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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바카 병원(Jivaka Hospital) 이야기
지바카 병원 드레싱 룸 풍경
지바카 병원 드레싱 룸. 한 할머니가 왼쪽 다리를 들어 우리 스텝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삐적마른 다리를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 있어야 할 발가락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발 전체가 바람넣은 풍선처럼 퉁퉁 부은데다 여기저기 찌그러져 있어서 도저히 사람의 발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발바닥은 이미 죽어있는지 피부에서 살색은 없어지고 누렇게 떠있다.
지바카 병원의 인도인 자원봉사자인 까미스와르 씨가 여기에 메스를 댄다. 메스라고 하지만 손잡이는 없고 칼날만 있어 면도날을 직접 잡듯이 짧은 칼날을 잡아 할머니 발바닥의 누렇게 뜬 부분을 잘라낸다. 솔직히, 잘라낸다기보다는 썰어낸다는 표현이 더 맞을 듯 하다. 칼날이 발바닥을 가르는 순간부터 악취가 진동한다. 태어나서 그처럼 역겨운 냄새는 처음이다. 코가 썩어 들어가는 듯하다는 냄새가 바로 이런게 아닐까 싶다. 칼날이 발 속 깊숙이 더 들어가자 누런 고름이 분수처럼, 정말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발바닥의 3분의 1정도를 도려내는 까미스와르 아저씨, 전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오히려 기겁해 있는 나를 보며 재미있어 한다. 잘려나간 발바닥 살점들을 보자니 정육점에서 보았던 썰려 있는 고기들의 단면이 생각났다.
‘칼날을 대니 인간도 한낱 고기덩어리일뿐인가.’
그러나 놀라운 것은, 발바닥을 썰어내는 내내 이 할머니 환자가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취제를 쓰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나병’ 환자다.
일명 우리가 ‘문둥병’이라고 천하게 취급하는 병. 이 병에 걸리면 감각이 없어지면서 손, 발이 문드러지며 흉측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이 할머니 환자는 그래도 초기단계라 한쪽 발이 썩는 정도에서 치료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게 되는 나병이지만 둥게스와리에는 아직도 나병환자들이 수두룩하다. 나병은 천형(天刑)이라고 해서 부끄럽게 여기는 풍조가 있기는 하지만 둥게스와리 나병환자들은 뭇사람들의 불편한 시선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병에 대해서 교육받지 못했고 병을 치료할 약을 구하지 못하는 가난과 문맹으로 인해서 더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벗어날 수 없는 운명적인 병이 아님에도 그들은 수천 년 간을 그렇게 방치되어 왔다.
애석하게도 이런 상황에 대해 우리 한국사람들 마저도 특별한 방법이 없었다. 이번 할머니 환자처럼 그저 썩은 살을 도려내고 햇빛에 많이 노출시켜 살균을 많이 하라고 충고만 해줄 수 있을 뿐이다. 우리도 말만 병원일 뿐이지 의료전문가가 한 명도 없는 오지 진료소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병에 대한 지식도, 그에 대한 처방약도, 그걸 관리할 만한 전문인력도 없다. 있는 건 오직 의지뿐인 우리 아마추어 자원봉사자들뿐...
휴일날의 난감한 화상환자
일요일! 일주일에 이 날 하루만은 우리 자원봉사자들에게도 휴식이 주어진다. 그래서 일요일에 무언가 일거리가 생겨 쉬지 못하게 된다면 짜증부터 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난 일요일 밤에는 짜증을 낼 만한 여유도 없이 사건이 닥쳐왔다. 둥게스와리 지역은 무장강도단이 출몰하는 곳으로 보안문제상 해가 지고 나면 모든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고 밖으로의 외출을 일체 하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지난 일요일 저녁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밤에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문을 두드린 것이다.
‘응급환자다!’
어린아이 하나가 업혀왔는데 계속 울어대고 있었다. 누구나 단번에 문제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화상’이다. 오른 손 팔목과 손에서 살갗이 죄다 벗겨져 나가 있었던 것이다. 대체로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이 지역 사람들인데 벗겨져 있는 아이의 피부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허옇기만 했다.
부모에게 확인해보니 아기가 뜨거운 물에 손을 넣었었다고 한다. 사고가 나자마자 오밤중에 갈 데는 없고 우리 병원을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화상엔 어떻게 대처해야하나.
