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대학교 학생과 교직원 여러분. 반갑습니다. 부산대학교 비정규직 교수 노조에서 초청해서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축제 기간이라서 바깥에서 즐길 것이 많은 데도 이렇게 많은 분들이 찾아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들어가기 전에 요즘 이명박 정부가 저지르고 있는 짓을 살펴보도록 하죠. 여러분은 지금 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뜨거운 논쟁이 과연 무엇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조중동에서 그토록 열심히 선전한 대로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상한 이념 논쟁, 곧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좀 더 원색적으로 말해서 '친미 우파 자유민주주의 수호 세력'과 '친북 좌파 빨갱이 체제 전복 집단'의 대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그런 논쟁은 공허하기 짝이 없습니다. 편을 가르는 방법과 개념 자체가 틀렸기 때문이죠. 이념이 아닌 지극히 기본인 '상식'과 '몰상식'이라고 보는 게 훨씬 더 타당합니다. 이에 관해서 여러분들은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사회에 관한 문제 의식이 웬만큼 발달하지 않은 분이 아니고서는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 평소에 알고 있는 대로 조리 있게 설명하기는 힘들 텐데 말이죠. '보도연맹'과 '보도지침'이 어떻게 다른지는 알고 계십니까?
이번 강의는 이런 현실에 관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합니다. 여러분도 보셨다시피 이번 강연 주제는 '그대 이름은 무식한 대학생'입니다. 상당히 도발적이죠? 2003년인가 어느 신문에 기고했던 사설의 제목인데, 이번에도 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도발적인 제목을 달았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식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각자 생각이 다르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심각할 정도로 무식합니다. 책 읽기는 사람을 풍요롭게 하고 글쓰기는 사람을 정확하게 한다는 말이 있지요. 곧 책 읽기와 글쓰기로 기본 교양을 탄탄하게 다져놓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요즘 어떻습니까? 한 달에 책을 몇 권이나 읽고 글을 몇 편이나 씁니까? 솔직히 안 읽고 안 쓰죠? 현실이 이렇습니다.
이런 현실 때문에 벌어지는 일은 서양과 견주었을 때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더 분명히 드러납니다. 서양에서는 개인 이익 관계보다는 사회 인식에 관하여 더 많이 신경을 씁니다만, 대한민국에서는 그와 반대로 사회 인식보다 개인 이익 관계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쏟습니다. 사회 문제에 관한 글을 읽고 자기 생각을 정리한 글을 쓰는 작업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여기에서 굉장히 많은 문제가 일어납니다. 공동체 의식이 죽고 관용이 희박해지며 너 죽고 나 살자는 이기주의의 극치가 사회를 지배합니다. 제가 몇 차례에 걸쳐서 언급한 '똘레랑스'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는 거지요.
이런 비참한 현실을 만드는 데는 일그러진 대한민국 교육이 한몫합니다. 대한민국 교육 제도를 통과한 학생들은 사회 문제를 제대로 생각하고 의논할 능력을 전혀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 피 터지게 공부랍시고 한 것이 무엇입니까? 건전한 토론과 논쟁이 아닌 객관 지식을 암기하는 능력이었죠. 교육 과정에서 강요하는 지식만을 얼마나 잘 외웠느냐만 확인하는 시험만 거치면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자기가 지니고 있는 지식과 그를 토대로 한 생각이 자기 것인지 아닌지조차 제대로 판단할 수 없게 됩니다.
대한민국 교육 과정은 선진국과 견주었을 때 터무니없을 정도로 비효율적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공부랍시고 강요하는 것이 객관 지식만 달달 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경험과 틀에 박히지 않은 자유로운 지식 습득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진정한 공부를 하는데 필수적인 건전한 토론과 다양한 경험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과 사회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를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주체성을 확립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주위에 넘쳐나는 온갖 정보 가운데 무엇이 쓰레기이며 무엇이 진정으로 이로운 정보인지도 구분하지 못합니다.
