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문을 연 한 멀티숍이 색다른 모토를 내걸었다. '슬로 쇼핑'. 천천히 걸으며, 생각하며 즐기는 쇼핑이 진짜라는 거다. 창문도 없는 백화점이나 지하 마트에서 '정신없이' 쇼핑하는 것이 대부분인 요즈음인데 말이다.
대부분의 대도시에는 '패션 스트리트' 혹은 '하이(high) 스트리트'라 불리는 쇼핑의 거리가 있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나 런던의 옥스퍼드 스트리트, 뉴욕의 피프스 애비뉴, 도쿄의 긴자 같은 거리가 서울의 명동이나 압구정동이라고 칠 수 있겠다. 하지만 파리에는 샹젤리제 외에도 골목마다 독특한 숍들과 갤러리가 들어선 마레 지역이나 고급스러운 숍들이 모여있는 생토노레 같은 거리가 십여 군데 더 있고, 런던에는 이스트 엔드(East End), 뉴욕에는 미트 패킹, 도쿄에는 오모테산도처럼 주류는 아니지만 개성 넘치는 쇼핑의 거리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게다가 이들 쇼핑가의 공통점은 대부분 걸어서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대형 백화점이나 미로 같은 지하 몰(mall)의 형태가 아닌 가로수가 드리워진 길을 한가롭게 걸으며 이 골목 저 골목 작은 가게들을 여유 있게 구경하는 '느린 쇼핑' 거리들이다.
지난주 서울 청담동에 문을 연 '10 꼬르소 꼬모(10 Corso Como)'라는 곳은 그런 이유에서 '가게'라고 부르고 싶다. 지하 1층, 1층, 2층까지 예술 서적과 인테리어 소품, 패션 액세서리와 최신 유행의 옷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규모로 보면 작은 백화점 수준인데 굳이 '가게'라는 소박한 이름을 떠올린 것은 이 매장이 내세우고 있는 쇼핑 철학 때문이다.
가게의 시작은 밀라노의 번화한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한적했던 동네 꼬르소 꼬모라는 길의 10번지였다. 가게 주인이었던 카를라 소차니와 크리스 루스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그림도 감상하고 정원을 거닐다가 쇼핑도 하고 차도 마시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하고 바랐다. 10년 뒤 두 사람의 예상대로 사람들은 이곳에서 여유를 즐기게 되었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일도 일어났다. 사람들의 왕래가 드물어 한적했던 이 동네는 이 가게의 인기 때문에 상권 자체가 되살아나 하나의 패션 거리가 되었다. 밀라노뿐 아니라 세계에서 모여드는 트렌드세터(trendsetter · 유행을 앞서가는 이)들은 최신 트렌드를 읽기 위해 통과의례처럼 이 가게를 들렀다. 가게는 전 세계 패션 멀티숍 가운데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영광을 얻었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구석에 있던 그 가게가 서울에 왔다. 제일모직과 손잡고 청담동에 자리를 마련했다. '가게 자리'를 둘러보았던 카를라 소차니와 크리스 루스는 처음 청담동의 가장 번화하고 목이 좋은 그 자리를 보고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에 가게를 내는 당연한 이치를 뒤집어, 멋진 물건과 새로운 볼거리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것에 성공한 이들이다. 지나치게 번화한 자리가 오히려 10 꼬르소 꼬모의 '느림의 철학'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어찌 되었건 두 사람은 밀라노의 여유 있는 쇼핑 철학을 최대한 이 가게에 재현하려 노력했단다.
이 '가게'가 만약 삼청동이나 가회동, 혹은 마장동의 어디 한구석에 자신 있게 문을 열었다면 밀라노에서처럼 또 하나의 쇼핑 거리가 탄생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그렇다면 숍의 코앞에까지 저마다 차를 타고 와 쇼핑을 하고 '부웅' 떠나버리는 청담동의 요즘 문화와는 다른 '느림의 쇼핑 철학'이 자랄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열흘 전쯤 문을 연 10 꼬르소 꼬모는 첫날부터 문전성시였다.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데에는 일단 성공한 듯하다. 벌써 인근의 멀티숍들이 리뉴얼을 하고 긴장하고 있단다. 실제로 기존의 '멀티숍'이라는 이름의 청담동이나 압구정동의 숍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가기 쉽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어딘가 고압적인 느낌의 매장 내부와 지나치게 조용하고 적막한 곳이 대부분이었다. 10 꼬르소 꼬모 덕에 청담동 일대가 모두 친근하고 여유롭고 문화까지 소화해내는 '즐겁고 느린' 쇼핑 거리로 거듭나면 좋겠다. 한 가지 더 욕심을 부린다면, 이런 고급 멀티숍에서 외국 디자이너의 옷 옆에 재능있는 한국 디자이너의 옷도 함께 내거는 장면을 많이 볼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