‘모른다!’ 이 곳 자원봉사자들 중 아무도 그런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으니까. 마을에 살며 우리 병원의 응급처치상황을 전부 담당해주던 까미스와르 아저씨도 오늘따라 시내로 나가서 집에 없다고 한다. 지금까지 까미스와르 씨가 없을 때 환자가 온 적은 없었는데...
난감하게 되었다. 일단 열을 식히게 천으로 덮어주고 몇 가지 약을 주었다. 그러나 화상에 대해 모르는데 화상약을 준비해 두었을 리 만무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병원에 가보라는 말 밖에 없다. 그러나 이 근처에 여기말고 다른 병원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전문가 없는 병원은 이렇게 쉽게 모순에 빠진다.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를 보내며
내 참 기가 막혀서...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못 먹어서 병이 나다니... 둥게스와리가 아무리 가난한 지역이라 해도 이제는 굶어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단지 아직도 하루세끼를 다 챙겨먹지 못하고, 꼬박꼬박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도 매일 같은 메뉴로 밖에 먹을 수 없어 만성적인 영양부족과 영양불균형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문제이긴 하다. 그렇다 해도 못 먹은 게 바로 병이 될 만큼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 온 환자는 거기에서 조금 예외인 것 같았다.
엄마 품에 안겨 접수를 기다리며 내내 울고 있는 아이. 갈수록 짜증나게 하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보다 못해 왜 이렇게 시끄러운가 하고 품에 안겨있는 아기를 들여다본다. 그런데 웬 걸,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한마디로 ‘쭈글쭈글’해진 ‘피골이 상접한’ 아기였다. 그 모습을 보니 언젠가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 실린 파키스탄 라호르 박물관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 고행상’이 생각났다. 극심한 고행으로 살가죽이 뼈에 딱 달라붙어 갈비뼈 마디마디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던 그 불상 말이다. 아기의 피부는 노인마냥 쭈글쭈글해져 있었고 코에서는 누런 콧물이 흘러나와 그 사이로 숨은 쉴 수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입에서는 질질 침을 흘리고, 눈은 희멀그레 풀려 있어 누가 보아도 환자라는 것을 대뜸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무슨 힘은 그리도 남아있는지 계속 울어대기는 쉬지 않고 한다. 말라비틀어진 팔목은 내 엄지손가락 두께만 할까? 눈으로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전혀 믿어지지가 않는다. 쩍 말라붙은 부처님 고행상은 차라리 건강해 보이는 편이다.
지바카 병원을 찾아오는 둥게스와리 환자들의 체중은 성인남자들이라도 50Kg를 넘는 경우가 많지 않다. 환자들의 손목이나 발목을 본다면 이게 인간의 것이라 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여위어 있다. 그런데 그런 것에 익숙해져 있던 나로서도 이 아이는 너무 심하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아이를 보니 당장 아기를 데려온 부모한테 아쉬운 소리부터 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밖으로 얘기하지는 못하고 그저 속으로만 이렇게 생각해 볼뿐이다.
‘아이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뻔뻔스럽게 우리한테 와서 약을 달라고 해! 그러고도 너희들이 부모자격이 있어!’
대놓고 불평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럴 때면 자연적으로 그들 부모들에 대한 내 태도도 냉랭해지기 일쑤이다.
그러나, 상황이 이러한대도 이 아기 환자에게 특별한 조치를 취해줄 수는 없었다. 마음의 갈등 속에 그냥 집으로 돌려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우선 우리 병원에서 쓰는 동종요법(남아시아에서 일반화 된 대체의학의 한 분야) 약들은 이런 환자들에 대해 별 효능이 없다고 한다. 이때까지도 양약을 도입하지 않은 우리로써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생각 같아선 내 개인 돈이라도 내주고 싶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동정심에 바탕한 개인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도와줘야 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고 또 우리가 모든 사람을 다 살릴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없는 약을 만들어 낼 수는 없으니 그냥 환자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찔리는지 자기합리화를 해본다.
‘이렇게 어려운 모든 사람들에게 일일을 큰 돈을 나누어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차라리 같은 돈이라면 같은 값으로 시럽 백 병을 사다가 다른 환자들에게 나눠주는게 낫겠다!(이 곳 사람들은 특이하게도 시럽형태로 만들어진 약을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비싼 영양제들이 시럽형으로 나와서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보내놓고 어디 내 속이라고 편했겠는가. 아이와 엄마를 빈손으로 집으로 돌려보내 놓고도 머리 속을 맴도는 그 모녀에 대한 생각이 나를 사로잡는다. 그렇게 떨쳐버리지 못하는 생각들에 잠겨 있다가 나의 생각들도 하나 둘 깨져 나감을 느낀다.
