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Eminem
본명: Marshall Bruce Mathers III
생년월일: 1972년 10월 17일
국적: 미국
태어난 곳: 미국 미주리 Kansas City
자란 곳: 미국 미시간 디트로이트
가족: 아버지 Marshall Mathers Jr.
어머니 Deborah Mathers - Briggs
남동생 Nathan (엄마만 같음)
결혼: 부인 Kimberly Scott
(중학교때 만남~결혼~2000년 8월 이혼~2000년 12월 재결합~2001년 3월 다시 이혼)
딸 Hailie Jade Scott (1995년 12월 25일생)
학력: Osbourne High School
Lincoln High School in Warren (1986-1989)
그룹활동: D12, Outsidaz, The New Jacks, Sole Intent
키: 175cm
몸무게: 68kg
좋아하는 음료수: 마운틴 듀
어릴적 장래희망: 만화가
영화'8mile' 개런티: $1,300,000 (약 16억원)
가장 소중한 것: Hailie (딸)
* 그의 이름 Eminem은 본명 이니셜인 M(arshall)& M(athers)에서 유래한 것이다
* 그는 왼손잡이이다
* 그는 머리카락을 직접 다듬는다
* 그는 안경을 쓴다
* 그는 무릎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 그는 좋아하던 삼촌 Ronnie가 죽은 후 한동안 랩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 그는 부인이었던 킴이 다른 남자와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홧김에 총을 겨눈 혐의로 체포되었던 적이 있다. 이혼 후 에미넴도 몇몇의 여성들과 염문을 뿌렸고, 전부인 킴도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기도 했으나, 딸 헤일리의 장래를 위해 재결합을 한다는 소문도 돌고 있다
* 그의 귀여운 딸 헤일리의 장래희망은 배우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 그의 팬은 전세계 각계각층에 고루 퍼져있다. 영국의 윌리엄 왕자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에미넴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차에 에미넴의 CD를 구비해놓고 즐겨 듣는다고 한다
* 그는 이복동생인 Nathan의 생일 선물로 현대자동차의 소나타를 사주었다고 한다
1974년 10월 17일 미주리주 캔자스 시티. 동네 밴드의 리드 싱어였던 데비 넬슨(Debbie Nelson)은 15살이 되던 해 역시 같은 밴드 멤버였던 마샬 브루스 매더스 2세(Marshall Bruce Mathers II)와 결혼했고, 곧 아이를 출산한다. 그 아이의 이름은 아버지를 따라 마샬 브루스 매더스 3세(Marshall Bruce Mathers III)라고 부르기로 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아이가 생후 6개월이 채 되기 전에 어디론가 떠나 버렸으니까.
에미넴이 어머니 데비 매더스(Debbie Mathers)에게 들어야 했던 이야기다. 그의 인터뷰, 가사 등을 통해 언급된 어머니 데비의 모습은 도리어 그에게 천백만 달러짜리 소송만을 안겨주었고, 랩퍼 아들을 둔 어머니답게 디트로이트의 로컬 랩퍼들을 고용해 ID-X라는 그룹을 조직, 자신의 대변인 역을 삼는 것은 물론 최근에는 에미넴의 딸 헤일리 스코트(Hailie Scott)에게 괴 편지를 보내는 등 정신 질환에 가까운 증상을 보이고 있다.
에미넴이 유명해진 후 그에 기생하려는 사람은 비단 어머니만은 아니었다. 이미 2000년 6월 4일 클럽 주차장에서 다른 남자와 키스하는 모습에 격분한 에미넴에게 총기 이용 살인미수에 의한 2년의 보호 감찰과 5년의 징역 선고를 안긴 전력과 자녀 양육 등의 문제로 천만달러 소송을 거쳐 이혼에 합의한 전처 Kimberly Scott, 그리고 1집 수록곡 'Brain Damage'를 통해 명예 훼손을 당했다며 에미넴을 고소한 동네 불량배 디안젤로 베일리(DeAngelo Bailey)까지. 어디 그 뿐인가? 10여년 전 삼촌 로니의 비트 박스에 녹음한 에미넴의 랩 송의 저작권을 주장하는 외할머니 베티 크레신(Betty Kresin), 채 걸음마를 하기도 전에 캘리포니아로 떠나버렸지만, 그가 유명해진 후 텔레비전 쇼에서 아이의 사진을 내밀며 애정을 표시하는 아버지 마샬 매더스 주니어(Marshall Mathers Jr.)까지. 에미넴은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이미 존재 가치를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딸 헤일리의 진정한 아버지가 되길 갈구하는지도.
