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와 교리주의에 대하여
1. 선악과는 연합을 필요로 하는 교회에서만 발견됨- 선악과는 연합한 생명체인 교회에서는 무용지물이다.
그 교회가 없으면 그 뜻을 알기가 어렵다. 표면적인 것은 알지만 그 사정이 없으니까... 선악과 문제도 사람들이 머리가 나빠서 모르는 것도 아니다. 신학자들이, 율법학자들이 공부를 어지간히 한 사람들인가. 우리 한국 사람들이 공부한다는 것하고는 상상이 안 된다. 서양에서 학자라는 사람들은 그 공부하는 양이 헤아릴 수 없다. 우리하고는 비교할 수 없다. 한국에서는 그렇게 공부할 수 없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지식이 모자라서 모르겠는가? 그 문제가 아니다. 아니고 교회가 없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선악과라는 것도 세상에 살면 전혀 문제가 없고 문제가 발견되지 않는다. 세상은 당연히 선악을 가지고 사는 것인데 문제가 되겠는가? 그게 없으면 어떻게 세상이 유지가 되겠는가? 그게 있어야 유지된다. 그리고 세상에 나가서 일을 하려면 선악과의 원리를 가져야 일을 하는 것인데 그것 없이는 바보 멍청이가 될 것인데 일을 하겠는가. 안 된다. 그러니 이것이 어디서도 발견이 안 된다. 쉽게 말하면 문제가 안 된다는 말이다. 문제가 되었으면 진짓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안 되니까, 문제의식이 생기지 않으니까 어떻게 알겠는가.
그런데 교회 안에 오면 문제가 생긴다. ‘둘이 합해서 한 몸을 이룰 지로다.’ 하는 거기서 안 되는 것이다.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지 다른 데서는 문제가 안 된다. 그러니까 교회 때문에 발견된 것이다. 교회가 아니면 발견될 수가 없다. 선악을 아는 지식만큼 세상에서 고상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만큼 위대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종교나 도덕이나 철학이나 그 모든 것이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되어 있는 것인데 그게 없으면 세상이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딱 한 군데 안 되는 곳이 있는데 교회를 하려면 안 된다.
사실은 가정에서 있었다. 부부간에 있었는데 안 된다. 부부간에 싸우는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 때문에 싸우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부간에 안 되는 것인데 그것은 당연히 안 되는 것으로 알기 때문이다. ‘네가 성격이 나빠서 그렇지, 이해심이 없어서 그렇지.’ 이렇게 생각했지 그게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 때문에 그렇다고 알지 못한다. 당연히 가정은 그런 것이니까.
교회도 연합을 목표로 하는 교회가 아니면 전혀 문제가 안 된다. 내가 기도를 열심히 하는데 무슨 문제가 되는가. 전도 열심히 하고, 봉사 열심히 하는데 선악과가 문제가 될 일이 없다. 어디에도 문제가 안 된다. 단지 ‘둘이 합하여 한 몸을 이룰 지로다.’ 거기서만 안 된다. 교회에서만 안 된다. 그것이 교회의 비밀이다. 감추어져 있고 사탄이 그것을 준 것은 교회가 안 되게 하려고 준 것이다. 소위 복음이라는 것을 아무리 전해도 사탄은 괜찮은 것이다. 교회만 안 되면 되니까.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죄 사함을 받고 천당에 가고 하는 이것은 사탄하고 전혀 관계가 없다. 세상에 살 동안 어차피 세상을 위해 사니까, 세상 조직을 위해 사니까 구원받은 사람이나 안 받은 사람이나,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이나 안 받은 사람이나 모든 사람이 세상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이다. 사탄이 만들어 놓은 세상을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아도 상관없고 안 받아도 상관이 없다. 죄 사함을 받아도 상관이 없다, 자기 나라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2. 성경 안에서 발견된 선악과
성경이 놀라운 책이다. 계시가 아니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를 먹지 말라.’ 했다는 것이 사람의 생각으로는 나올 수가 없다. 교회도 없는데 말이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가 있으니까 ‘아 이래서 그랬구나.’ 하고 안다. 교회도 없는 때에 어떻게 그것을 알았을까? 하나님이 계시를 주셨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물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과정에서 인도하는 과정에서 보여 졌다고 할 수는 있다. 그것도 하나의 사회니까. 그것도 일종의 교회니까, 광야의 교회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까지 분명하진 못했을 것이다. 