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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군에서 가장 많은 홈런을 친 사나이

조셉 정 |2008.08.28 13:43
조회 170 |추천 0

 

 

89회 전국체육대회 예선 2차대회가 열린 6월 19일 대구구장. 하나뿐인 대구 대표 자리를 놓고 맞붙은 상원고와 경북고의 경기는 섭씨 30도가 넘은 초여름 더위만큼이나 뜨거웠다.

3회까지 0-0으로 팽팽하게 맞선 가운데 4회말 상원고가 2사 만루의 득점 기회를 잡았다. 마운드로 올라간 경북고 강정길 감독이 투수 교체 사인을 냈다. 상원고 박영진 감독도 바빠졌다.

그런데 상원고 벤치에서 다른 누군가가 타석으로 향했다. 지난해 롯데에서 선수생활을 끝내고 그해 11월 모교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김승관(32) 코치였다.

김코치는 투수가 교체되는 동안 타석에 있던 김정수를 격려하고 작전을 전달했다. 김코치의 머릿속에는 15년 전 자신의 고교 시절이 스치듯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좌승엽 우승관’

1993년 대구상고(현 상원고)는 대통령배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을 거머쥐었다. 1980년대에 단 한번도 전국대회 우승을 하지 못하며 명문고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던 대구상고로서는 20년 만에 차지한 대통령배였다.

더 기쁜 사실은 최우수선수상을 받은 김승관이 아직 2학년이라는 것이었다. 오른손 타자 김승관은 같은 지역의 명문 경북고의 동갑내기 왼손투수이자 4번 타자인 이승엽과 함께 ‘좌승엽 우승관’이라 불리며 대구 지역 최고 고교선수로 꼽혔다.

1995년 졸업과 함께 김승관은 지역 연고지명으로 삼성에 입단했다. 계약금은 9천5백만 원으로 고졸 신인으로서는 큰 액수였다. 당시만 해도 고졸 선수들이 흔하지 않았다. 계약금도 대졸 선수들이 훨씬 많았다.

삼성은 베테랑 1루수 김성래를 대신할 선수로 김승관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이승엽이 타자로 전향하면서 김승관의 미래는 조금씩 꼬이기 시작했다.

1995년 ‘좌승엽’은 121경기에서 13개의 홈런과 2할8푼5리의 타율로 프로 첫해에 자리를 잡았다.

신인왕은 차지하지 못했지만 타자 이승엽이 괜찮은 선수라는 걸 각인시킨 한 해였다. ‘우승관’은 52경기를 뛰었다. 5개의 홈런을 쳤고 타율은 2할9푼8리였다. 다만 김승관의 기록은 1군 기록이 아닌 2군 기록이었다.

1996년 백인천 감독이 삼성에 부임했다. 삼성 타선은 상당히 노쇠해 있었다. 이미 대타요원이 된 이만수를 비롯해 류중일, 강기웅, 이정훈, 이중화 등 대부분의 선수가 30대 중반이었다.

백인천 감독은 젊은 타자들을 중용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프로 2년째인 이승엽은 곧 양준혁과 함께 팀을 대표하는 타자로 성장해 나갔다.

이승엽뿐만 아니라 신동주, 김한수, 김태균, 김재걸 등 20대 선수들이 세대교체의 주역으로 나섰다.

김승관 역시 기회를 얻었다. 김승관은 3할9푼5리로 2군 남부리그 타격 1위에 올랐다. 타점(37)도 1위였고 홈런(4개)은 3위였다.

8월 20일 김승관은 1군에 오르자마자 프로 데뷔 후 처음 선발로 출전했다. 6번 타자에 1루수였다. 이승엽은 그때 주로 좌익수로 출전하고 있었다.

김승관은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프로 데뷔 첫 안타를 포함해 2개의 안타를 쳤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삼성의 6번 타자 1루수는 김승관이었다.

68타수 19안타(타율 .279)의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1군에서 시즌을 마쳤다. 19개의 안타 가운데 11개가 2루타였다. ‘좌승엽 우승관’이 2년 만에 되살아나는 듯했다.

