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전> 낯 뜨거운 백일몽.
얼마 전 영화 잡지사이트를 뒤적이다가 시나리오 모니터링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약속시간에 맞춰 일을 시작한 나는 책상에서 시나리오 한권을 몽땅 읽어야 했다. “흐음 이거 쉽지 않은 작업이 되겠군.” 생각하던 나는 처음에는 밑줄도 쳐보고, 내가 가진 얼마 되지 않는 시나리오 작법에 기인하여 시나리오를 읽어 나갔다. 하지만 작품이 극단적인(?) 상업영화를 추구하는 것과 반대로, 이야기는 정말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곳곳에 다른 유명 히트작의 설정을 베낀 흔적이 역력했고, 유치한 전개에 낯이 뜨거울 지경이었다. 심지어 내가 왜 이런 작업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감까지 들었다. 그러다보니 생각보다 작업은 쉽게 끝났다. 족히 2시간 이상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던 시나리오를 한시간만에 독파한 것이다. 내 눈이 빨라져서도 아니고, 글자 포인트가 커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뻔해 보이는 몇몇 시퀀스를 생략하고 읽었더니 난잡한 이야기를 대충 흘겨 읽은 것이다. 그렇게 끝난 모니터링 작업에 대한 피드백은 미안할 정도의 영화에 대한 혹평으로 마무리되었다. 잘못된 점을 지적하기 보다는 그저 그 작품 접으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돈 받기도 미안할 정도였으니 말다한거지.
한국영화의 평균제작비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제외하고 35억에서 40억이라고 한다. “아이구 이런 얼토당토한 시나리오에 30억 이상이 지불된다니...” 이런 생각을 하니 내 머리까지 깜깜했다. 설상가상으로 이 영화사는 지금까지 시나리오에 들인 공과 시나리오 저작권 구입비용으로 든 돈을 생각해서라도 무조건 제작을 강행한다고 하니 같이 읽었던 모두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일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이제 더 이상 예술이 아닌 돈과 돈의 싸움이구나.”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 영화사를 통해 듣고 느껴보니 나름대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마음이 아팠다.
제작자 '강우석'과 영화 <신기전>
얼마 전에 극장에 걸린 <신기전>(神機箭, 2008)을 봤다. 나름대로 모양새가 훌륭한 상업영화였다. 액션신도 멋졌고, 배우들의 능청스런 연기도 볼만했다. 하지만 시나리오 작업당시의 씁쓸함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동북공정과 연이어 터진 이어도 역사왜곡사건 그리고 올림픽을 통해 증폭된 반중심리를 이용해 돈을 벌어보자는 심리가 이 영화의 광고와 이야기에 짙게 묻어있었기 때문이다. 더욱 처참한 건 영화의 황당무계한 설정이 도를 넘어서고 있는 점이다. 그 당시 최강국인 명나라와 조선이 전쟁을 하는데 조선이 개발한 엄청난 위력의 신기전이라는 포탄이 조선을 승리로 이끌고, 두 나라의 전세가 뒤바뀐다는 설정이다. 약소국의 콤플렉스가 폭발해서 진지한 역사영화를 그리려던 조선의 무사들은 한순간에 잔혹한 판타지 영화로 뒤바꾼다. 그 순간 조선인들의 용맹한 모습은 한편의 코미디가 되고, 조선의 왕은 의미 없는 헛웃음만을 지은 체 영화는 끝이 난다. 관객들도 영화에서라도 머리를 조아리는 중국의 사신의 모습에 흐뭇한 듯 보였다. 역사를 맘대로 바꿔버린 연출자의 무책임함이 일정부분 성공한건가?
“영화는 그저 즐기면 그뿐이라고?” 이 영화를 재밌게 본 이들에게는 나도 할말이 없다. 영화란 그저 즐기는 것이란 믿음으로 영화를 본다면 <신기전>은 훌륭하니까. 하지만 영화를 본 후 허무함이 들지는 않는가. 역사를 바꿔서 중국을 제압하는 통쾌함을 얻은 후에 남겨지는 공허함 말이다. 현실에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사건을 과거를 왜곡해 바꾸려는 멍청함을 느낄 수 없는가. 일본과 중국이 계속해서 한국의 역사를 왜곡한다고 욕을 하지만, 정작 우리의 대중문화는 현실을 왜곡한 체 황당무계한 영화를 생산한다. 이 사실을 외국인이 안다고 생각해보라. 난 남의 눈이 무서워 이 영화에 분개한다. 빨리 잊혀졌으면 좋겠다. 영화는 그 나라의 의식과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일 수 있다. 그저 즐기기에는 우리의 의식이 자각하는 자존심을 잃지 않았으면 한다.
한류스타 배용준, 올림픽의 금메달리스트 최민호,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전도연
08년 대한민국은 촛불시위와 미국산 쇠고기 파동으로 균열직전의 상태까지 치달았다. 일본의 독도 도발과 남북관계의 악화가 우리의 마음을 울적하게 했다. 하지만 반전은 있었다. 올림픽에서의 선수들의 투혼은 작은 나라의 큰 힘을 보여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하더라. “한국은 정치만 빼놓고는 그 어떤 나라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라고. 이 말에는 우리의 문화도 그 어느 나라에 비교해서도 못할 것 없다는 자부심이 있다. 우리는 세계를 누비는 한류스타에 열광한다. 우리의 영화가 세계 유수의 영화제 수상소식에 자부심을 느낀다. 약소국이 가진 문화적 힘에 우리가 역사의 고난에도 이겨나갈 수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애국심이 영화제작사에게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저 한탕 챙겨먹으려는 시도 말고, 이왕 30억 이상 쓸 거라면 이 나라의 자존심도 챙겨야한다. 역사를 왜곡하고, 작품의 질을 무시한 영화를 제작한다면 우리는 이제 들 낯이 없다. 역사왜곡을 통한 한 낮의 백일몽으로 웃어본들 변하는 거 하나 없다. 현실의 촛불시위에 정부에 대한 무력한 저항으로 끝나 무너진 자존감을 영화에서 풀려 한는 이중적 심리를 모른척 할 순 없다. 올리픽으로 풀 수 없는 이 나라의 자존감을 빗나간 역사에 대고 원망할 수 없다. 픽션과 논픽션을 오갈 때는 그에 따른 분명한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관객부터가 인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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