록이 이를 입증한다. 더욱이 주나라 초에는 은(상) 유민들의 반발이 워낙 거셌다. 주 무왕의 동생들인 관숙과 채숙이 은나라 유민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킬 정도였다. 성왕이 즉위한 뒤에야 겨우 산둥성(山東省)에 살던 동이족들을 정벌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동이족 계열인 은(상)의 반발이 거셌다는 얘기다.

“이는 무왕이 소공을 연에 봉했을 때는 주나라의 세력이 아직은 크지 않았다는 뜻이지. 성왕 초기에도 동쪽인 산둥성에서 헤매고 있었거든…. 은(상)의 항거가 워낙 거셌던 탓에….” (이형구 교수)

■ 연나라의 유적·유물은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무왕이 소공에게 분봉했다는 연(燕)은 어디일까.

“처음엔 지금의 허난성 옌스(河南省 偃師)일 가능성이 많아요. 언(偃)은 연(燕)자와 같거든. 그리고 성왕 이후에 지금의 베이징 서남쪽인 팡산셴(房山縣) 부근으로 둥지를 옮겼을 겁니다. 역사서에는 연의 도읍지를 지셴(계縣·上都)과 이셴(易縣·下都)이라고 했거든. 어쨌던 류리허(琉璃河)에서 확인된 연나라 왕의 무덤이 그 단서가 될 것 같아요. 류리허에서 서주 초에 축조된 연나라 성터와 왕의 무덤이 발굴되었거든.”

그런데 이것이 마지막이다. 이 류리허 유적의 북쪽, 즉 옌산(燕山) 이북에서는 전형적인 춘추시대 연나라 유적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전형적’이라 하면 하나의 세트, 하나의 패턴을 갖춘 유적과 유물의 조합을 뜻한다.

“유적이나 유물들이 ‘하나의 문화’, 혹은 ‘하나의 영역’으로 규정되려면 유적·유물이 하나의 정연한 세트를 이뤄 일정한 패턴으로 확인돼야 합니다. 그냥 한 두 점씩 여기저기 흩어져 나온다면 유의미한 문화라 할 수 없어요.”(이 교수)

만약 춘추시대 연나라가 옌산을 넘어 다링허 유역은 물론 랴오둥 반도까지 영역을 넓혔다면 류리허 같은, 아니면 그에 버금가는 유적들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누누이 강조하지만 옌산 이북부터는 발해연안식 청동단검(비파형 단검) 문화로 대표되는 고조선(기자조선)의 문화가 보일 뿐이다.

■ 천하의 유세가 소진(蘇秦)이 남긴 한마디

또 하나 중요한 단서가 ‘전국책’ 연책(燕策)과 ‘사기’ 소진열전 등 사료에 숨어 있다.

전국시대를 혀(舌) 하나로 누빈 합종(合從)의 유세가로 6국의 재상을 겸한 소진(蘇秦)의 유세를 보자. BC 334년 소진은 합종을 위해 연나라로 가서 “연·제·위·한·조·초 등 6국이 합종하지 않으면 강대한 진(秦)나라를 이길 수 없다”고 설파한다. 그러면서 앞세운 말.

“연나라는 동쪽으로 조선과 요동에 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임호와 누번이 있습니다.(燕東有朝鮮遼東~)”

혀로 천하를 호령한 소진 같은 유세가가 연나라를 중심으로 말을 꺼낸다면 있는 순서대로, 즉 조선→요동 순으로 차례차례 말했다고 보는 게 상식이 아닐까. 그러니까 조선은 요동(랴오둥)의 서쪽, 즉 랴오시(遼西)에 있었다는 말이 아닐까. 또 하나 소진의 말에서 또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면 이 시기, 즉 BC 334년에는 최소한 조선과 랴오둥은 연나라의 영역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 연나라의 전성기

그렇다면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한 중국 사료, 즉 연의 강역이 동으로 랴오둥을 넘어 한반도까지 이른다는 기록은 어찌된 것인가.

여기에는 한가지 오해가 있다. 우선 춘추시대 연나라의 강역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지금 ‘사기’ 연소공세가와 조선열전, 흉노열전 등에 나오는 연나라의 강역은 전국시대 중기~말기, 즉 연나라 전성기의 기록이다.

