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리치 블랙모어
“현재 많은 시선을 모으고 있는 기타리스트들을 보면 그들의 스피드와 테크닉에 감탄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이 지나가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연주가 환영받는 때가 다시 오리라고 생각한다…내 경우 이제 나 자신을 강하게 어필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타인의 그림자 속에 적당히 가려져 있고 싶을 뿐이다.”
70년대 하드록 기타의 상징적인 존재인 리치 블랙모어는 1945년 4월 14일 영국 웨스턴 슈퍼메어(Weston Super Mare)에서 태어났다. 11세되던 해의 생일날에 선물로 받은 스페니쉬 기타가 인연이 되어 기타에 몰두한 이래 행크 마빈(Hank Marvin), 스코티 무어(Scotty Moore)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카피시절을 거쳤다. 이후 60년대 초 함부르크로 건너가 세션맨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Heinz, Screaming Cord Sutch, Tornadoes 등등 많은 밴드에 세션으로 참가 명성을 떨치다가 존 로드의 권유로 런던으로 돌아와 그와 함께 그룹 딥 퍼플을 결성한다.
67년 여름 딥 퍼플은 데뷔싱글 'Hush'를 Top-5에 히트시키며 인기 록 그룹의 대열에 들어섰고, 리치는 데뷔앨범에서 74년 말의 [Stormbringer]까지 참여한 후 음악적 차이를 이유로 딥 퍼플을 탈퇴하였다. 이후 그는 75년 초 로니 제임스 디오(Ronnie James Dio)와 함께 레인보우를 결성, 본격 인스트루멘틀 하드록의 세계를 펼쳐 나갔다.
하지만 독선적인 리치의 성격 때문에 레인보우는 잦은 멤버교체를 되풀이해야 했고 이 때문에 록계에서 리치에 대한 입방아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Rising], [Long Live Rock’n Roll] 등 록계에 길이 남을 앨범들을 완성하였다.
딥 퍼플 재결성으로 레인보우는 83년 가을 9집 앨범 [Bent Out Of Sharp]를 끝으로 해체되고, 리치는 제2기 딥 퍼플에 가입하여 다시 예전의 영광을 되찾는 가 기대를 갖게 했으나 의외로 연주는 예전에 비해 진부해 팬들을 실망시킨 바 있다. 그는 또다시 멤버들과의 불화로 재결성된 딥 퍼플을 탈퇴해 레인보우를 조직해 딥 퍼플 멤버들에게 정면 도전장을 내걸기도 했다.
레인보우 이후에는 ‘No More Hard Rock'을 공표하며 캔디스 나잇(Candice Night)이라는 여성과 함께 블랙모어스 나잇(Blackmore's Night)을 조직해 포크 및 신비주의적인 형태의 아름답고 선율적인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언제나 도전적이며 전투적인 연주로 하드록 시대를 주름잡았던 리치 블랙모어의 기타세계는 소위‘정통 록기타(Orthodox Rock Guitar)’의 전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셋 잇단 셔플리듬에 기초한 독자적인 피킹 스타일, 절도와 팽팽한 긴장감을 몰고 오는 스타카토, 위협적인 해머링, 격정적으로 표출되는 울림 큰 비브라토, 손버릇처럼 많이 쓰는 개방현 프레이즈와 분노하듯 떨어대는 과격한 아밍, 클래시컬한 감각을 볼 수 있는 피킹 아르페지오, 초킹한 상태에서 계속 같은 음을 쳐대는 주법 등 그가 록 기타계에 가져다준 선물들은 무시 못할 만큼 많다.
60년대에서 70년대로 이어지는 기타리스트답게 그 역시 1도와 5도 주체의 리프들을 애용했고, 솔로시엔 펜타토닉 스케일이 주가 되는 프레이즈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블루스 기타를 뿌리로 두고있는 만큼 솔로 진행시 쿼터초킹이나 하프초킹 등을 미묘하게 바꾸어가며 사용함으로써 블루지한 맛의 연주를 구사하기도 한다.