특히 심각한 것은 정답이 없는 학문을 정답이 있는 것처럼 강요하는 겁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압권인 것이 사회과학이지요. 대한민국을 지배해 온 흔히 말하는 조중동 같은 친미 수구 세력은 교육계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고, 학생들은 그 영향력에서 절대 자유롭지 못합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사회 문제는 정답이 없습니다. 정답이 없는 사회과학을 그들이 원하는 답만이 정답인 것처럼 강요하고, 그에 따라 학생들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공산품처럼 똑같은 답과 해석만 머릿속에 집어넣게 됩니다. 그래 놓고도 점수, 심지어 몇 등인지를 묻고 그에 따라 서열이 결정되는 비틀어질 대로 비틀어진 현실 때문에, 그 서열에 만족하고 열등감을 느끼면서 자기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도 깨닫지 못합니다.
이런 비참한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은 의식이 건강한지 돌이켜 보는 데서 출발하는데, 불행하게도 지금 대한민국에서 대학이 처한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물신이 사회를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지요. 여기에서 우리가 이야기해야 할 것은 몸과 의식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은 몸과 의식으로 구성됩니다. 몸은 볼 수 있고 의식은 볼 수 없지요. 그리고 그 두 가지는 나타내는 바가 전혀 다릅니다. 몸은 한 존재가 처한 상태를 의미하며, 의식은 존재가 당장 처한 상태는 아니지만 지향하는 것을 의미하지요. 일단 기본으로 몸이 안정되어야 의식도 발전할 기틀이 마련된다는 건 널리 인정받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물신은 몸의 상태를 지향합니다. 의식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물신은 집요하게 의식 발전을 가로막고 몸이 편안하도록 말초 신경만 자극합니다. 몸을 힘들게 만들어 놓은 다음에 그 불만을 만족시키고도 남을 만한 보상을 내걸면, 어지간히 의식이 강하게 발달한 존재가 아니고서는 몸이 원하는 바에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제 5 공화국을 통치하며 폭압을 저지르면서 국민들에게 선심을 쓴답시고 내세운 정책이 그 유명한 3S 정책이였죠. 아는 사람은 그 세 가지 S가 무엇인지 다 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몸은 불안에 민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직하지요. 몸이 안 좋으면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겉으로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보이지 않는 의식은 건강한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의식은 거의 절대적으로 안정성을 추구하며 고집이 셉니다. 의식에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이 옳은 것처럼 여기게 사실과 거짓을 혼동하고 심지어 왜곡하기까지 하지요.
결국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비효율적인 공교육 제도 안에서 권력이 원하는 지식만 달달 외운 학생들은, 의식을 성찰할 기회를 박탈당해서 자기 의식의 주체로 당당하게 서지 못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물신이 지배하고 있는 대학교로 들어와서 그 물신을 어떻게 물리칠 지 고민하기보다 그동안 한 고생을 보상받겠다는 그 집념 하나만으로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이 제공하는 혜택을 듬뿍 누립니다. 물론 그 혜택을 누리는데는 서민인 여러분 부모님이 피땀 흘려 번 돈이 필요한데, 그걸 허비하는 건 아무 일도 아니지요. 부산대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가운데 정말 돈 걱정 없는 재벌 집 아들 딸 있습니까? 여기에 있으면 손 한 번 들어보세요.
그렇게 대학교에서 4학년 다 보내고 취업 준비한답시고 사회에 관한 최소한의 교양도 제대로 쌓지 않은 채 졸업하니, 사회에서 변혁이 일어날 이유가 없는 겁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자아 성찰이 중요한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사회에 나가기 전에 사회에 관한 문제의식이 얼마나 강하고 그에 관한 자기만의 식견을 갖추고 있는지 돌이켜 보면, 한심한 수준일 겁니다.