‘아이가 그렇게 된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그나마 자기들은 병원까지 데려갔지만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지 않았는가!’
‘그 한 명에게 큰 돈 들이느니 백 명 환자에게 시럽을 사 주는게 더 낫겠다고? 왜 반대로는 생각하지 못했지? 먹지 않아도 당장 죽지 않는 백 명분의 시럽을 뒤로하고 당장 그 돈으로 한 명의 목숨을 우선 구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병원의 수혜규정에 해당사항이 없는 경우, 이를 단순히 감정적으로 대처했을 때 생기는 뒷감당은 전체 구호사업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환자를 대하는데 있어 어느 정도 냉정함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다른 경우로, 나는 결핵퇴치사업을 하면서 전체 결핵관리프로그램의 유지를 위해 병원지시에 따르지 않는 환자를 프로그램에서 제외해야 할 때가 있었다. 이런 경우 그 환자에게는 항결핵제의 공급이 중단되어 이들의 경제수준에선 죽는 날을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다. 의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의료보건분야에 대한 경험이나 여타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아무추어인 내가 환자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해야하는 이런 경우들을 현장에 있는 기간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더 많이 접할 수밖에 없었다.
‘난 여기서 3년의 봉사기간을 마쳤을 때 몇 명의 사람들을 죽였을까?’
정말 그런 것을 손가락을 접어보며 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콜레라 소동
까나홀 마을의 리더 까필데오 아저씨가 어느 날 허겁지겁 JTS 사무실로 찾아왔다. 흥분된 상태에서 잘 되지도 않는 영어로 우리에게 말을 하려고 하니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차분하게 앉혀놓고 그의 자초지종을 들어본다.
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까나홀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오늘 여자아이 한 명이 죽고 10여명 가량의 마을사람들이 쓰러져 있다는 것이다. 아픈 사람들은 모두가 같은 우물물을 같이 마시고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아저씨는 이것이 수인성 전염병인 ‘콜레라’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둥게스와리 지역에서 콜레라가 일어날 가능성은 크다. 이전에도 두어 번 콜레라가 집단적으로 발병한 적이 있고, 아직도 부지기수인 보수되지 않은 우물들은 어느 것이든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콜레라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이때만 해도 우리가 아는 것은 없었다. 더구나 전염병은 정부가 직접 관리하는 영역이기도 했다. 괜히 우리가 나서서 직접 조치를 취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정부로부터 구호사업 자체가 제약을 받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우선 시내에 살고 있는 자원봉사의사 ‘비노드 버마’ 선생님에게 전화로 이 사실을 알렸다. 버마 선생님은 지바카 병원의 결핵퇴치를 도와주는 의사로 한 달에 한 번 정도 둥게스와리에 들려 결핵환자를 봐주신다. 그는 이 지역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양의사로 우리의 의료문제를 상담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버마 선생님은 우선 정부사람들에게 알릴테니 기다려 보라고 말씀하셨다. 자기가 알아보고서 다시 연락을 준다는 얘기였다. 그의 말마따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저 자신들의 아무런 능력없음을 탓해보며 마냥 버마선생님의 전화 오기를 기다릴 수 밖에... 그렇게 무작정 기다리기를 한 시간. 다시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버마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정부병원에서 곧바로 사람들을 바로 보낸다고 했으니 그들을 기다렸다가 같이 마을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휴-’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라고 쓰면 좋겠지만 불행하게도 그렇지가 못했다. 선생님의 얘기를 듣자마자 나에게는 이런 생각부터 떠오른 것이었다.
‘과연 그들이 올까?’