사운드메이킹에 있어서도 예민한 편이라 펜더 스트라토캐스터의 셀렉터 스위치를 리어-미들-프론트로 바꾸어가며 그때그때 곡의 분위기에 맞는 연주를 펼쳤고, 레인보우로 와선 좀더 내추럴한 음색을 선호해 깔끔하며 디스트가 적당히 걸린 톤을 만들어갔다.
한번 들어도 금새 익히기 쉬운 그의 인상적인 멜로디와 곡의 분위기를 서서히 고조시키는 강인한 집중력의 기타 세계는 딥 퍼플 시절의 'Highway Star', 'Smoke On The Water', 'Burn', 'Child In Time' 등과 레인보우의 'A Light In The Black', 'Kill The King' 등에서 만끽할 수 있다.
2. 지미 페이지
“뮤지션이 한장의 앨범을 만들어내기까지의 노고, 에너지는 대단한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생명과 자신의 인생을 걸고 만드는 것이다. 내가 레드 제플린에서 해왔던 것은,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음악의 개념을 하나씩 깨트리면서 새로운 것을 창출해내는 것이었다. 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발전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락 역사의 신화적인 그룹으로 길이 남을 레드 제플린의 기타리스트로써 명연을 남긴 지미 페이지는 1944년 1월 5일 영국 미들섹스주의 헤스턴에서 태어났다. 스코티 무어(Scotty Moore), 제임스 버튼(James Burton), B.B.킹 등으로부터 영향받아 14살 때부터 일렉트릭 기타를 시작한 페이지는 16살 때엔 스튜디오 뮤지션으로서 활동했다.
66년 6월에 페이지는 그룹 야드버즈에 가입해 제프 벡과 함께 트윈 리드기타를 펼치다가 68년 야드버즈의 해산과 함께 레드 제플린을 출범시켰다. 그는 레드 제플린에서 기타사에 길이 남을 명 리프 및 솔로잉들을 공개했고 레드 제플린 해산 후에는 솔로 및 세션 활동을 하다가 폴 로저스와 함께 펌(The Firm)이라는 밴드를 만들었고 이후에는 로버트 플랜트와 함께 ‘Page & Plant'라는 이름으로 음악활동을 했고 데이빗 커버데일과도 듀엣활동을 한 바 있다.
지미 페이지는 밴드지향의 기타리스트이다. 레드 제플린과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는 밴드의 팀웍에 우선하는 탁월한 ‘보조자(Supporter)’로써 그리고 인상적인 멜로디라인과 독창적인 배킹 플레이어로써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다.
'Black Dog', 'Rock And Roll', 'Stairway To Heaven', 'Misty Mountain Hop' 등에서의 뛰어난 리듬기타와 명석한 하모나이징, 'Living Loving Maid', 'Whole Lotta Love'에서의 명 리프, 'Good Times Bad Times'에서의 조바꿈되며 갑자기 튀어나오는 솔로, 'Dancin’Days'에서의 리디안 모드에 의한 이색적인 구성 등 그의 연주는 뛰어난 악상과 어레인지의 능란함을 장점으로 한다.
지미 페이지는 70년대 기타리스트들처럼 블루스를 근간으로 한 펜타토닉 리프를 주로 추구했지만, 거기에 아르페지오나 독특한 오픈코드(Open Chord) 배킹에 의한 방법으로 당시로선 보다 현대적인 연주를 들려주었다. 기계적으로 무척 세련되고 정교하며 수준 높은 포크록에, 끈끈한 블루스를 가미하고, 이 모든 것에 도전적이며 야수적인 헤비메틀 사운드를 도금한 것, 그것이 바로 레드 제플린 시절에 그가 추구한 기타 세계였다.
한편 어쿠스틱 기타를 별로 연주하지 않던 동시대의 헨드릭스나 제프 벡 등에 비한다면 그는 일렉트릭 기타 이외에도 어쿠스틱 기타적 상상력을 넓혔다고 평가된다. 이외에 그는 기타솔로시 간간 미스톤을 내는 기교적인 단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지미 페이지는 기타리스트도 기타리스트지만 그보다는 뛰어난 작곡가, 어레인저로써의 역량이 더욱 크게 빛을 발했다고 보여진다.
