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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사랑 "마리 퀴리"

신문섭 |2008.08.20 23:11
조회 194 |추천 1

 

♡   어머니의 사랑 "마리 퀴리"   ♡

 

 

1870년경에 폴란드의 한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주 총명하고 영특한 마리라는 아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마리에게 남자아이들 보다 더 훌륭한 딸이라고

네가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면 우리 딸 마리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여성이 될 거라고 정성으로 가르치고

돌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어머니가 자신을 한 번도 따뜻하게

안아준 적도 없고 또한 뽀뽀해준 적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저 늘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었답니다.

 

그래서 어린 마리는 어머니가

자신의 친어머니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리고 자신은 아이를 낳으면 늘 안아주고

뽀뽀해 줄 거라고 까지 생각했죠.

 

그러다가도 항상 자신의 일에 열심히 도와주시는

어머니에게 응석을 부리려들면 또 떨어지시고 하시며

미소만 보여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리는 어머니에 대한 애증이 함께 존재했답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마리는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어머니를 보내는 자리에서의

어머니의 싸늘한 시신을 보면서 울지 않으려 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갈증이 마리의 가슴에 맺혀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때 어머니의 주치의 이었던 의사선생님이

마리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당신의 어머니는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어머니는 지독한 천식증을 평생에 걸쳐 앓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딸을 안아주지 못하고 입맞춰주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밤마다 눈물을 흘리고 멀찌감치 떨어져 딸의 건강을 기원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죽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내 딸 마리. 엄마가 이 세상에서 못해준 것을

훗날 천국에서 열배로 백배로 안아주고 입 맞춰 주마,

사랑한다! 나의 딸 마리……."

 

마리는 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을 가슴에 새겨 정열적인 공부와

연구 활동을 하였으며 1903년에는 노벨물리학상을 그리고

8년 후인 1911년에는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도 훗날 노벨물리학상을 받게 함으로써

유일하게 모녀가 다 노벨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가졌습니다.

 

그녀가 바로 퀴리부인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마리 퀴리입니다.

 

 

 

★ 마리 퀴리 ★ (Marie Curie, née Sklodowska 1867∼1934)


프랑스 화학자. 폴란드 바르샤바 출생.

본명은 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이다.


중학교 수학·물리학교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과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경제적 어려움을 무릅쓰고 1891년 파리대학 이학부(理學部)에 입학하여 1893년 물리학과를 수석으로, 1894년에는 수학과를 차석으로 졸업하였다. 같은해 봄 파리물리화학학교 실험주임으로 있던 P. 퀴리와 만나 1895년 결혼하였다.


1895년 W.K.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하고, 1896년에 A.H. 베크렐이 X선과 비슷한 육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사진 건판(乾板)을 감광시키는 방사선(베크렐선)이 우라늄화합물에서 나온다는 것을 발견하는 등 뒷날 퀴리부부의 연구에 이어지는 중요한 발견이 이루어졌다.


1897년말 마리는 박사논문 주제로 <베크렐선의 해명>을 선택하였다. 이 연구에 남편 피에르가 발명한 퀴리 전위계를 이용, 공기를 이온화해서 전기전도성(電氣傳導性)을 부여하는 베크렐선의 성질을 통하여 그 세기를 정량적(定量的)으로 측정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베크렐선의 세기는 우라늄원소 함량에 비례한다는 점과 우라늄의 물리적·화학적 상태에는 관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에서 마리는 베크렐선이 우라늄원자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임을 밝혔다.