The Wonder Years
미시간의 링컨(Lincoln) 고등학교는 에미넴에게 그다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다. 캔자스 시티와 디트로이트를 오가며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그가 결국 17살이 되던 해 학교를 그만두기까지, 흑인(Afro-American)이 아니란 이유로 그는 학교에서 단지 흑인들의 머리스타일이나 흉내내는 힙 합 워너비(wanna-be)로 낙인이 찍히며 한물간 바닐라 아이스(Vanilla Ice)와 비슷한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그 시절 그들의 흑인 집단 이기주의(negritude)는 비록 흑인 못지 않게 훌륭한 랩 스킬을 갖추고 있는 에미넴일지라도 감당하기 힘든 편견의 벽이었나 보다. 하지만 이러한 시기에도 그에게 꿈을 꾸게 한 유일한 것은 랩이었고, 학교를 그만둔 후에도 디트로이트의 클럽과 여자 친구 킴벌리와 함께 친구들 집을 전전하며 후 일을 도모했다. 하지만 로컬 신에서 발매한 처녀작 [Infinite](1997/Web)와 그가 속해 있던 그룹 소울 인텐트(Soul Intent)의 싱글 'Fucking Backstabber'는 뉴욕의 QBC(Queens Bridge Clique) 스타일을 모방했다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힘들 정도였고, 이는 오리지널리티를 중시하는 힙 합 필드에서 ‘역시 백인은 안 된다’는 선입견만을 심어줄 뿐이었다. 게다가 킴벌리는 딸과 함께 어려운 생계를 탓하며 떠나버렸고 그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As Eminem Turns Slim Shady
자신을 슬림 셰이디라 명명한 후 그에게 마술처럼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갱스터 랩이 종언을 고한 ’90년대 중반 이후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힙 합 신의 헤게모니를 차지하려는 세력들간의 알력이 어느 정도 조정 국면에 접어들 즈음 대중은 새로운 자극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는 가장 적절한 대안이 되었다. ’97년 LA 랩 올림픽 2위 입상, 캘리포니아의 저명한 힙 합 라디오 방송 [World's The Most Famous Wake Up Show] 출연, 2003년 [Detox]란 앨범으로 돌아 올 닥터 드레(Dr. Dre)와의 만남, [The Slim Shady EP](1998/Web) 발매, 그리고 [Lyricist Lounge] 투어 참여 등 슬림 셰이디로 벌인 일련의 행적들이 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어두웠던 유년기와 무명 시절의 기억을 단번에 날려버린 [The Slim Shady LP](1999/Aftermath)와 데뷔 첫 주에 176만장을 팔아치운 [The Marshall Mathers LP](2000/Aftermath)가 준 충격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힙 합이 더 이상 소수(minority) 문화 혹은 흑인의 전유물이 아님을, 지금까지 백인 음악인들이 힙 합을 체화하는 과정에서 도식화된 어설픈 백인 지상주의(White Supermacism)에의 오마주(hommage)와는 180도 다른 방향에서 접근된 슬림 셰이디 스타일은 흑인들에게 쿨(cool)한 의식 전환의 경험을, 백인 청년들에게는 1990년대 두 번째 대안의 물결이자 그들의 찬가(anthem)로의 추앙과 열렬한 지지를 이끌어 냈다. 아이들 스타, 스타 시스템이 지배하는 업계의 폐부를 질시하는 한편 사이코 드라마 이상의 파격적 질료와 에토스(ethos)가 난무하는 그의 가사와 뮤직 비디오는 대중에게 언제나 유쾌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또한 닥터 드레의 [2001](1999/Aftermath)에서는 1992년 스눕 독(Snoop Dogg)이 맡았던 것 같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 자신의 레이블 [Shady]를 [Interscope] 산하에 편입시킴은 물론, 디트로이트 로컬 신에서 함께 활약했던 더티 더즌(D-12)과의 데뷔작을 발표하고 이어 [Up In Smoke] 투어에 참여하는 등 활동의 고삐를 늦추려 들지 않았다. [제43회 그래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앨범상'을 아일랜드 밴드 U2에게 내줌에도 불구하고, 2년에 걸쳐 5개 부분에서 수상한 일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이토록 전 세계를 슬림 셰이디적 관점으로 물들여버린 완벽한 엔터테이너이자 언제나 논쟁의 중심에 선 금발 청년(Angry Blonde) 에미넴, 이제 성대한 쇼의 커튼을 올릴 차례다.