3. 지미 헨드릭스
“우리 밴드의 음악은 전자기타로 된 종교음악이다. 영혼을 때려서 영혼을 열게 하는 일종의 충격요법이랄 수 있다.”
록 기타시대를 연 불세출의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는 1942년 11월 27일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태어났다. 지미 헨드릭스의 아버지는 탭 댄서였고 어머니 루실(Lucille)은 알콜 중독자였다. 이들 부모는 지미가 7살 때 헤어지고, 지미는 그 때문에 사랑이 결여된 빈곤한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해야 했다. 어느 날 지미는 아버지로부터 우쿠렐레를 선물받게 되는 데 이것이 그에게 있어선 최초의 현악기와의 만남이었다.
58년에 어머니 루실이 알콜중독과 결핵으로 병원에서 사망하자 지미는 그 충격으로 더욱 음악에만 몰두하였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지미는 기타연주를 계속했다. 하지만 그는 학교에서 공공연히 약물을 복용해대는 문제아였고 오로지 기타만 쳐댔다. 결국 그는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만다. 이후 지미는 낙하산 병으로 군에 입대했는데 여기에서도 ‘Casuals’라는 밴드를 조직해 연주를 계속하였다.
제대 후 지미는 65년까지 리틀 리처드의 보조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며 이름을 알렸고, 기타리스트 스티브 크로퍼(Steve Cropper)와 음반을 녹음하기도 했다. 이러한 지미의 명성은 66년경으로 오면 더욱 높아져, 당시 명 기타리스트로 이름을 날리던 마이크 브룸필드나 에릭 클랩튼 등에 비교되기도 했다. 이 당시 지미의 연주를 보던 사람들 가운데엔 ‘프랑스의엘비스 프레슬리’라 불리우던 쟈니 할러데이도 있었다. 쟈니는 지미를 보곤 자신의 파리 공연에 오프닝으로 출연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지미는 이를 흔쾌히 수락하고 멤버를 찾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달려온 인물은 노엘 레딩(Noel Redding)이었다. 원래 노엘은 기타리스트로써 자리를 구하러 왔다가 지미와 한번 연주해보곤 즉시 기타를 포기하고 베이스로 포지션을 바꾸었다. 또한 미치 미첼(Mitch Mitchell)은 노엘보다는 더욱 큰 확신과 재능을 갖춘 드러머였다.(당시 19살이었던 그는 3살 때부터 드럼을 연주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멤버를 규합한 지미는 3인조 록 트리오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Jimi Hendrix Experience)를 출범시키고 3일간의 연습을 거친 후 쟈니 할러데이의 유럽공연에 참가하였다.
공연 후 이들은 ‘Polydor’레이블과 계약하고 역사적인 데뷔작 [Are You Experienced?]를 발표하였다. 이 앨범에서 지미는 충격적인 사이키델릭 하드록 기타를 들려주어 그는 금새 음악계 최고의 화제대상이 되었다. 화려한 데뷔를 장식한 지미는 계속해서 기타사에 길이 남을 걸작 앨범들을 발표해 역사상 최고의 대 기타리스트로 평가받기에 이른다.
하지만 지미는 여러 가지 악성 루머들 속에서 그룹을 해체시키고 드러머 버디 마일즈(Buddy Miles), 베이시스트 빌리 콕스(Billy Cox) 등과 새로운 밴드를 출범시키고 70년에 [The Band Of Gypsys]라는 데뷔앨범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새롭게 출발한 그룹 ‘밴드 오브 집시’는 지미의 죽음-70년 9월 18일 약물중독으로 사망-으로 제대로 활동도 못한 채 없어지고 말았다.
지미 헨드릭스는 명실공히 역사를 바꾼 대 기타리스트이다. 그는 흑인특유의 끈끈함이 배어 있는 블루노트 펜타토닉을 기반으로 강렬하고 공격적이며 격한, 그리곤 외로운 명 프레이즈들을 남겼다. 그의 피킹은 힘이 없는 듯 하면서도 격정적이며, 핑거링은 아무 생각 없이 기분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으면서도 잘 정돈된 질서가 있다. 또한 블루스 락 기타리스트답게 여러 가지 핑거 테크닉을 다양하게 구사한 바 있다.