또한 다른 원소에 관해 조사한 결과 토륨도 베크렐선과 같은, 더구나 우라늄보다 강한 방사선을 내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이러한 방사선을 내는 성질을 방사능(放射能;radioactivity)이라고 이름 붙였다. 우라늄 광물의 피치블렌드(역청우라늄광)을 조사한 결과 그 방사능이 금속우라늄보다 4배나 강한 사실을 발견하였으며 우라늄·토륨 이외에도 방사능을 가진 미지의 원소가 있음을 추론하고 그 단리(單離)를 시도하였다. 이 시기부터 피에르도 연구에 직접 협력하였으며, 1898년 7월 6일 비스무트와 함께 침전하는 물질 속에서 우라늄의 330배나 되는 방사능을 가진 물질을 얻었다. 마리는 이것을 새로운 원소로 보고 조국의 이름을 따서 폴로늄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런데 우라늄·토륨·폴로늄을 제거한 잔액에 다시 강한 방사능이 있음을 알아내고, 바륨과 함께 침전한 물질 속에 존재가 예상되는 이 새로운 원소에 방사선을 뜻하는 라틴어 라디우스(radius)를 본따 라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퀴리부부는 스펙트럼분석의 권위자인 친구 E. 드마르세가 발광(發光) 스펙트럼사진을 촬영해 준 것을 가지고 새 원소임을 확인하였으며 1898년 12월 26일 이 2가지 원소를 프랑스 과학학사원에 보고하였다. 마리는 다시 요아힘스탈 광산에서 우라늄광석 찌꺼기를 얻어와 거기에서 라듐을 추출하는 실험작업에 들어갔다. 잘게 빻은 앙금에 진한 황산을 넣고 자기(磁器)냄비 속에서 끓여 바륨과 라듐의 황산염혼합물을 얻었으며, 이것을 다시 처리해 염화물(鹽化物)로 바꾸어 두 염화물의 용해도차(溶解度差)를 이용해 분별결정화하는 순서를 되풀이한 결과, 1902년 우라늄의 몇백 배나 되는 방사능을 가진 순수한 라듐염(염화라듐) 0.1g을 얻었다. 이때까지 처리한 광석찌꺼기는 8톤이나 되었다. 다시 드마르세에게 스펙트럼분석을 의뢰하여 거의 순수한 라듐의 염화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그 원자량을 측정해 225.93을 얻었다(실제로는 226.0254, 질량수 226).


이 연구로 1903년 마리는 파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같은해 제3회 노벨물리학상이 베크렐 및 퀴리부부에게 수여되었다. 이듬해 피에르는 파리대학 교수가 되고 마리는 그 대학의 실험주임이 되었다. 1906년 여성으로서 최초로 파리대학 강사가 되었으며 이어서 1908년에는 교수가 되었다.


마리는 앞서 얻은 염화라듐 0.1g을 원료로 해서 라듐을 화합물로서가 아닌 홑원소물질 즉 금속으로서 얻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영국 물리학자 W.T. 켈빈으로부터 라듐은 원소가 아니라 납과 헬륨의 화합물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제기되었으나 마리는 염화라듐을 물에 녹여 전해하여 수은인 아말감을 만들고 그 다음에 수은을 제거하여 1910년 드디어 미량의 금속라듐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이듬해 마리는 이 실적으로 제11회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다. 이리하여 마리는 여성으로서 최초로, 그리고 사상 최초로 2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다.


1913년 바르샤바에 방사능연구소를 설립하고 1914년 파리 라듐연구소 설립에 협력하였으며, 제1차세계대전이 시작되자 X선검사반을 조직하고 또한 자동차에 발전기와 X선장치를 실은 이동X선반을 만들어 의료활동을 하였다. 1919년 라듐연구소에서 연구를 재개하였으며, 1921년 미국인 멜로니부인의 노력으로 두 딸과 함께 미국을 방문해 라듐 1g을 기증받았다.


주요 저서로 파리대학에서의 강의를 토대로 엮은《방사능》상·하권이 있다.



1867 폴란드 바르샤바 출생 

1883 바르샤바 국립여학교 졸업 

1891 파리대학 이학부 입학 

1893 물리학과 학사시험에 수석 합격

1895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와 결혼. W. K. 뢴트겐, X선 발견

1896 A. H. 베크렐, 베크렐선(線) 발견 

1897 장녀 이렌느 출생. 박사논문 주제로 베크렐선의 해명을 선택함. 이 연구에 피에르도 협력

1898 새 원소 발견을 공표,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폴로늄이라 명명함. 라듐 발견을 공표

1900 여자고등사범학교에서 물리학강의를 맡김

1902 순수 라듐염 0.1g 추출 성공 

1903 파리대학에서 박사학위 받음. 베크렐·피에르와 함께 노벨물리학상 수상

1904 피에르, 파리대학 물리학교수가 됨. 둘째딸 이브 출생

1906 피에르, 교통사고로 죽음 

1908 남편의 후임으로 파리대학 물리학 교수에 취임

1910 금속라듐 분리에 성공

1911 노벨화학상 수상 

1913 바르샤바 방사능연구소 설립에 협력

1914 파리 라듐연구소 설립에 협력, 방사능실험실 실장이 됨. 제 1 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이동X선반을 조직, 부상병 구호활동을 함

1919 라듐연구소 재개. 폴란드 독립 

1920 퀴리재단 창립

1934 7월 14일, 장기간에 걸친 방사능연구로 인한 백혈병으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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