Oimusic 2002년 06월, 설윤명
1974년 10월 17일 미주리주 캔자스 시티. 동네 밴드의 리드 싱어였던 데비 넬슨(Debbie Nelson)은 15살이 되던 해 역시 같은 밴드 멤버였던 마샬 브루스 매더스 2세(Marshall Bruce Mathers II)와 결혼했고, 곧 아이를 출산한다. 그 아이의 이름은 아버지를 따라 마샬 브루스 매더스 3세(Marshall Bruce Mathers III)라고 부르기로 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아이가 생후 6개월이 채 되기 전에 어디론가 떠나 버렸으니까.
아버지에 대한 나쁜 기억 때문인지 어머니 데비는 이상한 병에 시달렸다. 아이가 항상 아파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상한 정신 질환을 앓게 된 것이다. 지독히도 가난한 생활과 함께 어머니의 병은 아이의 유년기를 어둡게 했고 대신 아이는 삼촌 로니 폴킹햄(Ronnie Polkingham)을 비롯한 친척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하게 된다. 그 중 아이가 가장 잘 따르던 삼촌 로니는 랩 음악 매니아였다.
로니는 아이를 위해 비트박스를 해주고 잘 나가는 랩 음악과 자신의 랩을 모아 테이프에 녹음해주기도 했다. 아이가 5살이 된 이후로 어머니와 아이 둘은 미시건 주의 디트로이트와 캔자스 시티를 오가는 부랑자 같은 생활을 계속한다. 그러던 와중에 1987년 아이가 13살이 되던 해 비로소 가족은 디트로이트에 정착하게 된다. 아이는 학교에서 왕따 같은 존재였다. 그러한 현실은 2-3달을 주기로 학교를 옮겨야하는 생활의 연속으로 나타났고 친구 하나 변변하게 사귀기 힘들어 점차 학교에서 도태되어갔다. 하지만 이러한 시기에도 아이에게 유일한 꿈을 꾸게 했던 것은 바로 랩이었다. 13살이 되던 해부터 아이는 직접 랩 가사를 적고 녹음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자신의 예명을 이름 마샬 매더스의 두 앞 글자인 'M&M'의 발음에 착안 에미넴 (혹은 에메넴) 이라고 정했고. 자주 가는 학교는 아니었지만 점심시간에는 얼마 되지 않는 친구들 앞에서 랩 배틀(Rap Battle)과 공연을 했고 에미넴이라는 이름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랩은 유일하게 아이가 세상에 인정받는 창구가 되었고 음악 그 이상의 존재, 혹은 그의 전부였다. 12살 때 에미넴은 미래의 부인이자 그의 노래 'KIM'과 'Just The Two Of Us' 등에 단골로 등장하는 비운의 여인 킴벌리 스코트(Kimberly Scott)를 만나게 된다. 랩 음악 이외에는 별다른 낙이 없던 그에게 학교 생활은 답답함 그 자체였고 결국 17살이 되던 해 그는 다니던 링컨 고등학교(Lincoln High School)를 그만두게 된다.
