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나이트
예전 배트맨 시리즈를 보면 속편으로 갈수록 장난스런 장면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장난의 중심에는 언제나 배트맨의 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조커에서부터 펭귄인간 등 하나같이 문제아의 표본이라 할 만큼 별다른 계획 없이 그저 사고를 치는 게 전부였고 배트맨의 그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분주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새로 개봉한 다크나이트는 과거 배트맨 시리즈와 일정 간격의 선을 긋는다 할 정도로 달라진 면모를 보여주었다. 우선 등장인물들 중 아무도 웃기려는 제스처를 취하지 않는다. 조커가 다소 그런 분위기를 유도하는 것 같지만 오싹하기만 할뿐이다. 코믹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진지함이 들어섰다. 사람이 죽고 사는 상황까지도 희화하던 과거의 분위기는 싹 사라졌다. 누가 배트맨 시리즈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물론 감독의 계획도 있었겠지만 히스 레저라는 배우의 힘이 무엇보다도 컸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작품 중 기사 윌리엄만 봤던 나는 히스 레저라는 이름조차 생소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케이블 tv에서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고 연기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성애자의 심정을 표정이나 온 몸을 통해 보여주는 연기를 보며 다크나이트에 대한 기대를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조커가 문제를 일이키는 이유는 그 이전의 악당들과는 사뭇 다르다. 배트맨 시리즈를 비롯해 액션영웅이 나오는 영화의 악당들은 대부분 뭔가를 지배하고 차지하기 위해 문제를 일이키는 게 보통이었다면 조커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돈에 관심이 없는 어느 원시부족의 이야기는 배트맨이 조커와 싸운다는 것 자체를 어렵게 만들어버린다. 흔히 묻지마 범죄라 일컬어지는 이유 없는 살인이 조커의 행동동기인 것이다. 즉, 재미 자체를 위한 폭력,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것으로부터 자기 행동의 정당성, 혹은 만족감을 느끼려는 조커의 계획은 서슬 퍼런 광기를 통해 나타난다.
입술이 찢어져 언제나 웃을 수밖에 없는 그는 자신의 고통스런 과거를 남들에게 떠벌린다. 자 내가 이만큼 고통스러우니 네가 나를 대적할 수 있을까. 인간에게 있어 행위의 정당성을 담보하는 것 중 고생이라는 것은 꽤 유효하다. 굳이 전쟁영웅처럼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고통 그 자체만으로 큰 소리를 낼 수 있다. 남에게 공공연한 피해를 끼치면서도 언제나 떳떳한 인간. 조커는 묻는다. 내게 고통 받는 인간들이 과연 나보다 더 고통스러울까.
결국 고통을 끼치는 나나 고통을 받는 당신이나 인간이라는 범주 속에서 다를 바 없다. 그래서 그는 배트맨을 속여 그의 연인이었던 레이첼을 시체도 남기지 않고 살해해 버린다. 완전히 멸살시킨다는 것은 남겨진 자에게는 엄청난 고통이다. 완전한 애도를 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지방검사 하비는 잠재된 폭력성을 드러낸다. 삶과 죽음을 한꺼번에 자기 얼굴에 담아버린 하비, 벗겨진 그의 피부는 곧 세상의 장막과 같은 것. 장막이 걷히고 난 그의 눈에 비춰지는 세상은 동전놀이 감밖에 되지 못한다.
조커가 배트맨과 벌이는 마지막 놀이는 소위 죄수의 딜레마(두 명의 죄수가 있다 양쪽 죄수에게 먼저 자수하면 형을 감해줄 것이지만 반대편 죄수가 먼저 자수하면 당신의 형은 더 무거워 질 것이라 경고한다. 두 죄수가 모두 자백을 하지 않으면 둘 다 무혐의다. 두 죄수는 바로 이런 상황 안에서 딜레마에 처하고 만다.)란 것이었다. 죄수의 딜레마는 행정학에 등장하는 개념이지만 이미 쏘우라는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도 익숙하다. 남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게임. 그러나 서로 믿으면 살 수도 있다. 영화에서는 딜레마를 이겨내는 사람들의 감동적인 장면이 그려지고 결국 조커는 패하게 된다.
마지막에 하비가 경찰관의 가족을 협박하는 상황은 배트맨의 활약을 통해 예상대로 끝맺는다. 모든 혐의를 뒤집어쓰는 배트맨, 뭔가를 옹호하는 의심을 들게 하기도 했지만 지나친 생각인 것 같아 그냥 멋있다고 봐주기로 했다. 죽은 배우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