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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날들(The Best of Times)

이정안 |2008.06.15 08:59
조회 70 |추천 0

 



 

2008 서울 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러시아 감독인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Svetlana Proskurina)의 '최고의 날들'이 선정되었다. 영화 상영 뒤에 감독과의 대화도 있었지만 통역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영화에 대한 깊은 대화를 나누기 어려웠다. 국제영화제에 참가하면서 'Small gods' 관람 중 자막이 순서가 뒤바뀌어서 나가는 걸 알았을 때보다 더 분통터지는 상황이었달까. 아무튼 처음으로 접한 프로슈리나 감독의 영화는 상징적 이미지가 많아서 '읽기' 좋은 영화였다.

 

신체 파괴적인 이미지

 발야는 얼굴에 상처를 낸 채로 집으로 돌아와 그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여자친구 발야를 맞이한다. 섹스 후 그들의 입술은 피투성이, 상처투성이가 되어있다. 서로가 서로의 입술을 물어뜯으면서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핥는 가학적인 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발야는 "처음에는 좀 아팠지만 시간이 지나니깐 미칠 듯이 좋았다"고 말한다. 타인과 타인이 얽혀 이루어지는 마찰이 생채기를 안기면서도 고통과 동반하는 쾌락 때문에 쉽게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발야(남)를 두고 평생을 발야(여)와 싸워 온 캬차가 발야(여)의 생일을 축하하며 팬케이크를 만들어온다. 발야(여)는 이를 가위로 잘라버리면서 카챠에게 자기 방에서 나가기를 종용한다. 마치 손상된 신체처럼 너덜너덜 잘려나간 팬케이크는, 발야와 캬차의 애증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발야와 캬차 모두 발야를 사랑했지만 둘 다 발야를 온전히 소유하지 못했다. 캬차는 제도적으로는 발야를 소유했지만 그의 의식을 소유하지는 못했고,발야는 그 반대였다. 서로의 존재 때문에 발야와의 사랑을 온전히 완성시키지 못한다는 점에서 발야와 캬차는 서로가 '파괴하고 싶은 대상'이었다. 그런 동시에, 어느 한 여자에게도 온전히 귀속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린 발야를 매개할 수 있는 대상이기도 했다. 발야와 캬차는 서로를 통해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의 흔적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서로를 밀어내고, 붙드는 과정을 반복하며 두 여자가 긴 세월을 함께하는 동안 사랑의 감정이 쌓이게 된다. 여기서의 사랑의 감정이란 로맨틱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 파괴적이고 가학적인 성질의 것을 의미한다. '살아있어줘서 고맙다는 마음(팬케이크)'과 '그 마음을 갈갈이 찢어버리고 싶다는 마음' 이 두 여자에게 모두 공존하는 하는 것이다.

 

'물'의 이미지 

 영화에서 주요한 장면마다 등장하는 것이 '물'이다.

 캬차는 교도소에서 나온 발야를 맞이하면서 스스로 바다를 향해 걸어들어간다. 발야를 사랑하는 캬차와, 카챠에게 무심한 발야의 대화는 처음에는 일방적인 관심과 무관심의 양상으로 전개된다. 교도소에서 보낸 편지들을 받았냐고 묻는 카챠에게, 발야는 다 읽지는 않았다는 대답을 하고 카챠는 답장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발야가 알아주기만을 바랬다고 말한다.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카챠는 점점 더 깊숙히 바다속으로 걸어들어가는데, 발야가 "저러다 빠져죽겠다"는 말을 하며 처음으로 카챠의 행동에 반응을 한다. 금방이라도 파도가 집어삼킬 것 같은 위험천만한 장소에 서서, 카챠는 발야를 바라본다. 카챠는 발야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자신의 몸을 범하기를 원한다. 물에 젖어 속살이 환히 보이는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고 바닷가에 선 캬차의 모습은 죽음의 이미지와 인접한 치명적인 사랑 그 자체다. 발야도 이러한 치명적인 사랑 앞에 거부하지 못하고 결국 실수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자신의 몸속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결국 발야를 죽음으로까지 이끈 세 남녀의 혼란스러운 관계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 된다.   

 발야(여)가 발야(남)의 이러한 고백을 듣는 장소도 수영장이다. 발야가 카챠와 성관계를 가졌다는 말을 듣자마자 발야는 다이빙대에서 뛰어내려 물 속에 잠긴다.

 물이 갖는 '죽음의 이미지'와 연관지어 생각해본다면, 앞서 언급한 사랑의 파괴적인 속성이 극대화되면 결국 죽음과 맞닿게된다는 것을 감독이 표현하고 싶었던 바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물이 '죽음의 이미지'와 더불어 '생명의 이미지'를 함께 갖는 것처럼, 영화는 사랑의 파괴적인 속성 뿐만 아니라 치유적인 속성을 함께 보여준다. 두 여성이 손을 꼭 마주잡고 사랑한다는 말을 나누며 길을 함께 걸어가는 마지막 장면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카챠는 '뭍에서 헐떡거리던 물고기가 다시 살 수 있도록' 바다에 물고기를 놓아주고, 발야는 '건강한 신체를 가진 사람들이 즐거워하며 바닷가에서 다이빙을 하는' 장면을 반복해서 바라본다. 비록 죽음까지도 불사한 사랑이, 진짜 죽음을 이끌어내고 이로 인해 각자 죽을만큼 고통스러운 상처를 가지게 되었더라도, 이러한 상처들도 치유할 수 있는 힘 또한 사랑에서 나옴을 영화 속 '물'의 이미지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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