그 후 디트로이트의 클럽을 전전했고 이내 지역 내에서는 꽤 유명한 래퍼로 자리매김되었다. 랩을 업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던 중 삼촌 로니가 권총 자살을 하게 되고 에미넴은 충격으로 한동안 랩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적도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95년 3월, 킴벌리 스코트는 에미넴에게 아이를 가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1995년 크리스마스 에미넴의 딸 헤일리 제이드(Hailie Jade Scott)가 태어난다. 진짜 아버지, 자신의 아버지가 주지 못했던 것들을 딸에게 주고 싶었던 에미넴은 다시 무엇이든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건 다름 아닌 랩이었다.
Oimusic 2001년 02월, 설윤명
음반사로 부터 입수한 영상 자료물을 통해 만나보는 그의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고백들이다. 마치 남의 이야기인 척 툭툭 내던지고 있지만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는 고통스러웠던 지난날들에 대한 분노와 역정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듯 하다. 여러분은 바퀴벌레가 한 두 마리쯤은 안주 삼아 기어다닐 듯한 허름한 대중 음식점 구석 자리에 앉아 있다. 에미넴은 테이블 건너 바로 맞은 편에 반쯤은 풀린 눈을 하고 비스듬히 기대어 자리하고 있고...
자라면서 참 더럽게 많은 어려움을 겪었어. 별로 겪어야 할 필요도 없었던 일들이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보니 겪었던 거지. 그래서 속으로 분노만 쌓여갔다. 난 아직 사람들의 비위 하나 제대로 맞출 줄 몰라. 내가 누구한테 직접적으로 나쁜 감정을 보내는 건 말이야 사람들이 나한테 이제껏 보낸 것들에 대한 보답이라고 보면 돼.
15살의 데비 넬슨은 동네 밴드의 리드 싱어였지. 밴드 멤버 중 한 녀석과 결혼한 그녀는 1975년 10월 17일 마샬 매더스 3세를 낳았고 아기는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어. 사람들이 나에게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어. 병원에서 바꿔쳐진 건 아닌지 모르겠어. 마샬이 태어난 지 반 년만에 아버지란 사람이 내 곁을 영원히 떠나갔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란 사람은 그 후로 줄곧 나랑 연락을 하던지 만나보려고 무던히도 노력을 기울였다고 하더구만. 아버지는 언제나 엄마가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을 했다더라. 사실 엄마는 항상 우울해 했거든. 그리고 몇 년 후 데비는 항상 자기 자식이 아파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상한 병을 앓게 되었어. 그 덕에 마샬은 주로 친척들과 같이 있었단다. 그 때 삼촌 로니와 친해졌지. 제일 친한 친구 같았어, 정말로. 나에게는 유일한 그런 사람이었지.
5살 때 마샬과 데비는 미시건 주의 디트로이트로 이사를 한다. 그 동네에서는 별로 환영을 받지 못했어. 마샬은 동네 애들한테서 매일 괴롭힘을 당했다. 학교 생활도 마찬가지였어. 4학년 때 상급생이 매일 괴롭혔다. 정말 학교 갈 때마다 매일 매일 그랬어. 전에 한 번은 화장실에 붙잡혀 들어가 완전히 죽을 뻔했지.
1983년 겨울 너무 두들겨 많이 맞은 마샬은 열흘간을 혼수상태에 빠진 채로 지냈어. 그런 고통의 나날들이야말로 마샬의 성공을 낳은 밑거름이 된 거야. 1984년 마샬과 데비는 캔사스로 다시 돌아와 로니와 만난다. 로니와 마샬은 시간을 함께 많이 보낸다. 내가 로니를 항상 많이 따랐어. 정말 친한 친구였거든. 로니는 랩 음악을 좋아했다. 로니는 마샬을 위해 ‘비트박스’를 해주고 랩 테이프를 만들어 주기도 했거든. 그 때 ‘이야, 정말 로니는 내가 못하는 걸 잘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 내 나이 9살 되던 해 어느 날 로니로부터 마샬의 인생을 바꿔 놓을 랩 테이프를 듣게 되었어. 정말 충격이었어.
1987년 마샬과 데비는 마지막으로 디트로이트로 이사를 한다. 삼촌을 떠났을 때 내 인생에서는 랩 음악이 전부가 되었어. 하지만 잘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동네에선 감히 하질 못했지.