솔로의 경우 1현에서 2현으로 프레이징 되다가도 순간적으로 아무 의미 없이 오픈코드에 의해 줄 전체를 피킹해 버리는 비형식적인 면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리고 'Voodoo Chile' 등에서와 같이 커팅을 이용한 프레이즈도 즐겨 썼고, 반음튜닝에 의한 갖가지 폭발적인 벤딩과 비브라토 아밍을 구사하였다. 로버트 존슨으로부터 B.B.킹이 블루스를 넓혀갔다면, 지미 헨드릭스에 와서 그것은 프로그레시브한 모티브를 얻어 그 방법적 틀이 넓어졌다고 볼 수 있다.
4. 에릭 클랩튼
“프레디 킹에서 시작하여 B.B.킹으로 이어지는 스타일들을 익히며 내 연주를 다듬어왔다.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들의 체취가 내 연주에서 숨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에릭 클랩튼은 1944년 3월 30일 영국 서리주 리플리에서 태어났다. 15살 때 할아버지로부터 어쿠스틱 기타를 선물 받아 기타를 시작한 그는 척 베리, 보 디들리, 블라인드 레몬 제퍼슨, 로버트 존슨, 스킵 제임스 등을 들으며 기타를 익혔다.
그는 한때 킹스턴 아트 스쿨에 다니면서 디자이너를 꿈꾸었으나 기타가 더 재미있어 63년 9월 루스터스(Roosters)에 가입하였다. 그후 케이시 존스&더 엔지니어즈(CaseyJones&The Engineers)를 거쳐 야드버즈에 가입해 약 1년반 정도 활동하다 존 메이욜 블루스브레이커스(John Mayall’s Bluesbreakers)에 가입해 블루스 기타리스트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66년 7월에는 슈퍼 록트리오 크림(Cream)을 결성해 'Sunshine On Your Love', 'White Room', 'Spoonful' 등 많은 명곡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크림도 오래가지 못하고 68년 11월 앨버트 홀에서의 고별공연을 끝으로 해산하고 만다.
이후 그는 스티브 윈우드, 릭 그레치 등과 함께 블라인드 페이쓰(Blind Faith)를 결성해 셀프 타이틀의 데뷔앨범을 발표하고 록 계의 비상한 주목을 받지만 이 그룹도 얼마가지 못해 해산되었다. 블라인드 페이쓰 후에도 델라니&보니, 레온 러셀, 스티브 스틸스, 조지 해리슨 등과 함께 음악을 하다가 70년 데렉 &더 도미노(Derek & The Dominos)를 조직해 [Layla & The Other Assorted Love Songs]라는 명반을 발표했다. 특히 이 앨범에는 듀언 올맨 등이 함께 해 에릭 클랩튼과 트윈 슬라이드 기타 연주를 들려주어 크게 주목받은 바 있다.
그러나 72년에 밴드는 해체되고 이후부터 그는 약물 중독으로 침체기를 보내다가 놀라운 의지력으로 다시 음악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74년 [461 Ocean Boulevard]란 앨범으로 재기에 성공하고, 계속해서 그는 여러 장의 솔로앨범을 발표했다. 'Lay Down Sally', 'Wonderful Tonight' 등은 당시 그의 인기를 대변해주는 곡들이다. 81년 3월엔 [Another Ticket]이 빅 히트를 장식하고, 85년에는 드럼의 필 콜린스와 제프 포카로, 베이스의 네이던 이스트와 도널드 “덕” 던, 기타의 스티브 루카서 등을 초빙해 [Behind The Sun]을 발표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한편 88년에는 에릭 클랩튼의 역사를 집대성한 6장 짜리 앨범 [Crossroads]를 공개했고 90년대로 들어와선 언플러그드 사운드를 세계적으로 유행시켜 어쿠스틱 기타가 주도하는 음악을 빌보드차트 등 유명 히트차트에서 맹위를 떨치게 했다. 그리고 'Tears In Heaven' 등과 같은 감미롭고 서정적이며 편안한 멜로디가 담긴 노래들을 발표해 인기 최정상의 아티스트로서 군림하고 있다.