우리처럼 분명하지는 못했을 것인데도 그게 쓰여 졌다는 것은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딱 한군데다 ‘둘이 연합하여 한 육체가 될 지니라.’ 창세기 2장 마지막에 그것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사실은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이 안 된다는 뜻이다. 사람과 사람이 연합이 안 된다는 뜻은 결국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이 안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 안에서 하나님을 보면 영원히 우리 안에서는 연합이 불가능하다. 그는 완전히 절대적으로 선한 분이시다. 그 절대적인 선에 비추어서 우리는 절대적으로 악하다. 어떻게 연합이 가능하겠는가? 늘 죄인으로서, 누가 말하는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지 결코 아들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차이가 너무 커기 때문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이 아니라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렇게 거리가 멀 필요가 없다. 지식 때문에 거리가 먼 것이다. 절대 선과 절대 악이 어디에서 만나겠는가? 아무리 기도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공경하면 공경할수록 더 거리가 멀어진다. 더 지엄하니까. 더 지엄하고 더 지존하고 더 지선하다... 그래서 나를 보면 볼수록 더 죄인이고 볼수록 더 약하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들이 아버지를 볼 때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으로 보면 아버지가 항상 두려운 것이다. 자기를 낳은 사람이라고 보면 너무 가깝지만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보면 너무 너무 무섭고 먼 것이다. 하나님하고야 오죽 하겠는가. 사람끼리도 그러한데 ... 사탄의 목표는 1차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갈라 버리는 데 있다. 사람과 사람을 갈라 버리는 데 있다. 그러면 다 독립이 되어 버린다. 따로 따로 독립되어 각자니까 예배당에 다니는 것이지 교회에 다니는 게 아니다. 예배당이다. 예배당. 예배 하는 곳이다.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하는 곳이다.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사회다. 우리말로 교회라고 번역한 것은 참으로 잘 된 것이다. 모일 회(會)자를 썼다.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교회로 번역했다.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소집했다’는 말이다. 소집했다는 말에는 교회라는 의미가 적다. 소집했다는 의미가 옛날에 시골에 가면 한 사람이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나오라고 한다. 한 바퀴 돌고나면 사람들이 모인다. 안 그러면 징을 막 치면서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다. 그것이 ‘에클레시아’다. 시민이 모이는 것이 ‘에클레시아’다. 이것만 가지고서는 교회라는 개념이 불충분하다. 그래서 ‘몸이다.’ ‘집이다.’ 이런 개념이 나오게 되었다. ‘하나님의 집이다.’ ‘하나님의 몸이다.’ 이런 개념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것이 사실은 사회다. 올바른 사회 관계는 연합인데 연합의 관계에 들어오면 문제가 생기는 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이다. 관계가 문제다. 다른 것은 문제가 안 된다. 관계를 추구하는 사회가 아니면 문제가 안 된다.
그러니까 이게 숨겨져 있다. 교회가 나타나지 않으면 영원히 숨겨져 있다. 사탄의 비밀이다. 어디를 가도 선악과만 있으면 다 갈라진다. 나서부터 그것을 암시받고 자라기 때문에 사람이면 누구나 그게 없는 사람이 없다. 누구나 다 판단할 수 있고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세상은 아예 그런 곳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 놓았다. 아예 일로만 만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동양 사회는 관계 사회다. 관계사회에서 이것이 발견되지 않으면 서양에서는 발견이 안 된다. 문제가 없으니까. 서양에서는 관계를 깊이 가질 필요도 없고 가져서도 안 된다. 절에 다니는 사람들도 그렇다. 자기 혼자 가서 불공드리고 오면 되니까. 교회도 기도 열심히 하는 교회가 잘 된다. 기도만 계속 시키면 교회는 잘 된다. 새벽기도만 2만 명씩 모이고 철야기도 금식기도 만 시키면 자기하고 하나님하고 일대 일 관계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옆에 사람 볼 필요가 없다.