나의 인도 생활경험으로는 공무원들이 그렇게 빨리 움직여 주지는 않을 것이다. 이 나라 공무원들이 얼마나 융통성 없고 부패하고 책임감 없는지는 겪어본 사람이라면 다 안다. 도저히 자기 국민들에 대한 책임감이 있는지, 그리고 자기나라가 외국인들에게 어떻게 비춰지는지 통 관심이 없어 보이는 이들은 우리에게도 불친절과 뇌물요구의 나쁜 인상만 남기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소관사항을 우리 같은 NGO가 나서서 할 수는 없어 비록 믿음이 가지는 않았지만 그저 정부사람들이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게 기다려본다.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났다. 해는 서서히 서쪽 들녘으로 넘어가려고 하고 그때까지도 온다는 사람들은 오지 않았다. 둥게스와리는 오지인지라 해가 지면 위험해서 사람들이 바깥출입을 자제하고 있다. 일이십 명씩 몰려 다니는 무장강도들이 출몰하므로 한국인들도 문을 꼭꼭 잠그고 건물 안에 머물러야만 한다. 그래서 밤이 되면 누구도 활동하려 하지 않는 지역이다. 모든 일은 낮 시간 동안에 해결되야 한다는 게 우리들 생활의 철칙이기도 했다.
내 예상이 맞았는지 아무리 기다려도 정부사람들은 안 왔고 다시 버마 선생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용인즉슨 그들(정부사람들)이 공.휴.일.이라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공휴일이라서...
‘내 참 기가 막혀서..’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전혀 기가 막히지가 않았다. 충분히 그럴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사람들이 움직여줬으면 하는 일말의 기대는 가지고 있었는데... 이 나라 관료들에겐 천민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모양이다. 아니면 관료들이 자신의 일을 돈벌이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닐까.
늦었지만 우리 지바카 병원이 팀을 꾸려 마을로 들어갔다. 그렇지만 우리라고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콜레라 같은 전염병을 다스릴 전문의약품은 애초에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저 몇 가지 지사제를 가지고서 상황이라도 파악하기 위해 마을로 들어갔다.
까필데오 아저씨가 앞장선 가운데 마을로 들어가니 온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우리를 구경한다. 특별한 오락거리가 없는 마을에서 한국사람들이 마을에 들어오면 졸졸졸 뒤를 따라나니며 관찰하는 것이 이 마을사람들의 재미이기도 했다.
문제가 시작된 우물을 둘러보았고 죽은 여자아이의 집을 방문해본다. 그리고 아파서 누워있다는 다른 환자들을 찾아나서 본다. 환자들과 만나 일일이 증상을 확인해보고 지사제라도 주며 어떻게 해야하는지 주의를 준다. 주의라고 해봐야 별 것 없다. 약이라도 꼬박꼬박 먹으라는 것이다. 지사제라도 먹으면 계속된 설사로 인해 죽는 상황은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마을에 큰 문제는 없었다. 이번 문제를 일으킨 까나홀이라는 마을은 우리 사업권내에서도 잘 사는 마을에 속하는 편이라 일부 환자들은 시내에 나가서 벌써 약을 사먹기도 하였다고 한다. 오히려 문제는 사건이 발생하는 즉시 우리 병원에 알리지 않다가 사람이 죽으니까 그제서야 우리한테 얘기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만큼 우리 병원이 마을사람들에게 긴급하게 쓰일 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후로 집으로 돌아가서는 콜레라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연구해야 했다. 다시 똑같은 상황에 부딪혔을 때 이번처럼 무기력하게 당해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까나홀에서 발생했던 것이 콜레라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우리들로써는 콜레라의 진단방법을 알지도 못하고 누가 와서 검사를 해 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우물에서 시작된 병이고 한 명이 죽었다는 것 밖에는...다음에도 똑같이 당하지는 않으리라 결심하며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이상한파로 죽어가는 천민들
인도 천민마을의 겨울은 혹독하기만 하다. 인도라는 나라가 적도 가까이에 있는 열대지역에 속해 있기는 해도 워낙 광대한 대륙이라 지역마다 다가오는 계절은 제각각이다. 1년의 대부분을 따뜻할 겨를도 없이 찌는 더위 속에 보낼 수밖에 없는 도중에 우기와 건기 정도로 시절구분이 있다는 것이 히말라야 기슭이 아닌 평야 지역의 공통적인 기후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북인도에 위치한 둥게스와리도 예외는 아니어서 4월과 5월의 40도를 넘나드는 살을 태우는 폭서기가 사람을 괴롭히다가, 6월부터는 우기가 시작되면서 후덥지근한 한국식의 더위가 또다시 사람들을 볶아댄다. 1년의 대부분을 더위 속에서 보내는지라 이 곳 사람들에게 특별히 추위에 대비한 난방시설이나 방한, 월동준비라는 개념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의 외국인 상대 호텔에서도 난방시설이나 온수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고 보면 평야지역의 인도인들에게 겨울은 그저 잠시 참고 지나가야 할 계절로 비춰지고 있는 것 같다.