나이 13살. 마샬이 드디어 랩을 만들고 또 직접 녹음하기 시작한다. ‘에미넴’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거야. 학교에서도 다른 아이들과 랩 대결을 벌였고 돈을 벌기 시작했다. 어떤 애들은 형편없다고도 했지만 잘한다고 생각하는 얘들도 꽤 있었어. 내 나이 15살 되던 해였지? 고등학교 시절 풋사랑의 연인이자 미래의 부인이 될 킴 스코트를 만났다. 나 자신의 첫 랩 그룹을 만들기도 했다. 항상 랩만 하고 싶었기 때문에 학교는 간혹 안 나가기도 했어. 결국 17살 되던 해엔 학교를 그만 뒀다. 지방 라디오 방송에 나가 랩을 하기 시작했지. ‘백인치고는 꽤 잘한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 때부터 이젠 이 길로 정식으로 들어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야.
1992년 여름 로니가 디트로이트에 있는 에미넴을 방문했어. 에미넴은 로니에게 랩에 대한 자신의 꿈을 얘기했는데 로니는 그런 나에게 자신은 랩을 영원히 그만두었다고 얘기해 버리는 것 아니겠어? 로니는 나에게 랩이 허망한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어. 환상이라고 말야. 현실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난 그만 두고 싶지 않았어. 나는 늘 정곡을 찌르는 얘기들만 내뱉었고 사람들은 내 얘기를 듣지 않을 수 없었거든. 어쨌거나 이 일로 인해 밑바닥 생활 2년 안에 겨우 성공의 발판이 마련이 되나 싶더니 마음 속으로는 아주 큰 상처를 입었던 것같아. 그래도 난 래퍼가 되고 싶었어. 랩만 할거고, 랩으로 성공하리라고 자부했었지.
에미넴은 디트로이트의 가장 큰 힙 합 클럽에서 공연을 했다. 첫 공연 때는 엄청난 야유를 받았어. 거짓말이 아니야. 첫 무대에 섰던 그 날 사람들이 얼마나 심하게 말들을 해 대던지. 그래도 에미넴은 꺾이지 않았어. 매주 랩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다시 그 자리로 돌아 왔다. 매주 돌아올 때마다 조금씩 인정을 받기 시작했어. 결국 1년 만에 대회란 대회는 모두 휩쓸기 시작한 거야. 급기야 나 에미넴은 디트로이트의 가장 큰 라디오에서 공연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디트로이트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듣는 라디오였지. 랩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방송이었어. 한가지 확실한 것은 사람들이 나의 랩 가사 말을 들으면서 내 의견에 대해 토를 달거나 부정할 수는 없다는 거지.
데비가 친구의 집에 있는 에미넴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는 계속 울고 있었어. 어떻게 된 일이냐고 했더니 계속 울면서 로니가 죽었다고 하는 거야. 로니는 자살을 했데. 에미넴은 크나 큰 상실감을 느꼈단다. 로니의 테이프를 들으며 며칠이고 방에서 나오질 않았다. 내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어. 먼저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면, 통화를 먼저 했더라면 그런 일은 막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면서.... 결국 나는 랩을 그만두었었다.
1995년 3월 킴이 아이를 가졌다고 말했다. 1995년 12월 25일 헤일리 제이드가 태어나다. 헤일리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야. 나는 진짜 아버지가 되고 싶었어,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 말고. 헤일리가 태어났을 때 정신을 차렸지. ‘내가 정말 뭔가를 해야겠구나, 랩을 다시 해야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
에미넴이 다시 랩을 시작하면서 언더그라운드 힙 합계의 강자로 위치를 굳힌다. 한 음반 제작사가 음반을 내자는 제의를 해 왔다. 앨범을 내는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사람들은 나에게 ‘라디오에 방송될 만한 가사’를 좀 써 달라는 권유를 받았어. 그래서 당시 내가 쓴 곡들은 대부분이 다 긍정적인 가사들이었지, 좋은 곡들 말이야.