선악과 문제를 다 ‘불순종이다. 먹지 말라는 것을 먹었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만 해석을 하니까... 단지 불순종만 문제라면 순종하면 끝나는 것이다. 문제가 되겠는가. 불순종이 원인이 되기는 하지만 이미 실재가 들어왔기 때문에 불순종만 없앤다고 될 일이 아니다. 로마서 7장에 그것을 이야기한다. 바울은 분명히 돌아선 사람이다. 순종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노력하는 데 아닌 것이 있더라는 것이다. 안 되는 것이 있더라는 것이다. 한쪽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그것을 섬기려고 하는 데 다른 한 쪽에서는 그렇지 않는 법이 있어서 나를 끌고 가더라는 것이다. 이게 선악과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불순종했던 것은 해결이 되었지만 이미 들어와 버린 선악과는 해결이 안 되었던 것이다.
3. 보수주의가 가는 길
교리주의나 보수주의라고 하는 그 속에도 알고 보면 선악과가 들어 있다. 생명의 흐름이 막혀버렸고 교리로 가려버리니까. 교리주의, 보수주의, 전통주의, 성경주의... 이런 것들이 모두 생명의 흐름을 가로 막고 있다. 길을 안내하려고 생긴 것인데 길 안내는 못하고 오히려 생명의 흐름과 자람을 방해해버린다. 성경도 사람을 위해 준 것이고 교리도 사람을 위해 준 것이고 다 사람을 위해 준 것이다. 사람이 먼저지 성경이 먼저가 아니고 사람이 먼저지 교리가 먼저가 아닌 데 사람이 부패하다 보니까 사람보다 성경이 더 중요하고 사람보다 교리가 더 중요하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개신교의 제일 문제는 그것이다. 성경에 대해서 조금만 손을 댔다고 하면 사람 죽이려고 대 든다. 그런 상황에서는 자유로운 연구가 불가능하고 추고가 불가능하다. 말 한 마디 잘못해 버리면 당장 이단이라고 해서 옛날 같았으면 당장 죽였을 것이다. 지금은 죽이지는 못하지만 거기서 어떻게 다른 것이 나오겠는가. 자유로운 토론과 추고가 있어야 천당도 밝혀질 것이고 있는 문제점도 밝혀지고 하는 것이다. 그것도 학문적인 입장에서 만 그렇게 해 놓은 것이니까. 맨 날 연구하고 토론하고 해도 생명은 없고 지식만 있어 가지고 지금 자유주의 쪽에서는 그렇다. 지식은 많이 있는 데 교회는 안 되는 것이다. 지식을 많이 갖다 놓으면 별로 믿어야 될 이유도 없어진다. 창세기 1장 하나 가지고 일 년 내내 강의를 한다. 1년 내내 해도 문서비평, 역사비평, 언어비평 이런 것 하다가 마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보면 한 구절도 같은 것이 없다. 여러 사람이 한 것이다. 하다 보면 한 마디는 a 문서고 두 마디는 p문서다. 이런 식이니까 하나님이 직접 주셨다고 생각하고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늘어놓아 버리면 아무 것도 없다. ‘이걸 왜 믿었노?’ ‘이걸 어떻게 하나님이 직접 썼다고 믿었는가?’ 그렇게 배워서 나와 가지고 목회를 하려니까 목회가 되겠는가. 당연히 안 된다. 믿음을 줄 수 있겠는가? 자기도 안 된다. 그래서 그 쪽에서는 신비주의 쪽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성풍운동도 일어난다. 성령의 바람 운동.. 이 사람들은 맨 날 기도한다고 야단이다. 극단적인 자유주의에서 극단적인 신비주의가 나오는 것이다. 해답이 없으니까 그렇다고 교리적으로 보수적으로 믿을 수는 없다 한다. 지식으로 분석하고 했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신비주의적인 힘 밖에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장 목사님도 자기 아들을 그리스도 신학대학에 보냈다. 그런데 교수가 불러서 상담을 하러 갔더니 ‘너는 너무나 지독한 보수주의라 도저히 안 되겠다’ 고 했다. 조금만 그런 이야기 나오면 교수님에게 대 든다고 한다. 심지어는 때린다고 한다. 수업시간이 싸움이 되기도 한다. ‘도저히 안 되겠으니 사상을 바꾸려면 다른 곳으로 보내라.’ 그래서 한국 신학교에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거기 가서 성풍 운동을 가 버렸다. 그래서 맨 날 기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친구가 없으니까 그리로 가게 된다.