드디어 혹독하기만 했던 겨울이 둥게스와리에서도 문제를 일으켰다. 한 달간이나 계속되는 한파에 걱정이 되어 마을리더들을 모아놓고 피해상황이 없었는지 물어보았다. 결과는 참담했다. 그 자리에서 확인한 것만으로도 죽은 사람만 9명, 대부분 노인들이고 그 중에는 어린아이들도 있다. 알다시피 이 곳은 적도 쪽에 가까운 열대지방이다. 그리고 겨울도 극히 짧고 겨울이라봐야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곳 둥게스와리는 소외받고 천대받는 천민마을이다. 그리고 가난하다. 너무너무 가난해서 집에 이불이 있는 집이 없다. 신발을 신고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고 양말이란 것을 신고 다니는 사람은 더더욱 볼 수 없다. 학교에 나오는 학생들은 한겨울에도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나오니 나머지 사람들은 보아서 무엇하겠는가. 앞서 말했듯이 이들에게 겨울은 적응하기보다 잠시 참고 지나가야 했던 계절이다.
그러나 이번 겨울은 그렇게 호락호락 지나갈 수 있게 사람들을 놔두지 않았다. 둥게스와리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 ‘보드가야’에서 염주장사를 하며 살고 있는 토박이 나레스씨는 자기 나이 마흔 셋에 금년 같은 이런 추위는 처음 봤다고 했다. 겨울파카를 두 개나 껴입고 목도리를 꽁꽁 두른 나레스씨의 모습은 힌두스탄 평원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일 것이다. 40년 만에 처음 온 추위라는 말은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여러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현재 강변의 가트(화장터)는 더 이상 불피울 자리가 없고 시체들을 태우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다고 했다. 모두 갑작스런 한파에 죽어간 노인들의 시체인 것이다.
북인도, 네팔, 방글라데시에서는 이번 한파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지난 여름엔 더워서 죽더니만 이번엔 추워서 죽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간 것은 대부분 가난한 노인들이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안개가 짙게 끼어있어서 앞을 제대로 분간 할 수 없고 한 낮이 되어서야 잠깐 해가 뜬다. 그리고 바로 해가 지면서 다시 안개와 더불어 밤의 추위가 시작되는 것이다. 며칠을 계속해서 해를 보기 어려운 이런 날씨가 계속되면 기온은 계속 떨어져가고 행여나 하루 종일 해가 ‘전혀’ 안뜨는 날이라도 있으면 그 날 밤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가축들도 죽어간다. 가축들의 피해는 사람보다 더 심각하다. 그리고 마을사람들도 사람들이 죽는 것보다는 가축들이 죽어 가는 것을 더 심각하게 생각한다. 가축은 그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최대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당장 죽은 사람들보다도 지금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걱정해야 하는 것이 이들의 처지이다. 그렇다고 인도사회에서 죽은 소를 잡아먹을 수도 없고...
밤사이에 또 몇 명이 죽었을지 모른다. 이 곳에서 일하는 한국인 자원봉사자들도 난방장치가 전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저 옷을 두껍게 입고 이불들을 끌어 모아다 웅크리고 자는 수밖에 없다. 이 곳에서 구호사업을 시작한 지 9년째가 되지만 이런 한파 날씨는 처음이고 급작스럽게 다가왔기 때문에 JTS로써도 어떻게 빨리 손을 써보지 못했다. 우리가 보유한 담요는 100장, 그러나 우리가 관리해야 하는 마을사람은 1만명. 담요 1장에 우리 돈으로 3,000원 밖에 안하지만 그게 없어 사람이 얼어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것도 열대지방에서...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이 기가 막힌 일이 현실이 되었고 우리 한국인 자원봉사자들은 아침 일찍부터 비상약품과 그나마 있는 담요들을 챙겨들고 마을로 들어갔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할 수 있기를...
‘해야, 빨리 떠라.’
