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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태후 황보씨

강준석 |2008.07.21 19:05
조회 134 |추천 0

황제국가 지향한 고려의 여걸..

천추태후 황보(皇甫:964~1029)씨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혹시 그녀를 아는 사람들도 김치양이란 신하와

간통한 왕비 정도로 기억하고 있기 십상이다..그러나 고려 다섯번째

왕인 경종과 결혼 헌애황후가 괸 그녀는 그정도로 넘어가기에는 고려

초기에 남긴 족적이 너무 큰 여인다..여덟살 위의 사촌오빠와 결혼,

황후가 됐을때만 해도 황보소녀는 모든것을 갖춘 행운아였다..

그녀의 친 할아버지는 태조 왕건이었다.

황보라는 성은 외가쪽을 딴 것인데 그녀의 외 증조부 황보제공은

예성강 서북의 패서 내륙 일대를 대표하던 호족이었다.. 그녀의 동생도 뒤이어 경종과 결혼시켜 헌정황후로 만든것은 그녀 외가의 위헤를

잘 말해준다.. 경종에겐 이미 두 명의 부인이 있었지만 그녀는 앞선

왕비들과 치열하게 경쟁, 경종의 유일한 왕자 송을 낳을 수 있었다..    비록 순서로는 세 번째지만 왕자를 낳은 그녀의 위치는 명목상의 서열을 앞질렀다..그러나 경종이 재위 6년만인 981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두 살짜리 왕자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남에 따라 모든 것이 뒤죽박죽

되어 버렸다.. 두살짜리가 즉위할 수는 없었기에 대시 오빠가 즉위한

것이다.. 그가 바로 성종인데 그가 중국식 유학 정치 이념의 구현을

치세목표로 삼으면서 그녀의 인생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성종은 유학정치 이념에 따라 동생들에게 평생 수절을 강요했다..

그러나 열여덟살의 헌애왕후나 동생 헌정왕후는 수절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또한 유학윤리에 그다지 구애받지 않는 고려 여인이었다..

헌애왕후가 문제의 남자 김치양이 외가 친척이란 명목으로 승려

복장을 하고 나타났을때 별 다른 망설임 없이 그를 애인으로 삼은 것은 이런 이유때문이었다.. 동생 헌정왕후도 마찬가지다..

경종 사후 왕륜사 남쪽에 거주하던 헌정왕휴는 곡령에 올라서 소변

보는 꿈을 꾸었다.. 신라 김유신의 동생 보희의 꿈처럼 온 나라에 넘쳐

흐르는 꿈이었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오줌이 은 바다로 변했다는 점이다.. 점쟁이는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될 꿈"이라고 풀이했으나 그녀는

"이미 과부가 되었는데 어찌 아들을 낳겠는가?"라고 한탄했다...

그러나 이웃에 살던 이복숙부 왕욱이 접근하자 그녀 역시 언니처럼

감정에 충실했다.. 두 여동생의 추문이 들리자 성종은 염격한 유교

윤리에 따라 김치양의 곤장을 친 후 귀양보냈고 욱도 멀리 경상도

사천으로 귀양 보냈다...이미 임신 중이었던 동생 현정왕후는 귀양가는 욱을 바래다주고 돌아오던 중 집 앞에서 아이를 조산 했는데 산후조리에 실패해 죽고 말았다.. 헌애왕후는 자신들에게 엄격한 유학이념을 강요하는 성종에게 큰 불만을 느꼈다.  그녀는 성종의  유교정책은

할아버지 왕건의 뜻과 다르다고 판단했다.. 성종은 즉위하자마자

팔관회나, 연등회,선랑처럼 왕건이 높였던 고려의 전통 행사들을

떳떳치 못하다고 생각해 폐지했다...대신 역대 왕들의 신주를 모시는 중국식 태묘,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 공자를

제사하는 문묘등을 설치하는 등 중국식 유교화에 박차를 가했다..