“연나라는 밖으로 만맥(蠻貊·북동쪽 동이족을 멸시한 명칭일 것) 등 여러 종족과 대항하고, 안으로는 제(齊)와 진(晉) 등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느라 국력이 가장 약했고, 망할 뻔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800~900년간 사직을 보존했으며~.”

사마천의 논평(연소공세가)은 전국 7웅이지만 국력이 가장 약한 연나라에 대한 연민을 표현한 것이다. 하기야 그랬을 것이다.

BC 316년, 연왕 쾌(쾌)가 재상인 자지(子之)에게 왕권을 넘겨주자 연나라는 큰 혼란에 빠졌는데, 이 때를 틈타 제나라와 중산국이 손을 잡고 연나라를 쳤다.(경향신문 4월26일자 참조) 이때 중산국에 땅 500리와 성 10곳을 빼앗기는 수모를 겪고(314년), 나라는 거의 망국에 이른다. 이 때 등장한 이가 바로 연나라의 중흥군주 소왕(昭王·재위 BC 311~BC 279년)이다.

소왕은 인재를 널리 구하는 데 힘썼다. 군사전략가인 악의(樂毅·BC 406년 중산국을 멸한 위나라 악양의 후손)가 위(魏)에서, 음양오행에 해박한 추연(趨衍)이 제나라에서, 힘이 장사인 극신(劇辛)이 조나라에서 일제히 달려왔다.

소왕은 BC 283년 무렵 진(秦), 초, 한, 조, 위 등과 함께 제나라에 대한 복수를 감행했다. 다섯 나라 중 유일하게 연나라 군사만이 제나라 수도 임치(臨淄)까지 진입, 제나라의 궁묘와 종묘를 불살라 버렸다. 제나라 성 가운데는 즉묵(卽墨·산동성 핑두셴:平度縣) 등 3성만이 남았고 나머지는 모두 연나라에 속했다. 이번에는 반대로 제나라가 6년간 멸망 일보 직전까지 몰린 것이다.

■ 진개의 침략

그런데 이 글의 맨 처음에 인용한 ‘사기’ 흉노열전을 보면 재미있는 기록이 나온다.

“연나라 명장 진개(秦開)가 흉노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그들의 신뢰를 받은 후 돌아와 군대를 이끌고 동호(東胡)를 습격, 패주시켰다. 동호는 1000여리나 후퇴했다. 진개는 훗날 자객인 형가(荊軻)를 수행해서, 진왕(秦王·훗날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秦舞陽)의 할아버지이다. 연나라는 조양, 양평에 이르는 장성을 쌓고~.”

이제 이 문제의 인물인 ‘진개’가 등장한다. 진개는 언제 적 사람인가. 기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유명한 ‘형가의 진시황 암살미수 사건’에서 추론할 수 있다. 형가 사건이 일어난 것이 BC 227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형가를 수행한 진무양의 할아버지인 진개는 연 소왕의 전성기, 즉 BC 283~BC 279년 사이에 활약했던 장수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자, 진개란 인물이 또 한 번 등장하는, 그 유명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韓)조를 보자.

“조선후(朝鮮侯) 준(準)이 감히 왕(王)을 칭하였다. 연나라 망명인인 위만(衛滿)이 공격하여 (기자조선을) 빼앗았다.”

그런데 이 단 한 줄에 불과한 이 기록에 덧붙여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壽·AD 233~297년)는 ‘위략(魏略)’이라는 역사서를 장황하게 인용한다. 전체적인 내용과 풀이는 다음 회로 넘기기로 하고 연나라의 강역 부분만 인용해보면….

“위략에 따르면 조선왕이 왕을 칭하는 등 점점 교만해지자 연나라가 장수 진개(秦開)를 파견하여 그 땅의 서방을 공격하여 땅 이천리를 취하였다.”(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에서 진수가 인용한 ‘위략’ 에서 부분 발췌)

그러니까 ‘사기’ 흉노열전과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 사서를 종합하면 연나라가 소왕 때, 즉 BC 300~BC 280년 사이 북방으로는 1000리, 동쪽으로는 2000리를 공격, 강토를 넓혔다는 얘기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다시 증거물, 즉 고고학적 자료와 역사서가 품고 있는 숨은 뜻을 찾을 수밖에 없다.

 

[코리안루트를 찾아서](32) 천자를 칭한 조선 입력: 2008년 05월 23일 17:45:48   ㆍ연나라와 대등했던 고조선의 위세

ㅃ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韓)조의 내용을 조목조목 풀어보자. 기승전결을 갖춘 베스트셀러 소설 같다.