병원장의 딜레마
내 현재 직책은 인도 JTS 지바카 병원의 책임자이다. 병원장인 셈이다. 나이 서른에 병원장이 되었으니 사람들에게 농담 삼아 국내 최연소 병원장이 되었다고 말하곤 한다. JTS에서는 본래 일반자원봉사자에게 부서장급 이상의 직책을 맡기지 않는 것이 관례였는데, 확대되는 구호사업과 모자라는 자원봉사인력 가운데서 비교적 오랜 기간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나에게까지 선뜻 중임을 맡긴 것이다. 100개 마을에서 찾아오는 4,000명 이상의 환자들. 결핵, 콜레라, 말라리아, 나병에 쉽게 노출되어 있고, 소아마비, 부인병, 피부병 등에 일상적으로 시달리는 이 지역의 건강상태를 총책임지게 되었으니 부담이 안 된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내가 의료보건분야의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거나 병원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현장에서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내가 모르는 일에도 뛰어들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하긴 지금에 와서는 엑스레이도 찍고 현미경 검사도 하고 주사도 놓고 드레싱도 스스로 하고 있으니 서서히 돌파리가 되어가는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객관적인 여러 조건들이 너무 열악하고 나 자신의 능력도 보잘 것 없어 힘들지만 정작 나를 가장 힘들게 만드는 것은 내 마음 속의 갈등이다.
가오리 데비는 ‘두르가푸르’라는 가장 가난한 마을에 사는 환자로 우리 병원에서 결핵치료를 받는 도중에 임신하게 되었다. 예정일이 되어서 출산하게 되었고 아기는 무사히 분만했으나 산모에게는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오르고(정말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부풀어 오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심했었다) 숨도 제대로 못 쉬며 누워서는 전혀 움직일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2주를 앓다가 그녀의 남편이 보다못해 우리 병원에 데려 온 것이다. 그동안 남편은 결핵약 받게 하러 다른 사람을 보내놓고선 우리에게는 전혀 환자의 상태에 대해 얘기해 주지 않았었다. 의심하지 않고 세세히 확인해보지 못한 우리 결핵팀의 잘못도 컸다.
가오리 데비가 실려온 모습은 아무 것도 모르는 아마추어가 봐도 숨넘어가기 일보직전이었다. 가족들도 여태껏 아무 말도 안하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을 즈음에 우리 병원에 데려온 것이다.
그런데 지바카 병원에는 이런 원칙이 있다.
"위급환자는 돕지 않는다."
우리 병원에도 응급환자가 더러 오기는 하는데 외상처치 등은 가능하지만 가오리 데비 같이 의사의 전문처방을 요하는 환자를 다룰 능력은 없었다. 가오리 데비 같이 초기에 적절히 대처를 안하다가 다 망가져서 데려오는 경우들은 시내의 병원에 데려가도 비용은 수도 없이 많이 들고(최소 한 가구의 반년치 소득) 생존확률은 그리 높지도 않았다. 지바카 병원의 사업 초기에는 이렇게 실려오는 환자들의 급한 모양새를 보고 시내에서 차를 불러다 큰 병원까지 데려다 치료를 해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돌아오는 결과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차를 불러도 이송하는 도중에 죽고, 병원에 도착해도 수술하는 도중에 죽고, 설사 산다해도 그 엄청난 비용을 우리에게 전부 씌울 생각만 하고 환자가족들은 자구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도와줘서 살려 놓으면 모른 척하고 도와주다 죽으면 전부 우리 때문에 죽은 것처럼 책임이 온다. 사람은 사람대로 죽고 원망은 원망대로 듣고 우리들에 대한 사람들의 의존심은 더 커지기만 하고...사람을 살리러 왔으면서 전혀 효과적으로 살리지 못하는 우리의 이런 상황이 큰 딜레마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때 병원책임자는 냉정해야 한다. 단호해야 하고, 그리고 눈물을 삼킬 줄 알아야 한다. 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눈 하나 깜박 안하고 내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다 살릴 수 없는 현실을 즉시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병원장이 되어서 첫 번째로 찾아온 위급환자가 이 가오리 데비였다. 결핵퇴치사업을 할 때 내가 관리하던 환자였기에 잘 아는 사람이었다.
환자는 숨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병원원칙으로는 도와줄 수 없었다.
그러나, 난 사람을 살리러 왔다.
하지만, 나는 병원과 프로그램을 총책임져야 하는 관리자이기도 하다.
그래도, 당장 앞에서 사람이 죽어가지 않는가.
그러나, 원칙없이 도와주면 나만이 아니라 병원사업 전체에서 뒷감당을 하기 어려워진다. 그래, 판단해야 한다.