극단적인 합리주의는 극단적인 신비주의다. 구라파에도 마찬가지다. 서구 사상은 합리주의다. 그런데 합리주의로서는 도저히 해석이 안 되기 때문에 신앙과 이성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라고 갈라 버렸다. 극단적인 합리주의 사회에서 극단적인 맹목이 나왔다. 교리 주의는 맹목적이다. 그러니까 미국사람들을 만나면 맹목적으로 교리를 그대로 믿어 버린다. ‘그것을 믿고 실천하고 하지 더 이상 생각하면 안 된다. 이성으로 생각할 일이 아니다. 무조건 믿고 실행해야 될 일이지. 이것이 인간의 이성으로 생각하고 연구해서 될 수 없다.’ 이렇게 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것도 한계에 부딪치니까 결국 신비주의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전 세계의 기독교가 전부 신비주의에 휩싸여 있다. 해답이 없으니까... 우리나라에도 장로교를 비롯한 별것이 다 있지만 전부다 내용은 순복음 교회가 다 통일한 것이다. 간판만 다르다. 장로교 식으로 하면 교회가 안 된다. 바짝 마른 것으로 해 봤자 사람이 안 온다. 오늘날 기독교인의 숫자가 많아진 것도 다 순복음 교회의 영향이다. CCC 영향하고 순복음 교회 영향이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내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그런다. 한 시대는 합리주의로 가고 한 시대는 신비주의로 갔다가 한 시대는 교리주의로 갔다가 이런 식이다. 자유주의적인 신학 쪽에서는 한참 사회 복음 주의 운동을 하다가 그것은 이슈가 없어졌다. 박 정희, 전 두환 때는 정의 사회 구현에다 초점을 맞춰서 민중 신학이니, 해방신학이니 하다가 지금은 없어졌으니까 할 일이 없어졌다. 그러니까 올 데 갈 데가 없어졌다. 메시지가 없어졌다. 그래서 성풍운동으로 돌아갔다. 할 말이 없으니까. 미국에서 정치신학이 바람이 불어서 우리나라에 까지 왔다.
장로교 측인가? 보수측인가?
OOO 저희 집안에는 사당동 합동 측이고 고신 측이다.
보수라는 말은 교리주의라는 말이다. 근본주의다. 보수는 신학의 발전이 있을 수 없다. 바로 받아 들였으니까. 거기서 떠나는 것은 이단이니까. 조금만 벗어나면 이단이 되어 버린다. 사실 학문적으로 해 봐야 저쪽 좌익이 되어 버리니까. 이론을 주장하고 근본주의를 주장할 때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자유주의자를 만나면 아무런 힘이 없다. 신학교 토론에 가보면 보수주의자들은 막 열을 내 가지고 야단이다. 그런데 자유주의자들은 열을 내는 것이 없다. 웃고만 있다. ‘가소롭다.’ 는 뜻일 것이다.
4. 하나님의 목표는 한 인격
하나님 목표는 한 인격이다. 그 인격에서 벗어나 버리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한다. 인간 문제, 사회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노력을 한다. 한 인격이 없어서 문제가 생긴 것인데 그것은 놓아두고 방법을 찾으니까 신학도 방법을 찾고 있고 교회도 방법을 찾고 있고 세상도 방법을 찾고 있다. 재료가, 재료 공학적으로 말하면 재료공학에서는 발전시키지 않고 건축공학만 발전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다. 재료는 인간이다. 재료가 변해야 건축이 변할 수 있는데 재료는 그만 두고 건축기술만 계속해서 연구를 했다. 나무라는 재료에서 아무리 건축기술이 발전해도 결국은 목조 건축밖에 안 된다. 목조건축이라 불이 나면 다 탄다. 그리고 나무라는 재료에서는 고층이 불가능하다. 나무라는 재료에서 철근 콘크리트라고 하는 재료로 바뀌어져야 혁명이 일어난다, 건축의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재료가 안 바뀌는 한 아무리 건축 기술이 좋아도 바뀌지 않는다. 바뀌어도 한계가 있다. 결국 재료는 인간이다. 그 인간은 인격이다. 그 인격이 어떤 인격이냐에 따라서 마치 나무냐, 철근 콘크리트냐 하듯이 바뀌어진다. 그렇지 않고서는 달라질 방법이 없다.