흔히 요즘 사회에서 통하는 20 대 80이라는 비율이 있습니다. 여러 사회학자들도 이 비율을 이야기하더군요. 이것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상위 20%가 나머지 80%를 이끌고 심지어 지배한다는 뜻입니다. 또는 상위 20%가 사회 전체 부의 80%를 차지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죠. 유럽에서는 대개 이 비율이 35 대 65입니다. 사회복지가 세계에서 가장 잘 되어 있다는 유럽 일부 국가에서도 이 정도 비율이 나오는데, 대한민국에서는 과연 몇 대 몇이나 될까요? 놀랍게도 15 대 85입니다. 10 대 90도 과장이 아니라고 지적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이런 기가 막힌 현실을 바꿔나갈 주체는 이제 직장에서 퇴직하고 후손들에게 교훈을 남겨야 할 5~60대도 아닙니다. 한창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며 가정을 꾸리고 국가를 이끄는 3~40대 장년층도 아닙니다. 바로 청년인 20대 여러분입니다. 그런데 2008년 4월 9일에 열린 18대 총선에서 20대 투표율이 얼마라고 하던가요? 놀랍게도 19%라고 합니다. 민주주의는 투표로서 이루어지고 투표는 의식이 있는 사람들만이 제대로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에 따르면 20대는 사회에 관한 의식이 거의 없는 무지한 세대라고 스스로 폭로하는 꼴입니다.
이런 참담한 현실을 극복하려면 20대 여러분은 무지에서 벗어나 똑똑해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주체성을 상실했다는 비난에서 벗어나고자 엄청나게 노력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사로잡고 있는 물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세력과 그 왜곡된 구조를 이해하고 비판하면서, 앞에서 몇 번이고 이야기한 것처럼 잃어버린 사고의 주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책을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을 조리 있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글을 써 보면 그냥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걸 확실히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앞으로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사고 방식을 알려드리지요. 이것은 여러분뿐만 아니라 앞으로 여러분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서 가정 교육을 할 때도 정말 중요한 지침이 될 겁니다. 잘 기억해 놓으면 나중에 두고두고 저에게 고마워할 겁니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난 뒤 처음으로 배우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엄마'입니다. 영어로는 'mom'이지요. 신기하게도 이 '엄마'라는 단어는 어느 언어에서든지 비슷하게 나타나지요. 그건 그렇고 그 두 번째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왜?'입니다. 어린애가 엄마에게 말하는 것을 잘 지켜 보면 즉시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세상에 대한 온갖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고, 그 호기심을 충족하고 싶은 왕성한 욕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절대자나 다름없는 엄마에게 온갖 질문을 쏟아냅니다. 물론 아빠에게도 질문을 하지요.
그런데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들이 어릴 때 이것저것 물었을 때 부모님에게서 가장 많이 돌아왔던 대답이 무엇이었는지 말입니다. 무엇이었던 것 같습니까? '크면 알게 된다', '지금은 알 필요 없다',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 이런 면박성 대답 아니었습니까? 이런 대답을 들은 뒤에 여러분들은 부모님에게 질문을 하고 싶던가요? 당연히 하기 싫어졌을 겁니다. 그러면서 세상에 관한 호기심도 조금씩 줄어들었겠지요. 학교에 간 뒤에는 더욱 심해졌을 겁니다. 배우는 것과 상관 없는 엉뚱한 질문을 자꾸 늘어놓다가는 선생님뿐만 아니라 주위 친구들에게까지 이상한 놈이라면서 소위 왕따를 당하기 일쑤일 테니까 말입니다.