일단 환자를 돌려보내 놓고 이날 저녁 JTS 실무자들과 논의를 하였다. 매일 저녁마다 열리는 실무자 회의 시간에 이 문제를 논의주제로 내 놓은 것이다. 논점은 간단했다.
‘이 환자를 도울 것이냐 말 것이냐.’
병원책임자인 나는 가오리 데비가 그동안 우리가 관리하던 환자이고 하니 결핵퇴치사업의 차원에서도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JTS의 총책임자인 ‘샨띠 시스터’는 단호했다. 수많은 지난 시간 동안의 경험을 통해 그러한 응급환자를 도와주는 것은 부작용이 더 컸었다는데 이미 동의하고 있고, 그렇게 해서 정해진 원칙을 이제 와서 환자 한명이 불쌍하다고 어길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의견차이 정도였지만 나중에는 감정싸움으로까지 발전하였다. 당황해하는 다른 실무자들 앞에서 노련한 총책임자와 초짜 병원장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수준까지 나가버렸다. 샨띠 시스터는 네가 뭔데 원칙을 깨뜨리려 하느냐는 것이었고 나는 당장 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데 그게 뭘 위한 원칙이냐 하는 것이었다.
JTS 책임자가 지난 기간 만들어진 원칙들을 따르자고 얘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샨띠 시스터 자신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책임자로써 돕자고 얘기해서는 안 되는게 그 위치에서 맞는 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 목숨보다 중요한 원칙이라는게 있을 수 있느냐는 내 생각도 잘못되었다고만 말할 수 있었을까.
막상 책임자와 나와의 싸움이었지만 정확히 말하면 내 마음 속의 두 의견이 서로 충돌한 것일 뿐이었다. 나도 지난 시간의 경험을 통해서 구호사업에서는 철저하게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종 결정권이 나에게 없었기 때문에 내 뜻대로 해 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이후 3일간을 방에서 꼼짝없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버렸다. 나중에는 정말 마음 상한 것이 감기몸살로 나타나 정말 움직일 수 없게 되어버리기도 했다.
현재, 가오리 데비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아직 몸의 붓기는 다 빠지지 않았지만 계속 결핵치료를 받으러 본인이 직접 나오고 있다. 지팡이를 짚고 다니지만 그래도 혼자 걸을 수 있을 만큼 좋아졌다. 사실은 그 감정 상한 실무자 회의 이후로 내가 몰래 원칙을 어겼었다. 내 개인 돈을 들여가지고 시내에서 차를 불러다 가오리 데비를 병원에 보냈고, 필요한 모든 비용을 부담해주었다. 다행이었던 것은 가오리 데비를 진찰한 의사의 말이 가오리 데비에게는 그때가 마지막 고비였다는 것이었다. 조금만 더 늦게 왔어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어쨋든 사람은 살렸다.
그러나 병원장은 병원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 병원원칙뿐만 아니라 ‘JTS의 자원봉사자는 마을주민들에게 사사로이 돈을 쓰지 않는다’는 생활원칙까지 어긴 것이다. 그래서 사람목숨은 살렸다지만 결코 내가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난 여전히 딜레마에 빠져있다.
에필로그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나의 자판 두드리는 소리만이 주위의 정적을 깨뜨리고 있다. 이 곳은 한국. 나는 어느새 고향 땅에 돌아와 있는 것이다. 2년이 조금 안 되는 인도에서의 봉사활동을 마감하고 이미 한국에서의 일상적인 생활에 녹아버린 것도 몇 년전의 얘기이다. 이제 인도에서 겪었던 그 많은 일들도 나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과거로써 남게 되었다.
인도에서 수많은 문제들이 나에게 다가왔었다. 나를 깊은 고민의 나락에 빠뜨렸던 크고 심각한 문제들도 있었지만 생활 속에서 일상적으로 나를 괴롭히는 자질구레한 문제들도 수없이 많았다. 때로는 일이나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인도라는 나라 자체가 짜증날 때도 많았다. 그러나 인도에서 내가 있던 곳이 우리나라에서처럼 별 불편함을 느낄 수 없었을 환경이었다면 굳이 그 먼 나라에까지 가서 도움을 줄 필요가 있었겠는가. 어려움을 어려움이 아니라 하나의 환경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도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바카 병원의 10년 후를 생각해본다. 비록 이렇게 진전하는 속도가 느리긴 하지만 내가 없는 10년 후에는 정말 알겠는가. 다음과 같은 일은 벌어질런지. 지바카 병원에도 상근하는 의사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이 계시고, 장소가 없어 마을사람들에게 보건교육을 못시킬 정도가 되고, 무조건 죽는 병이던 결핵이 이제는 너무나 쉬운 병이 되어버리고, 아이들에게는 소아마비로 인한 평생장애가 더 이상 생기지 않는 그런 병원. 대신 그만큼 자원봉사자들은 무지무지 바빠져 버렸을 그 시점. 그런 때가 오지 않을까 말이다.