바울이 말한 대로 금이나 은이나 동으로 지을 것인가? 나무나 종이나 짚으로 지을 것인가? 재료 문제다. 현대 사회도 재료공학이 발달한 나라가 선진국이다. 재료기술이 발달한 나라가 선진국이다. 조립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중국 같은 곳에서는 금방 따라와 버린다. 천 만들어서 옷 만드는 것은 배우면 금방 만들어 버린다. 천을 만들어 내는 기술이 문제다. 우리도 일본에 비해서 뒤떨어진 것이 그것이다. 방제 기술이다. 제봉기술이 뒤떨어진 것이 아니다. 사람을 바꾸게 하려고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하나님 말씀이 주어진 것이고 성경이 주어진 것이다. 성경을 읽을 때 거기다 초점을 두고 읽어야 한다. 다른 데 초점을 두면 한 없이 빗나가 버린다. 빗나가 버리고 엉뚱한 데 가게 된다. 그 안에는 무수한 게 많다. 길로 말하면 수천만 갈래의 길이다. 어디로 가는 지 모르는 길이 수없이 많다. 그것을 붙잡고 근본주의 그것을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어디로 갈 지 모르면서 이것만 붙잡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보면서도 “왜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그것은 교리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 이것은 교리다. 하여간 하나님의 말씀이고, 능력이고 교리고 이런 것들은 절대로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바꿀 수 없는 것인데 예수님은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을 둔 것이지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의식의 혁명이다. 모든 초점은 그렇게 두어야 한다.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간단하다. 그런데 ‘안식일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절대 불변한다. 안식일은 진리다.’ 이렇게 해 놓고 나면 꼼짝 달싹 못한다. 사람이 죽어도 안 된다. 할 수 없다. ‘오늘은 안식일이니까 안 되고 다행히도 내일 까지 살면 내일 와서 고쳐주고 오늘 죽으면 그만이다.’ 이렇게 돼 버린다. 그래서 “양 한 마리가 웅덩이에 빠졌는데 안식일이라 해서 그냥 가겠는가?” 하셨다.
그래서 성경주의, 개신교는 특별히 더 그렇다. 카톨릭은 그럴 필요가 없지만 개신교 신학을 한 사람들은 성경으로부터 해방 되어야한다. 성경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야 된다. 성경이 무엇 때문에 주어졌는지 본질을 알아야 해방이다. ‘실재를 알지니 실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성경의 실재를 알아야 내가 성경에서 자유하게 된다. 그래야 내가 성경을 쓸 수가 있는 것이다. 성경은 쓰라고 있는 책이다. 내가 성경을 믿으라고 주어진 책이 아니고 성경을 쓰라고 주어진 책이다. 그런데 내가 성경에 매여 버리면 성경을 못 쓴다. 약장에 수많은 약들이 있는데 약을 처방하는 것은 의사다. 그 약들을 갖다 써야 처방이 되는 것이다. 그 약들을 보존하고 있는 것은 의사가 아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아! 저 사람은 성경을 무시하는 사람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성경을 무시한 것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고자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말한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치 않는구나.”결국 예수 한 사람을 위해서 쓴 것인데 그 사람에게는 안 온다는 것이다. 여기 안내서가 있는데 아무리 안내서를 많이 가지면 뭘 하는가? 안내서는 제주도에 가서 쓸 것이다. 제주도에 대한 안내서를 다 눈에 꿰어도 제주도를 안 가면 그만이다. 아무런 소용이 없다. 제주도 가서 관광을 하기 위해서 안내서가 필요한 것이지 안내서를 위해서 제주도 관광을 가는 것은 아니다.