에릭 클랩튼은 우선 피킹의 액센트 조절이 뛰어나다. 곡의 성격에 따라 멜로디에 힘을 넣는 방법이 각기 다른데, 이 피킹 조절이야말로 그만의 빼어난 리듬감과 특유의 그루브를 창출하는 핵이 되고 있다. 거기에 그의 핑거링은 부드럽고 자연스런 포지션 이동을 통해 섬세하며 아름다운 음을 배열해 간다. 이것은 그의 능란한 초킹과 해머링, 풀링, 슬라이드의 효과적인 쓰임에 의한 것이랄 수 있다. 'Why Does Love To Be So Sad', 'Deserted Cities Of The Heart', 'Double Trouble', 'Lay Down Sally'-이 곡은 특히 초킹의 쓰임을 주목해서 들어보라-등이 그 대표적이며 와와 프레이즈에 의한 다양한 바리에이션 솔로도 'White Room', 'Tales Of Brave Ulysses', 'Presence Of The Lord' 등에서 들을 수 있다.
이외에 부드러운 멜로디와 음정의 정확함이 돋보이는 다채로운 벤딩 프레이즈와 런주법도 그의 장기인데, 이후 이러한 주법은 70년대의 하드록 기타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Do What You Like'에서의 도리안 스케일에 기반한 색다른 솔로처럼 실험적인 테마 전개에도 관심을 보인 바 있다.
어쨌든 ‘에릭 클랩튼’이라는 이름은 그 부드럽고 정확한 피킹이 만들어내는 포근하고 화사한 톤과, 노래하는 듯 자연스런 라인, 그리고 독자적인 생명력을 지닌 리듬 등으로 록기타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중의 하나로서 기억될 것이다.
5. 제프 벡
“난 랙 계열의 이펙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들은 가공할 사운드를 만들어주지만 일률적으로 비슷한 소리를 뽑아낸다. 음악인의 퍼스널리티를 섬세하게 표출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제프 벡은 언제나 음악에 대한 새로운 모험과 시도를 통해 자신의 매너리즘을 경계해 왔다. 따라서 그의 연주는 신선도라는 측면에선 데뷔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음의 낭비가 전혀 없이 핵심만 찌르는 실험적인 재즈퓨전 기타의 파이오니어 제프 벡은 1944년 6월 24일 영국 웰링턴에서 태어났다. ‘Junior At School’에 다닐 무렵에 레스폴의 음악을 듣고 기타를 잡게 된 제프는, 62년 ‘Night Shift’의 기타리스트가 되면서부터 프로 뮤지션의 길을 걸었다.
그러다가 65년에 에릭 클랩튼의 후임으로 그룹 야드버즈에 가입, 세인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야드버즈에서 제프는 피드백 사운드를 도입한다거나 그외 실험적인 연주패턴으로 영국과 미국에서 가장 알아주는 기타리스트중의 하나로 부상했다.
새로운 음악을 해보고 싶었던 제프는 이번에는 야드버즈를 탈퇴하고 로드 스튜어트, 론 우드 등과 함께 제프 벡 그룹(Jeff Beck Group)을 결성하였다. 하지만 하드록 블루스사에 길이 남을 앨범 2장을 내곤 69년 9월에 돌연 그룹을 해산시켜 주위를 놀라게 했다.