그리고 그 시점에도 자원봉사자 그들만의 고민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과중한 책임과 판단의 과정들에서 오는 고민들. 혹 그 10년 후의 자원봉사자들이 내가 남긴 이 글을 읽고 10년 전 지바카 병원을 살아가던 초기의 자원봉사자들이 어떤 고민을 했었는지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 무슨 병원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느냐고 불평하기 전에 그 정도나마 우리가 최선을 다해왔던 결과라는 것을 그들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벌써부터 그이들에게 미안함이 느껴진다.
내가 지바카 병원에 있는 2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동안 우리로 인해 삶을 되찾은 환자들이 있었던 반면에 그 비슷한 숫자로 제대로 손도 못써보고 죽어간 환자들도 있었다. 내가 한국에 들어와 있는 지금도 인도의 지바카 병원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고 있으며 또 누가 죽고 또 누가 살고 하는 이야기들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내 젊음의 일부분이었던 지바카 병원은 단순히 인상깊은 한때의 경험으로만 그치기에는 너무나 여러 가지의 것들을 나에게 준 것이 사실이다. 병원이라는 곳에는 남들 병문안 하던 것 빼고는 근 10년 동안 가보지 않은 나였건만, 지금은 근육주사나 드레싱은 기본이고 엑스레이에 현미경검사, 정맥주사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전부 면허 없이 하게 된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얻은 것은 그런 잔기술들이 아니라 내가 도와주려고 노력한 환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그들을 돕기 위한 나의 노력을 통해서 나 또한 같이 치유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해외자원봉사를 갈 때 봉사자들이 이전 경험자들로부터 한번씩 들을 수 있는 말 중에 하나가 ‘우리가 그들에게 실제로 도움을 주는 것 보다 그들로부터 우리가 도움을 받는것이 더 많다’는 이야기이다. 머리로는 전부들 그 얘기를 이해하고 현장에 가지만 직접 겪고 나서 자신이 스스로 그 명제를 이해하게 될 때 그 이해의 수준은 천지차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자원봉사자들도 소외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신보다 더 소외되었을 것 같은 사람을 찾게 된 것이고 상대방의 소외를 해결해주려는 노력의 과정에서 자신의 소외도 서서히 해결되어 가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구호의 현장에서 봉사자들을 끝까지 버티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저마다 둥게스와리 같은 오지까지 올 때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온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했을 환경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어가 끝까지 현장을 지키고 때로는 더 오랜 기간을 있겠노라고 자청하는 이들 행동의 바탕에는,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인도주의’나 ‘희생정신’보다도, 도움을 주면서 자신도 도움을 받는 자원봉사만의 독특한 치유과정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이라 결론 내리고 싶다.
나는 치유가 지나쳐 중독이 되어 버린 탓일까? 가장 젊었을 때 너무나 강렬하게 경험한 이런 체험들은 지금은 국제개발을 나의 평생의 직업으로 선택하게 하였다. 이 일을 하는 것이 그들을 위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나를 위하게 되는 것이고 이미 그것은 ‘우리’를 위한 일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기에 지금은 내가 겪었던 특별한 경험들이 나만의 것으로 멈추지 않기를 바라며 또 다른 젊은이들을 해외로 내보내는 일을 하고 있다.
[‘한국JTS(www.jts.or.kr’)가 인도 북동부 비하르주 가야시 둥게스와리 지역에서 운영하고 있는 지역개발사업장 내 지바카 병원에서 2년간 근무하면서 겪은 이야기들을 정리해보았습니다]
* 연락처 : 김동훈 / 010-4135-0506 / xtopaz@hanmail.net
[출처] 해외봉사 체험수기 (국제개발아카데미) |작성자 김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