중국식 잣대를 들이대면 제후국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는데 실제로 성종은 개국이래 사용해 오던 조서를 교서로 개칭했다...

조서는 황제가 사용하는 용어이고 교서는 제후의 용어다..

성종은 또 최승로 같은 유학자들과 신라계 인물을 적극 등용했다.

하지만 그의 유교화 정책은 상무정신을 약화시켜 거란족의 요나라

침입때 국토 일부를 떼어주자는 할지론이 조정의 대세를 이루는

악영향의 배경이 되기도했다..서희와 이지백등 항전론자들은 조정의 소수파에 불과했다..이지백의 "경솔히 국토를 떼어주기 보다는 연등회,팔관회,선랑등의 행사를 다시 거행하고 타국의 색다를 풍슴을 본받지 말아 국가를 보전하자"는 주장은 고려 전통의 상무정신의 부활을 

요구한 것이다... 헌애왕후역시 고려 전통파의 이런 주장에 깊이

공감했다... 성종이 재위 16년 동안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자 그녀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헌애왕후는 성종의 잘못된 정책을 되돌려

놓기로 결심했다...

천추궁에 머무른 그녀는 자신을 제후의 어머니인 대비가 아니라

천추대후라고 부르게 함으로써 고려를 황제국으로 만들려는 의지를

과시했다...

천추 태후는 귀양간 김치양을 불러들여 우복야겸 삼사사에 임명했다.목종을 도와 고려식 전통청책을 부활하는 한편 유행간. 이주정, 문인위등을 등용했다..이들은 자신의 친정 세력이었던 해서호족의 일원이었다.. 그녀는 북진을 강조했던 왕건의 유훈을 실천하기위해 목종에게

네 번이나 서경 (평양)에 행차하게 했다..

그때마다 산악과 주진의 핵심지역에 제사를 지내 전통신에게

가호를 빌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진관사를 짓고 목종을 위해 숭교사를 김치양의 출신지서흥에 성수사를 궁성 서북에 시왕사를 지었는데 이런 절들은 전통행사 팔관회에서 모든 토속신앙이 어울렸던 것처럼 불교와 도교, 토속신앙이 함께 어울리는 장소였다...

천추태후의 이런 정책들은 성종의 방향이 옳았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유학자와 신라계 인물들을 반대파로 만들었다..

이들은 목종을 내쫓고 태후의 동생 헌정왕후가 숙부 욱과 사통해 낳은

순을 국왕으로 삼으려고 획책했다... 천추태후는 목종 6년 열 두 살이던 조카 순을 댜량원군으로 삼아 우대했으나 반대파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이자 1006년 그를 승려를 만들어 남경의 삼각산 신혈사에

내려보냈다..천추태후는 자신의 정책이유지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1003년 김치양 사잉에 낳은 아들이 후사가 되어야한다고 생가했다.

그러나 선수를 친 것은 반대파들이었다.. 이들은 목종 재위12년(1009)

정월 임금이 관등을 하는 틈을 타서 천추충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정변을 시작했다..'고려사'는 목종이 천추궁 화재에 충격받아'병을 얻어

정무를 보지 않았다'라면서 '궁내에만 있고 신하들을 만나기를 거부

했다'고 적고 있으나 실제로는 쿠데타 세력에게 유폐된 것이었다..

결국 목종은 폐위 당하고 대량원군이 형종으로 추대되는 것으로 쿠데타는 성공한다.. 강조는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 등 천추태후 세력을 대거

살해했다.. 이때 천추태후는 46세였으나 쿠데타 세력은 그를 죽이지는 못했다.. 목종과 김치양 사이의 아들까지 모두 죽여 재기할 싹을

자른 데다 태조의 손녀이자 선왕 경종의 왕후인 그녀마저 살해하는

것에는 큰 부담을 느꼇기 때문이다.. 목종이 죽은 후 그녀는 외가의

고향인 황주에서 한을 다래며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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