2군의 이승엽

2사 만루 상황에서 김정수는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방망이를 돌렸다. 초반이지만 선취점이 중요했다. 투수들은 좋은 구위를 보였고 야수들은 깔끔한 수비를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볼카운트 1-3에서 경북고 투수 김종화의 공이 김정수의 몸쪽으로 몰렸다. 김정수는 피하지 않았다. 몸에 맞는 공으로 상원고는 귀중한 선취점을 냈다. 김승관 코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원고는 그러나 추가점을 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결국 7회초 경북고 김상훈에게 동점 3루타를 맞고 말았다. 역전 위기를 맞은 상원고 벤치는 다급해졌다. 1997년 김승관의 처지만큼이나 답답한 상황이었다.

1997년 21살의 김승관은 장밋빛 미래가 보이는 듯 했다. 전해 성공적인 1군 무대 데뷔에 이어 전지훈련에서도 좋은 평가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시범경기 결과도 좋았다. 3할3푼3리로 타격 7위에 올랐다.

팀 내 2위 기록이었다. 당연히 1군에서 시즌을 시작할 줄 알았다. 그러나 삼성의 주전 1루수는 이승엽이 됐다. 김승관은 대타 요원도 아니었다. 2군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백인천 감독은 “김승관의 타격 자질을 인정한다”고 했지만 이승엽의 수비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1루수로 기용했다. 이게 김승관이 2군으로 내려간 이유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야구를 시작한 이후 성공가도를 달려 온 김승관에게 처음으로 닥친 시련이었다.

몸은 야구장에 있었지만 마음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5월에 간신히 1군에 올라왔지만 대타로 한두 타석에 나서는 게 전부였다. 의욕이 떨어진 상태에서 1군에 올라갔으니 결과는 뻔했다. 다시 2군행이었다.

한번 2군에 내려오자 1군에 다시 올라가는 게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의 포지션인 1루에는 이승엽이라는 한국 최고의 타자가 있었다.

이승엽이 있는 한 김승관에게는 기회가 있을 수 없었다. 외야수 훈련도 했지만 1군으로 올라갈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우승에 목말라 있던 삼성은 끊임없이 외부에서 선수를 영입했다.

그렇다고 다른 팀으로 이적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구단은 트레이드를 할 때 영입한 선수의 실패보다 내준 선수의 성공을 더 두려워한다.

그래서 트레이드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김승관 역시 고교 시절부터 재능을 인정받은 유망주라 내주기 아까운 선수였다.

2군 생활이 길다는 건 곧 은퇴 위기를 뜻한다. 삼성 2군에서 좋은 성적을 냈던 하춘동이나 김수관, 황성관 등도 1군에서 성적을 내지 못하고 2군으로 내려온 뒤 오래지 않아 선수생활을 그만뒀다.

대부분은 자의가 아닌 방출에 의한 은퇴였다. 김승관은 1군에 오르지 못했지만 방출 명단에 오르지 않았다. 김승관 자신도 삼성 구단도 아직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김승관은 2군에서 꾸준히 3할을 치며 홈런과 타점 순위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혹자는 그를 ‘2군의 이승엽’이라고 불렀다. 삼성에 입단한 뒤 김승관은 1군에서 92경기 만을 뛰었다.

마지막 기회

상원고는 7회초 1사 3루의 역전 위기를 잘 넘겼다. 3루 땅볼과 삼진으로 추가 실점을 막았다. 상원고는 올해 번번이 막판 고비를 넘지 못하고 지역 예선 통과에 실패했다. 이번에도 되풀이할 수는 없었다.

8회말 공격에서 상원고는 2번 타자 김대환이 우익수 키를 넘기는 장타를 터뜨려 다시 한 점을 냈다.

상원고는 2-1로 한 점 앞서 나갔다. 1차 예선에서 경북고와 대구고를 꺾고 우승한 상원고는 2차예선에서도 우승해 전국체육대회에 나가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아직까지 올해 전국대회에서 한번도 8강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대학은 전국대회 8강을 특기자 입학 조건으로 걸고 있다. 상원고에게는 전국체육대회가 소중한 기회다.

2004년 프로 10년째가 된 김승관은 두 번의 기회를 잡았다. 첫 번째는 이승엽의 일본행이었다. 이승엽이 지바 롯데 마린스로 떠나며 김승관은 기회를 잡았다.