“위략(魏略)에 이르기를 주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 연나라가 왕을 칭하고 동쪽 땅을 다스리려고 하자(欲東略地), 옛날 기자(箕子)의 후손인 조선후(朝鮮侯)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亦自爲王) 병사를 이끌고 연나라를 공격하여 ‘주(周)’의 왕실을 지키려 했다.”

만리장성 너머 랴오닝성 젠창셴에서 확인된 청동단검. 고조선 문화인 청동단검 문화를 받아들인 연나라 장군 진개의 무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연나라가 제·조·위·중산국 등 다른 네 나라와 함께 왕(王)을 칭한 것은 BC 323년이었다. 왕을 칭했다는 것은 이미 주나라를 천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연나라가 왕을 칭하자 조선도 역시 스스로 왕을 칭했다. 그러면서 연나라가 동쪽땅, 즉 조선땅을 노리자, 조선이 도리어 주(周)왕실을 지킨다는 구실로 연나라 타도를 외쳤다는 뜻이다.

“(조선이 연을 공격하려 하자) 대부 예(禮)가 ‘절대불가하다’고 간하자 (왕은) 공격을 멈췄고, 대부 예를 연나라에 보내 이야기하니 연나라도 (조선에 대한 공격을) 그쳤다.”

조선왕이 연나라 타도를 외치자 대부(大夫) 예(禮)가 강력하게 만류했다는 얘기다. 조선왕은 공격의 뜻을 철회한 뒤 대부 예를 연나라에 사신으로 보낸다. 연나라는 조선후가 왕을 칭한 것에 격분했을 것이다. 바야흐로 유세가들이 세치 혀로 천하를 주물렀던 전국시대 중기. 조선의 유세가 예는 화려한 언변으로 연나라왕을 녹여 연의 조선침공을 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후에 (조선의) 자손들이 교만해지자 연나라는 장수 진개(秦開)를 파견, 그 땅(조선)의 서방을 공격하여(攻其西方), 땅 2000여리를 취하였다.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경계를 삼자 조선이 약해졌다. 진(秦)이 천하를 얻자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게 하였다. 이 때 조선왕 비(否)가 즉위했다. 진나라가 공격할까 두려워 진나라에 복속했지만 조회에 참석하지는(알현하지는) 않았다(不肯朝會).”

이 기록에 따르면 연나라는 마침내 진개를 보내 조선의 서방을 공략, 2000리나 되는 땅을 차지했다. 연나라 강역도를 보면 연나라는 한반도 청천강(만번한을 청천강으로 본 것)까지 이른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조선의 세력은 악화됐다. BC 221년 급기야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자 조선은 크게 두려워 해서 진나라에 복속했지만 진시황을 직접 찾아가 알현하지는 않았다.

■ 연개소문을 떠올리는 이유

일단 여기까지의 ‘위략’ 내용이 담고 있는 속뜻은 무엇일까.

다링허~랴오허 사이에 140㎞나 뻗어있는 요택(遼澤). 당나라군이 고초를 겪은 곳으로 유명하다.

“BC 4세기에서 BC 3세기 사이 조선의 위세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어요. 조선이 ‘감히’ 천자를 뜻하는 ‘왕’을 스스로 칭했잖아요. 연나라로서는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겠지. 게다가 연나라가 조선을 우습게 보고 공격하려 하자, 조선은 ‘주 왕실의 존숭을 지킨다’는 명목 아래 연나라를 오히려 공격하려 들고….”(이형구 선문대 교수)

조선의 대부 예의 외교로 양국은 충돌을 면했지만, 악감정은 눈덩이처럼 쌓이고 있었다.

“당시 기자조선-연나라 관계로 훗날 고구려-당나라 관계를 떠올릴 수 있어요. 연개소문과 그 아들들, 그리고 기자조선의 왕과 그 자손들은 닮은 꼴로 중국과 대립한 것이거든….”

하지만  연나라는 BC 314년 제나라와 중산국의 침략 때문에 존망의 위기에 섰던 터라 조선을 넘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중흥군주인 소왕(昭王·재위 BC 312~BC 279년)이 즉위했고, 마침내 BC 280년을 전후로 진개를 파견, 조선 땅 2000리를 공략하고 랴오시(遼西)·랴오둥(遼東), 한반도 서북부까지 진출했다는 것이다.