너무너무 간단한 것인데 의식 개혁이 안 되니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카톨릭의 사상을 참고로 해야 한다. 카톨릭은 성경우선이 아니고 교회 우선이다. 교리적이고 제도적이다. 왜 그런가 하면 성경은 교회에서 나온 책이다. 그리고 교회가 채택한 책이다. 교회가 정경으로 채택한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권위가 앞선 것이지 성경의 권위가 앞선 것이 아니다. 그런데 개신교는 그와 반대다. 카톨릭의 부패에서 반동으로 나온 것이니까, 교회라는 것에, 공회라는 것에 불신하고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을 성경대로 봐야 한다고 인식한 것이다. 여기서 성경 절대주의가 나왔다. 처음에 생각할 때는 그렇게 하면 부패도 안 되고 분열도 안 될 줄 알았다. 교황이 부패한 것은 인간이니까 부패한 것이다. 인간은 부패할 수도 있으나 성경은 부패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성경은 부패하지 않는다. 그런데 성경을 누가 보는가? 도로 사람이 본다. 성경은 부패하지 않지만 성경을 누가 보는가? 도로 사람이 보는 것이다. 교황이 부패해서 카톨릭이 부패했다. 교황무오설이 틀리고 말았다. 사람이니까 부패한다. 성경은 절대로 부패하지 않는다. 물론 부패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성경이 나에게 직접 오는 것이 아니고 성경을 누가 보고 해석하는 것이다. 도로 사람이다. 교황이 칼빈으로 대체된 것 외에는 다른 것이 없는 것이다. ‘교황이 보는 성경이냐, 칼빈이 보는 성경이냐’ 는 이 차이다. 성경이야 똑 같다. 종이에다 먹으로 찍어 놓은 것이 바뀌어 지겠는가.
도로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다. 개신교는 사람을 빼 버리고 오직 성경, 솔라피데(sola fide 오직 믿음 )에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성경으로만) 해 가지고 두 가지 기치를 들고 나왔다.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뒤에 칼빈이 숨어 있고 루터가 숨어 있다. 다 사람이 숨어 있는 것이다. 성경을 그렇게 내 세워 놓고,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고 해 놓고 자기는 숨어 있는 것이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알고 보면 자기의 해석이다. 하늘에서 해석을 준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해석한 것이다. 그렇게 해 놓고 자기는 감추어 버리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교황보다 더 무섭다. 교황은 드러나 있으니까 잘못하면 잘못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숨어버리니까 누구보고 잘못한다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알고 보면 엄청난 사기다. 목사도 설교를 하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셔서 한다.’고 한다. 사실은 자기가 하면서... 자기가 한다고 해야 잘못한다, 잘 한다 할것이다. 자기가 안 하고 하나님이 하신다고 하면 내가 잘못해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나는 빠져 버리니까.... 사실 알고 보면 다 자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설교도 자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말을 성경을 통해서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당연히 그렇게 알아야지 ‘아! 자기 말을 성경을 통해서 하는구나.’ 이렇게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데 입만 빌려준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축자 영감설이니, 감동설이니 하지만... 그것 가지고 얼마나 싸우는 지... 손가락으로 직접 썼다는 사람도 있고 별 사람이 다 있다. 문자대로 하면 손가락으로 쓰신 것이다.
실재를 알아야 자유케 되고 실재를 알아야 쓸 수가 있다. 요즘 건강식품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같은 데 가령 예를 들어서 영지버섯이다. 영지버섯은 이렇고 이렇고 이렇다. 이렇게 설명한다. 영지버섯의 근본 성질은 말을 하지 않고 가령 당뇨에 좋고 살찐데 좋고 뭐한데 좋고, 좋고...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좋은 것만 생각하고 그것을 먹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먹고 효과를 보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을 먹고 손해를 보는 사람도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영지의 성질을 모르니까. 성질을 먼저 알면 ‘이런 경우에 당뇨에 쓰는구나.’ 같은 당뇨라도 ‘이런 경우의 당뇨에 맞는구나.’ 하고 알 텐데 원래 성질 자체를 모르니까 당뇨에 좋다는 말만 듣고 당뇨병 환자에 다 쓴다. 그게 교리다. 영지 교리다. (웃음)) 건강식품이라는 게 다 그렇다. 알로에 좋다 하면 알로에는 여기 좋고 저기 좋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알로에 성질을 모르는 것이다. 알로에가 뭔지를 모르는 것이다. 알로에는 아주 찬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열이 있는 사람에게는 좋지만 찬 사람에게는 오히려 극약이다. 그것은 모르고 알로에는 여기 좋고 저기 좋고 하는 것만 외워 가지고 있다. 거기다 무조건 쓰는 것이다.