1996년 가을 에미넴의 데뷔 앨범이 발매되었다. 앞으로는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아니야, 상황이 전부 악화되었어. 앨범은 상업적으로 완전히 망해버렸어. 대 실패작이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모든 게 무너지기 시작했어. 에미넴, 킴, 헤일리는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쫓겨났지. 내 귀여운 딸내미에게 갈아 입힐 기저귀를 살 돈조차 없었어. 킴은 헤일리를 데리고 에미넴의 곁을 떠나버렸다.
킴이 나를 보면서 그러더군. “너는 남자가 되어 가지고 네 가족 하나 부양을 못하는구나. 넌 남자가 아니야!” 에미넴은 딸도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딸이 있는 곳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되었어. 나는 패배자가 되어 버린 거야. 그래. 맞는 말이지. 그렇게 되고 나니까 아무런 의욕이 없어지면서 그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행동만 나왔지. 그래도 난 약물 과다 복용으로 인해 고통스러웠던 시기를 거뜬히 이겨냈어. 이제 밑바닥까지 다녀왔으니까 위로 올라갈 일만 남은 거 아니냔 말이지.
1997년 1월에 ‘Slim Shady'가 태어났다. ’Shady‘라는 건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아 같은 거야. 길거리에서 강도들을 만났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모르게 용기가 생겨서 그들에게 막 덤비는 것 같은 거지. 앞 뒤 가리지 않고 뛰쳐나오는 자아, 그게 바로 'Shady'야. 그리곤 새로운 랩 곡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주로 에미넴의 과거에 관한 가사를 썼어.
랩을 쓸 때마다 보면 ‘이것도 저것도 세상도 모두 엿먹어라’는 식의 가사들이야. 하지만 이제는 내가 잘하는 것을 찾았으니까 더 이상 그럴 필요는 없겠지. 10개월 간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을 하다가 미국에서 가장 큰 랩 경연대회에 초청을 받는다. 6회전에서 탈락을 하지만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는다. 랩 프로듀서인 닥터 드레를 만나게 된 거야. 처음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될지 몰랐어. 내 계획을 말해야 되는 건지, 팬이라고 해야 되는 건지, 멋있게 보여야 되는 건지.
닥터 드레의 새 레이블인 에 소속이 된 에미넴은 딸에게 바치는 새 앨범 작업에 들어간다. 1999년 2월 23일 앨범 SLIM SHADY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앨범은 빌보드 차트 2위에 데뷔를 했고 3백만 장 이상의 무지막지한 판매고를 올리게 된다. 1999년 9월 에미넴은 드디어 라는 독자적인 레코드 레이블을 갖게 된 거다. 에미넴과 킴은 다시 합쳐 결혼을 했어. 이젠 내 힘으로 킴과 헤일리를 위한 집을 살 수 있었던 거야. 와! 이제부터는 탄탄대로다.
1999년 4월 지와 인터뷰를 하면서 나의 과거와 어린 시절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했어. 어쩌다보니 결국 얘기를 다 하게 되더라고. 결국은 내가 내뱉은 모든 얘기가 고스란히 다 잡지에 실리게 되었어. 1999년 9월에는 데비가 나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어. 자신을 너무 나쁜 사람으로 몰았다며 천 만 불 짜리 소송을 걸었단 말야. 앞으론 절대 엄마를 돌보지 않을 거라고 말한 건 내가 실수한 거야. 얘기를 할 때 내 얘기가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 별로 생각을 안 하거든. 공격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하여간 그게 나야. 소송은 지금도 계속 진행중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계속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일 뿐이야. 내 노래들은 한 90%가 나에 관한 얘기라고 보면 돼.
1999년 11월, 다음 앨범 작업을 위해 스튜디오로 돌아갔어. 앨범 타이틀은 THE MARSHALL MATHERS LP라고 짓기로 진작부터 맘먹었지. 나, 에미넴은 새 앨범이 ‘언론의 자유란 무엇인가를 극한으로 치달아 보여주는 앨범’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밖으로 끌어내는 거야. 논쟁을 하기 위해 하는 것은 아니고 내 가족을 위해 하는 거야. 내 딸은 내가 사랑하는 것을 알고 있고 아빠가 누군 지도 알고 있어. 지금의 내 모습은 나의 성장 배경과 환경의 결과야. 지금의 내가 서 있는 모습에 대해서 나는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