고대사를 둘러싼 하나의 수수께끼는 해결하는 셈이다. 즉

■ 둥다장쯔 유적의 비밀

지난 2002년 봄, 당시 궈다순(郭大順) 랴오닝성 문물국장은 마침 선양(瀋陽)을 방문했던 이형구 교수에게 씩 미소를 흘렸다.

“이 선생, 하나 재미있는 게 나왔어요. 청동단검이 나왔는데, 이 선생이 보면 아마 고조선과 연결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반농담조였지만 흥미로웠다. 이형구 교수는 마침내 ‘2000년 중국 중요고고발현’이라는 약(略)보고서를 입수할 수 있었다.

“중국문물국이 2000년 발굴한 중요 유적 24곳에 대한 약보고서였어요. 그런데 만리장성을 넘어 다링허(대릉하)로 가는 길목에 있는 랴오닝성 젠창셴(建昌縣) 둥다장쯔(東大杖子)촌에서 전형적인 청동단검(후기형식·BC 4세기 말~BC 3세기 중엽)이 적석목곽묘에서 출토되었어요.”

마을의 거리와 식당에서 모두 54기의 고분이 확인됐는데, 서울 풍납토성처럼 이곳도 보존과 개발의 틈바구니에서 확인되었던 터라 학자들의 접근이 무척 껄끄러웠다.

“지금도 현장은 볼 수 없어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궈다순씨가 반농담조로 말했듯 한국 학자가 가면 고조선과 연결시키려 하기 때문에 기피하는 측면도 있을 것이고….”

문제는 (고)조선의 전형적인 석곽묘와 손잡이를 황금으로 만든 청동단검은 물론 전국시대 후기(연나라)의 전형적인 청동기들이 함께 나온다는 뜻이었다.

“약보고서의 결론을 보면 흥미로워요. 우선 고조선의 대표문화인 청동단검들이 분포한 가장 서남단에 위치한 유적이라는 점, 그리고 고분의 분포가 광활하고 묘 주인의 신분이 높은 점 등을 보면 이 무덤의 주인공이 연나라 시대의 군사장령(軍事將領), 즉 장군의 무덤이라고 분명히 해두었어요.”

이 교수는 “여러가지 추측을 할 수 있지만 연나라가 파견한 장군이 이곳에서 현지인, 즉 고조선 사람들과 살면서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인 뒤 죽어 묻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기자(記者)는 이쯤해서 BC 280년 무렵 조선을 공격한 진개 장군이 퍼득 떠오른다.

“무덤의 규모나 문화 양상을 보면 연나라 장수 진개의 무덤일 수도 있지. 시대와 유물양상 등을 보면….”

앞서 인용한 ‘위략’의 내용, 즉 “진개가 조선의 서쪽을 공격했다(攻其西方)”는 것과 진창셴 유적을 검토하면 만리장성을 넘으면 곧 고조선(기자조선) 의 영역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 랴오허를 넘지 못한 연나라

그렇다면 진개의 침략(BC 280년 무렵) 이후 연나라는 랴오둥을 건넜을까. 춘추시대 때 만리장성 너머 랴오시(遼西) 지방에서 전형적인 연나라 유적이 보이지 않았듯, 진개의 침입 이후에도 랴오둥 지역에서도 ‘전형적인’ 연나라 유적 및 유물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형구 교수는 사기 ‘흉노열전’을 주목한다. “진개가 군대를 이끌고 동호(東胡)를 공격, 1000리를 패주시켰다”는 기사.

“이 동호라는 표현이 혹 조선을 뜻하는 게 아닐까. 옛 기록에 호(胡)=이(夷)라고도 했어요. 또 진개가 조선을 치고 2000리를 넓혔다는 기사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에서만 나오거든. 나머지 역사서는 모두 동호 1000리만을 기록했어요. 이 동호가 나는 조선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진개는 2000리가 아니라 1000리, 즉 랴오허 동쪽만 점령했다는 얘기다.

중국의 고고학자 천핑(陳平)은 ‘연문화(燕文化)’라는 책에서 조심스럽지만 이렇게 해석한다.

