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북
수많은 영화의 비교대상이자 그 부분적이고 피상적인 장면만으로도 여러 패러디를 쏟아낸 작품을 이제야 보게 되었다. 30년이나 지난 영화이며 비영어권 영화인데도 한국에서 이토록 자주 회자되는 영화가 또 있을까? 말로만 듣던 양철북을 직접 접하고 난 뒤에 역시 명불허전이란 말이 절로 떠올랐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장 궁금했던 것은 주연배우인 오스카의 정체였다. 정말로 또래의 소년이 연기한 것인지 아니면 왜소증에 걸린 성인이 연기한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눈빛은 이미 성인이었고 골격도 어린 아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왜소증에 걸린 12세 소년이 바로 주인공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소년은 정말 영화 양철북을 위해 태어났던 것일까. 영화는 연출되는 내용 뿐 아니라 외적 상황마저 극적이라 할만 했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양철북을 어떻게 글로 표현할지부터 고민했다. 무거우면서도 유머러스하고 엽기적이면서도 동화 같은 이 영화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직접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양철북에 관련된 텍스트들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 틀림없었다. 역사적 배경과 맞물린 오스카의 가족사를 보면서 작위적이지 않으면서도 절묘한 상황 연출이 놀라웠다. 물론 그것은 소설에서 비롯됐을 테지만, 한 가지 놓치기 어려운 장면 중에 하나가 바로 오스카의 어머니와 두 아버지가 함께 걷는 뒷모습인데 한국에서는 대략 십년 전쯤 그런 장면이 CF로 방영되었던 것 같다.
관객을 불편하게 하는 오스카의 비명소리와 양철북을 두드리는 소리, 오스카는 영화 안에서 글을 배우려고 하다가 어른에게서 배울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듣게 된다. 오스카가 배우려던 언어는 아마도 자기 조국 폴란드의 언어였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에게 지배를 받는 국가의 입장으로서 그것은 불필요했고 위험했다. 마치 카프카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 소수자가 낼 수 있는 언어란 의미를 지닌 분절음이 아니었다. 의미 없지만 유리를 부수는 파괴력을 지닌 비명과 독일군 행렬을 뒤엉키게 만드는 양철북 소리, 이러한 비분절음은 자기 언어를 잃어버린 이들이 드러낼 수 있는 언어였다.
오스카의 어머니 아그네스는 얀에게 성욕을 느끼면서도 알프레드와 함께 산다. 물론 그녀는 폴란드와 독일 사이에 끼어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인물을 상징한다. 그녀가 얀과 나누는 다급한 정사, 나라를 잃은 폴란드인들이 조국을 생각하는 것은 마치 남편 몰래 피우는 바람처럼 은밀하고 격정적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는 결국 혐오스럽게 생각하던 장어를 비롯해 날 생선들을 꾸역꾸역 먹다가 죽게 된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상황을 삼켜야 하는 시대의 괴리감과 모순을 드러내는 장면은 꽤 끔찍한 장면으로 표현된다. 잘린 말의 머릿속을 파먹으려는 장어들과 그런 장어들을 말의 머리에서 쏟아내 먹는 인간들. 영화는 끊임없이 무의미한 것 같으면서도 등장인물이 겪는 심리적 고통과 구역질나는 상황들을 상징적 대체물로서 이어간다.
자라지 않는 소년, 탯줄을 끊어버려 다시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소년은 외할머니의 치마 안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외할머니의 치마는 곧 오스카 생명의 원천이다. 오스카의 외할아버지가 독일군을 피해 잠시 피했던 곳, 불행의 씨앗은 그처럼 우연적이고 충동적으로 찾아온다. 오스카가 만나는 여인들 역시 그렇다. 왜소한 체격 탓에 성욕만 자라난 아이가 동침을 하게 된 첫사랑은 아버지의 차지가 되고 자신의 동생인지 아들인지 모를 아이가 태어난다. 역사의 반복, 누가 아버지인지 모르는 불확실함의 반복, 알프레드는 모든 것을 소유한 것 같지만 그의 손아귀 안에는 언제나 다른 손의 그림자가 서려있다. 전쟁과 약탈로 나라를 점령하는 독일군의 앞잡이였던 그는 결국 나치를 상징하는 단추를 삼키다 러시아군의 총탄을 맞고 죽게 된다. 반면 자유로운 것 같지만 무기력한 얀, 아그네스의 마음을 소유했지만 그녀의 몸을 지켜주지 못했던 그는 죽는 순간 카드놀이를 하며 공포를 잊어보려고 한다. 현실을 잊는 것 밖에는 현실과 맞설 방법이 없던 사내 역시 총살을 당하고 만다.
오스카는 그의 희망이랄 수 있는 동지들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구경꾼이 아니라 구경꺼리가 될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 오스카에게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는 법을 가르쳐준 사내는 두 번째 조우에서 오스카를 설득해 서커스 공연을 함께 하게 된다. 성공적인 공연과 새로 만나게 된 연인, 오스카에게도 남들로부터 환호를 받는 순간이 오지만 그것은 순간일 뿐, 독일이 러시아에 밀리는 사이 그의 연인은 어이없게도 커피 한잔을 고집하다가 포탄에 맞아 죽고 만다. 어처구니없고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소중한 생명은 너무나 쉽게 죽음과 마주치고 오스카는 알프레드의 관이 땅으로 내려가는 상황에서 다시 성장을 시작하게 된다.
양철북은 지배받는 민족이 낼 수 있는 괴성이었다. 저항적 이미지를 담은 북은 인간의 언어처럼 위선적이지도 교묘하지도 않았다. 오스카가 3살 때 치른 생일파티에서 그는 성장을 멈추기로 작정을 한다. 어른이 되어버리면 시류에 영합하게 될지도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와의 타협이 어색한 어린 소년에게 있어서 북은 유일한 의사전달 도구이지만 학교에서 혹은 전쟁이 난 상황에서 그의 북소리는 배척당한다. 힘없는 작은 육체로는 제 뜻을 전달할 수 없는 상황, 양철북은 그래서 울린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울과 웃음이 교차했다. 무겁지만 그만큼 깊이 있는 영화는 오랜만인 것 같았다. 역사가 휘두른 폭력이 만들어낸 영화,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 했던 작은 어른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성장의 고통은 보는 이를 함께 힘들게 하지만 소년이 두들기던 북소리 역시 가슴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