박흥식 타격 코치는 “(김)승관이는 타격 자질이 있다. 다만 기회가 적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삼성의 1루수는 이번에도 김승관의 차지가 아니었다. 양준혁이 외야수에서 1루수로 수비 위치를 옮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첫 번째 기회가 날아갔다.

김승관에게 두 번째 기회가 왔다. 7월 12일 삼성과 롯데는 김승관, 노장진을 박석진, 김대익과 맞바꾸는 2대2 트레이드를 했다.

실질적으로는 노장진과 박석진의 트레이드였다. 믿을 만한 마무리 투수가 없었던 롯데는 삼성에서 무단이탈로 눈엣가시가 된 노장진을 받아들여 뒷문을 보강하려고 했다.

삼성은 부진의 기미를 보인 김현욱을 대신할 잠수함 투수로 박석진이 필요했다. 김승관과 김대익은 비중이 낮은 트레이드 대상이었다.

그러나 김승관에게는 기회였다. 삼성은 새로운 외국인선수로 오른손 내야수인 멘디 로페스를 영입했다.

김승관의 입지는 더더욱 좁아져 있었다. 롯데는 마해영이 떠난 이후 1루를 맡을 오른손 거포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이대호는 힘은 좋으나 정교한 타격이 아쉬운 타자였다. 수비 위치도 3루수였다. 여러 모로 김승관에게 득이 되는 트레이드였다. 양상문 롯데 감독도 김승관의 장타력에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김승관에게 트레이드는 기회가 아닌 충격이었다. 인터뷰에서 “새 팀에 가서 새로운 기분으로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지만 그의 진짜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푸른 피가 흐른다는 양준혁 못지않게 김승관도 영원한 ‘삼성맨’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승관은 “어렸을 때부터 뛰고 싶은 구단은 삼성뿐이었다”라고 말했다. 게다가 전날 김승관은 프로 통산 2호 홈런을 쳤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더 잘 해보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이적이 결정됐다.

이미 트레이드 얘기가 흘러나왔던 노장진과 달리 김승관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없었다.

이적 후 첫 경기인 7월 20일 사직에서 열린 현대전에서 선발 1루수로 출전해 3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 그 이후에도 붙박이 1루수는 아니었지만 많은 기회가 주어졌다.

데뷔 이래 가장 많은 59경기에 나가 126타석에 들어섰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무장이 안 된 상태에서 좋은 성적이 나올 리 만무했다. 126타수 28안타(타율 0.222)의 초라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다.

2006년과 지난해 이대호가 1루수로 뛰면서 마지막 기회는 완전히 사라졌다. 롯데는 지난해 10월 2군 남부리그 홈런왕(12개)인 김승관을 방출했다.

그렇게 김승관은 13년의 프로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2군 통산 최고기록인 557경기 출전, 87홈런, 377타점, 571안타, 타율 3할3리, 353사사구를 남긴 채.

새로운 시작

상원고는 8회와 9회 경북고의 공격을 깔끔하게 막아 2-1로 이겼다. 대구고만 이기면 전국체육대회에 나갈 수 있게 됐다. 경기를 끝낸 상원고 선수들은 어렵게 이겨서인지 안도감과 긴장감이 뒤섞인 묘한 표정이었다.

김승관 코치 역시 “어려운 경기였다. 내가 나가서 뛰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경기 전 선수단 숙소에서 만난 김코치의 손바닥에는 여전히 굳은살이 보였다. 은퇴한 지 6개월밖에 안돼서일까. 아직은 선수 김승관이 더 어울려 보였다.

그때 김코치는 등번호 35번을 단 김정수를 가리키며 “메이저리그에 갈 수 있는 선수”라고 말했다.

김정수는 2학년이지만 중심 타자인 3번을 맡고 있다. 김코치가 대통령배대회 최우수선수가 된 것도 2학년 때였다. 김코치의 선수 시절 등번호도 35번이었다.

15년 후배이자 제자인 김정수가 자신을 뛰어넘길 바라는 김코치의 마음이 엿보였다. 김승관은 프로 13년생 2군 홈런왕이 아닌 초보 고교 코치로 거듭나고 있었다.

 

출처 : SPORTS2.0 제 109호(발행일 2008년 6월 23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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