안식일에 왜 일하지 말라고 했는가는 모르고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것만 알았다. 그래서 그것만 적용하는 것이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것만 적용하는 것, 그것이 교리다. 그래 가지고 ‘어떻게 안식일에 일하지 않을 것이냐?’ 해서 그 방법을 더 세밀하게 연구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그것을 지키려다 보니까 안식일을 지키려면 밥을 안 해야 되는 데 밥하는 것도 일인데 그러면 ‘안식일에는 밥을 안 먹어야 되는가?’ 이런 문제가 생겼다. 거기서 안식일을 왜 줬는가를 생각해야 되는 데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것을 어기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는가를 연구했다. 그래서 연구해 놓은 것이 한 끼 밥은 해 놓아도 괜찮다든가, 오리는 가도 괜찮다든가 하는 세부 조항을 만들어서 지키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다.
왜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고 했을까? 그것은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다 똑 같다. 어떻게 하면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는 말에 맞게 지킬 수 있을까만 생각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데 200가지~ 300가지나 되는 세부조항이 있다고 한다. 시행세칙이 있는 것이다. 전혀 걸어 다니지 않을 수 없다. 걸어 다니는 것도 일이니까. 그런데 안식일이니까 안 되겠어서 랍비들이 모여서 회의 한 것이 어느 반경까지는 걸어가도 좋다고 했다.... 우리 한국도 이전에 보수적인 교파에서는 주일날에는 차타면 안 된다고 했다. 뭐하면 안 된다는 게 있었다. 그런데 선교사가 외국에서 오는 데 시차가 틀리니까 그날 도착했는데 그 영접을 나갔다가 잘린 사람도 있었다. 안식일을 범하고... 목사들이 영접 나갔다는 것이다. 교리주의를 하다보면 웃지 못 할 일들이 많이 생긴다. 그 비유도 우스운 일이지만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불쌍한 양 한 마리가 웅덩이에 빠져 있는데 보니까 안식일이다. 안식일이니까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살려줄 수가 없는 것이다. 마음은 안타까운데 할 수 없으니까 “야! 오늘은 못하니까 내일까지 버텨라. 그러면 내일 아침에 안식일이 해제되면 오겠다.” 얼마나 우스운 짓인가! 성경을 문자대로 믿는 것이 참 옳은 것 같은 데도 너무너무 옹색하고 답답한 것이다. 뜻을 모르니까....
실재를 알면 내가 활용이 된다. 기능공하고 기술자하고 차이가 그것이다. 기능공은 교리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기능공이다. 이것 깎으라 하면 하루 종일 그것만 깎는 것이 기능공이다. 기술자는 연구하는 것이다. 그 원리를 연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술이 발달했다는 말은 기능이 발달했다는 말이 아니다. 기술입국이라는 말이 기능이라는 말이 아니다. 일본도 기술수준이 미국에 비해 뒤 떨어졌지 기능이 뒤 떨어진 것은 아니다. 일본 사람들이 기술에 투자하기 시작한 것이 80년대인가 그렇게 밖에 안 된다. 그전까지는 다 미국에 빼앗긴 것이다. 기술에 투자하려면 돈이 막대하니까. 연구소를 설립해야 되고 연구소에서 연구를 해서 내 놓아야 된다. 막대한 예산을 투자해야 된다. 그래서 경제가 어느 정도 성장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기술개발을 할 때 비로소 기초과학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그 전에는 기초과학이 필요 없다. 깎아 놓으면 되니까. 우리나라에 수학이니 물리학, 생물학 이런 것이 무시되는 것이 아직도 기술단계에 못 간다는 뜻이다. 기술 개발하려면 그것들이 필요하다.