“이우뤼산(醫無閭山·랴오시 푸신:阜新)을 기점으로 동쪽으로는 전국시대 연나라 문화의 전형적인 유적·유물이 보이지 않는다. 연나라 희왕(喜王) 33년(BC 222년) 랴오둥으로 피신하기 이전에는 연나라가 진정으로 랴오허(遼河)를 건너 랴오둥 지역에 진입하지 못했다.“

BC 222년은 연나라 희왕이 진나라의 공격을 피해 랴오둥 지역으로 피신했던 때였다. 이는 진개가 조선을 침략했지만 연나라는 60년 가까이 랴오허를 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하나, ‘삼국지’ 위지 동이전은 “진개의 침략 이후 조선은 약해졌으며, 이후 천하통일을 완성한 진나라가 두려워 복속했다”고 썼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고조선은 자존심만큼은 잃지 않았다. “복속은 했지만 (진시황을) 알현하지는 않았다”(삼국지 위지 동이전)는 기록이 이를 증명해준다. 천하를 떨게 한 진시황 치하인데도 직접 가서 무릎을 꿇지는 않은 것이다.

■ 위만의 조상은 동이족?

이제 다시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사기’ 조선열전을 검토해보자.

“(조선에서는) 비왕이 죽고 준왕(準王)이 즉위했다. (중국에서는) 20여년 뒤 진섭(陳涉)과 항우(項羽)가 반란을 일으키자 연·조·제나라 백성들이 조선의 준왕에게 망명하니, 준왕이 이들을 서쪽에 머물게 했다. (한나라 때 연나라 왕으로 책봉된 노관이 흉노로 망명하자) 연나라 사람 위만이 (상투를 틀고) 오랑캐 옷을 입은 뒤 준왕에게 항복했다. 위만은 준왕에게 중국망명인으로서 ‘조선을 지키는 병풍이 되고자 한다’고 간청했고, 준왕은 은혜를 베풀어 위만을 서쪽 변방을 지키는 우두머리로 봉했다.”

이것은 위만의 등장에 관한 기사다. 준왕은 ‘조선의 병풍이 되겠다’는 위만의 말을 믿고 그에게 박사 벼슬을 내리고 서쪽 100리의 땅까지 내주며 철석같이 믿고 말았다. 하지만….

“위만이 망한 무리들을 꾀어 세력을 키운 뒤 급기야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 거짓으로 고하길, ‘한나라 병사들이 열길로 쳐들어옵니다. 제가 가서 막아야겠습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위만은 돌아가 준왕을 공격했으며, 패배한 준왕은 바다를 건너 한(韓·마한)의 땅에 들어갔다.”

BC 194년의 일이다. 가히 쿠데타였다. 위만은 준왕을 속여 서쪽 변방(아마도 랴오둥 지역이었을 것)에서 세력을 키운 뒤 군대를 이끌고 준왕의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이다. 이로써 BC 1046년 무렵 고조선과 은(상)의 문화를 계승한 기자조선은 900년 만에 정권을 위만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하지만 위만이 사서에 나온 대로 중국인이었을까. 꼭 그렇게 볼 수는 없다는 게 이 교수의 해석이다.

사서를 종합하면 위만은 다른 1만명과 함께 상투를 틀고(추결·추結), 호복(胡服·오랑캐의 옷)을 입은 뒤 조선의 준왕에게 망명했다. 당시는 진나라 말기 혼란 상황. 옛 제·연·조나라 백성들이 대거 조선으로 몰려들었고, 위만도 한나라 초기 혼란기에 수 천의 무리를 이끌고 조선 땅에 둥지를 틀었다.

”중국이 어지러울 때 많은 무리들이 옌산을 넘고, 랴오허를 넘어 몰려들었어요. 험준한 옌산과, 폭이 140㎞나 되는 지긋지긋한 요택을 둔 랴오허 유역을 건넌다는 것은 쫓는 무리들의 핍박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였을 테니까.“(이교수)

동이계인 중산이 마지막으로 망한 때는 BC 296년. 역시 동이족인 고조선이 진개의 침략으로 랴오시(요서·療西)를 잃었던 것이 BC 280년 무렵. 이후 조·연·진의 영역에서 삶을 부지했던 동이계 사람들 역시 변란이 생겼을 때 같은 종족을 찾았을 것이다.

“연나라 사람이라는 위만과 그 수 천 무리도 ‘믿는 구석’, 즉 동이의 나라, 고조선으로, 고조선으로 향하지 않았을까.”

마치 은(상)의 멸망 이후 본향을 향해 총총히 떠났던 기자(箕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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