71년에 제프는 코지 파웰 등과 함께 제2기 제프 벡 그룹을 결성해 역시 2장의 앨범을 발표하고 다시 그룹을 해체시켰다. 그룹 해체 후 제프는 이번에는 헤비 드러머 카마인 어피스, 베이시스트 팀 보거트와 함께 락 역사 불멸의 슈퍼그룹인 벡 보커트 앤 어피스(Beck, Bogert & Appice)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이 록트리오도 오래가지 못하고 2장-1장은 일본에서의 실황을 수록한 비공식 라이브임-의 앨범을 끝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이 그룹 저 그룹을 많이 옮기던 제프는 자신의 성격상 밴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고 이후부터 솔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 최초의 변신이 바로 역작 [Blow By Blow]이다. 75년에 발매된 이 앨범은 재즈적 어프로치에 락 비트를 혼합한 재즈퓨전 기타 사운드를 완성해, 제프의 관심사가 이젠 하드록 블루스 소울 등에서 재즈로 넘어간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앨범을 시발로 제프는 계속해서 재즈록 역사에 비중 있게 자리 매김될 명반들을 터트리며 본격 재즈 퓨전 기타리스트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재즈 퓨전도 부족해 85년의 앨범[Flash]에선 뉴웨이브 댄스사조도 수용한 바 있다. 제프의 다양한 음악적 시도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89년의 앨범 [Guitar Shop]으로 또 한번 음악계 전반을 뒤흔들었다. 드러머 테리 보지오와 키보드 주자 토니 하이머스를 불러 만든 이 솔로 작은 다채로운 리듬탐색에서 어프로치, 테마 등 모든 면에서 기성 기타리스트들을 고무시킬만한 대작이었다.
제프의 이와 같은 도전적인 실험성이 93년에는 전혀 색다르게 변신을 하는 데, 빅 타운 플레이보이스(Big Town Playboys)가 그것이다. 제프는 여기에서 빅밴드 형태의 멤버구성으로 50년대의 록큰롤 체취를 강하게 풍기는 추억의 사운드를 연주하였다. 이 역시 언제나 예측을 불허하는 제프 벡에게서나 가능한 대 변신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99년에는 테크노 사운드와 블루지한 기타를 접목한 [Who's Else]라는 앨범을 공개해 다시 한번 주위를 놀라게 했다.
제프는 음의 구조를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이지적이고 냉철한 감각 아래 핵을 관통하는 영감(Inspiration)으로 충만된 연주를 들려준다. 하이템포의 셔플리듬을 좋아하는 그는, 같은 코드 톤으로 연주가 흐르다가도 갑자기 코드 체인지 시켜버려 의표를 찌르는 충격적인 시도를 자주 하곤 한다. 또한 9th가 가지는 긴장감을 솔로 끝부분에 배치하여 특이한 이미지를 낳기도 한다.
제프는 즉흥성이 뛰어나 이 애드립에서가 아니면 도저히 이 곡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뛰어난 솔로를 전개한다. 'You Never Know'에서 원 코드로 전개되는 솔로나 'Come Dancing'에서처럼 7th가 얹혀지는 치밀한 악상전개, 그리고 'Guitar Shop', 'Big Block' 등은 가히 ‘영감’의 기타라고 할 만한 것이다.
사운드 메이킹에 있어서도 제프는 고정된 칼라를 싫어하고 항상 변화 있는 톤을 추구해 왔다. 야드버즈 시절엔 텔레캐스터에 Vox 등의 퍼즈 박스와 에코를 썼고, BB & A에선 레스 폴, 펜더 스트라토캐스터에 토크박스를, [Blow By Blow]에선 옥타버를, [Wired]에선 코러스와 플랜저를 각각 사용해가며 각양각색의 사운드에 도전했다. 그의 위와 같은 변화무쌍함이야말로 록 기타 파이오니어로서의 제프 벡의 모습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스트라토캐스터와 텔레캐스터 모두의 오리지널리티를 가장 잘 뽑아내는 기타리스트 중의 하나로도 유명하다.
이와 같이 이들은 독자적으로 자기만의 플레이를 완성 시켰기에
세계 몇대 기타리스트이니 하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그들의 음악과 플레이를 즐기는 것이 좋지요.
지미 헨드릭스가 세계 3대 기타리스트에 끼지 못한 이유는 시대적 상황이라 보면 됩니다.
당시 세계 롹씬은 영국 음악이 강세를 이루었고, 백인들이 주류였습니다.
그렇기에 미국출신의 흑인이었던 지미 헨드릭스가 저평가 받았던건 당연한 것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