5. 현 기독교의 문제
성경이 얼마나 알기 어려운 책인가 하면 수천 년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을 지어 놓고 양을 잡아서 번제를 드리면서도 성경의 어느 구석에도 왜 이것을 드려야 되는 지를 설명해 놓은 곳이 없다. 잘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니까 맹목적으로 드리고 있는 것이다. 이유를 모르니까. 그러다가 어느 날 ‘번제와 제물은 원치 않고 제사와 예물은 원치 아니하시고 ’ 이런 말이 나온다. 그러니까 띵 받치는 것이다. 그 선지자는 보니까 너무 형식적이고 외식이다. 마음에 없다는 것을 봤다. 그래서 그 말이 나온 것이다.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마음이 없구나.’ 그것을 봤기 때문에 그 말이 나왔다. 그래 가지고 계시가 조금 귀퉁이가 열린 것이다. ‘제사와 예물은 원치 아니하시고 순종을 원하신다.’ 는 그런 말이 나오게 되었다. 그 사람들은 철저한 사람들이다. 한 번 주면 그것을 받아 가지고 몇 천 년 이고 그것을 해 내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지금 기독교가 또 그러고 있는 셈이다. 똑 같다. 왜 그런가를 생각하지 아니한다. 미국 사람들은 사물에 대해서는 합리적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신앙에 대해서는 전혀 그런 게 없다. 거기서 한국의 기독교가 들어 왔다. 그래서 그대로 믿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공장에서 찍어 내는 것이다. 같은 공장을 만들어서 같은 제품을 계속해서 찍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회의에서 만나도 다 똑 같은 것이다. 같은 기계에서 찍어져 나온 것이니까.
한국 같은 경우에는 어떤 방법으로 해야 교회가 커지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오만 방법을 다 동원한다. 합리적이고 현대적인 경영 방식을 도입한다. 교회도 그런 방식으로 움직이려니까 조직이나 계통이 필요하고 이렇게 운영하고 있다. 목회자들은 관리자로, 경영자로 되어서 설교하는 사람과 신방하는 사람을 분할해서, 분업해서 한다. 그러니까 관리자다. 설교도 준비해 주는 사람 따로 있고 설교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 전부다 미국식으로 한다. 자료 수집해주는 사람, 원고 준비해주는 사람, 나와서 하는 사람, 이런 식이다. 미국의 대통령이 연설 한 번 하려면 그런 식으로 한다.
미국에 가면 설교 목사가 있다. TV 목사가 있다. 이 사람들은 교회는 없는데 TV에서만 설교를 하는 것이다. 미국사람들은 그렇게 해 가지고 인기를 얻으면 교회를 세운다고 한다. 주일날 아침이 되면 시간대 별로 설교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교회가 아니고 세트를 만들어 놓고 거기서 설교를 한다. 슐러 같은 사람이야 교회가 있으니까 실황중계를 하고 실황중계는 안하고 그냥 설교만 하는 사람이 있다. 한국 사람도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이름을 알려 놓고 그 다음에 교회를 세운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하는 것보다 TV설교를 해서 알려지고 인정받아 가지고 교회를 설립하면 ‘아! 그 사람이구나!’ 하고 사람들이 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에서는 그렇게 자유롭지 못하니까 기독교 방송이라는 것을 어떤 사람이 잡고 있으니까 자기들 마음대로 못한다. 일반 방송에서 그렇게 하려면 돈이 엄청나게 비싸다. 우리가 KBS나 MBC 등에서 한 시간 동안하려면 돈이 엄청나게 비싸다. 그래서 감히 손을 못 댄다. 위성방송을 통해서 채널을 통해서 해야 되는 데 돈을 얼마를 줘야 하는지 모른다. 미국에서는 한 시간을 하는데 600불 달라 한다. 새벽부터 틀어 놓으면 계속해서 나오는 것이다. 다 유명한 사람들이 나온다. 전부 채널을 사 가지고 한다. 설교를 듣고서는 헌금을 보낸다. 목회자들은 편하다. 목회를 할 필요가 없으니까. 설교 목사들은 설교를 하고 그것을 듣고 미국사람들은 헌금을 잘 하니까 그 구좌로 헌금을 해 주고 자기들이 은혜 받은 것이 있으니까. 이럴 필요가 없다. 신방도 없고 양육도 없다. 앞으로 모든 국가가 그럴 것이다. 한국도 머지않아 그렇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