이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Why)'라는 것은 한 지성이 합리성(Rationality)'을 기르는데 가장 중요하며 필요한 것입니다. 인류가 지금과 같은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인류라는 존재를 둘러싼 모든 것에 의문을 품고, 그 궁금증을 해결하고자 두뇌를 사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수 백 만 년이라는 긴 인류 진화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왜 그런지 의심하고 비판하는 능력을 지닌 자만이 세상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도 알 수 있고 자기도 성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는 불행하게도 '왜'라는 질문에 답을 구하는 것을 너무나도 철저하게 억압했습니다. 태생부터 왜곡된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진실을 아는 것은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수구 세력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권력을 지니고 있던 그들은 사람들이 왜 대한민국 사회가 이 모양인가 토론하고 비판하는 것을 막고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교육계를 장악해 자기들이 저지른 온갖 작태를 합리화한 내용만 가르치도록 하고,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을 아예 가로막았습니다. 언론이야 두말할 것도 없이 조중동이라는 친위대를 활용했고, 그래도 안 되면 군대와 경찰이라는 무력을 동원해서 대놓고 위협을 가하고 실제로 비인간적인 폭력을 수도 없이 저질렀고, 심지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기도 했습니다. 남들이 왜냐고 따져도 너는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부모님들의 비겁한 가르침에 아이들은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그런 현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왜'라는 물음에 대답을 찾고자 의식을 고양하고 그 수준에 걸맞게 행동한 사람들 덕분에, 대한민국이 형식적인 민주주의나마 쟁취하고 모든 국민들이 그 혜택을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근본에서부터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위기는 모두 잘못된 교육에서 비롯된 겁니다. '왜'라고 물으면 가정에서부터 철저하게 묵살당하는 이상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비판 능력을 자연스럽게 상실하고, 자기를 둘러싼 환경에 무슨 문제가 있고 그것을 어떻게 고쳐나가야 하는지 진지하게 토론할 능력도 잃어버립니다. 둘도 없는 끔찍한 비극이죠.
여러분은 나중에 자식을 낳았을 때 자식들이 왜냐고 묻는다면 절대 알 필요 없다는 식으로 대답하지 말기 바랍니다. 아는 대로 성실하게 대답해 주고 만약 모른다면 스스로 찾아나서는 자세를 길러줄 수 있는 답변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가 한 지성으로서 의식을 형성하고 발전시켜 나가는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이런 사소한 것에서 사회 변혁에 중요한 원동력의 크기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교육 제도가 지닌 문제점이 무엇인지도 파악하기 더욱 쉽겠지요.
한 이야기는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군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이야기하고 강연을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18->14->12->10->8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이것은 일일 노동 시간이 변한 과정입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날 당시 노동자들은 하루에 18시간 동안 일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자본가들에게 뼈빠지게 착취당했습니다. 그런 참담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노동자들이 피를 흘려가면서 투쟁을 이어갔고, 여러분은 지금 그 피와 눈물로 열린 과실을 따먹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그 과실이 그렇게 달콤하지는 않지요? 비정규직이 유행하는 지금 사회에서는 일단 직장을 유지하고 보자는 불안 심리가 더욱 깔려 있어서 8시간 노동 보장이라는 기본권도 자칫하다가는 쉽게 무시당할 수 있습니다. 아니, 실제로 무시당하고 있는 곳이 허다하지요.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고용자와 취직자가 각각 지니고 있는 권리가 무엇입니까? 고용자는 취직자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원하는 결과를 산출하지 못하면 해고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취직자에게서는 직장을 옮길 권리가 있습니다. 고용자가 원하는 것을 해 주는 데도 정당한 대접을 해 주지 않는다면, 더 나은 곳으로 직장을 옮길 수 있다는 거지요.
그런데 생존이라는 절대절명의 과제 앞에서 흔히 기본 권리는 무시당하기 일쑤입니다. 흔히 직업이 없는 이들은 제대로 먹고 살 수가 없는데, 특히 예전과 같이 사회 복지라는 개념이 전무했던 시절에는 어떻게든지 일해야 살 수 있었기에, 앞에서 보여드렸던 것처럼 18시간 노동이라는 최악의 조건도 감수할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그런 비참한 현실을 개선하고자 노동자들은 곧 투쟁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운데 이 노동자의 날도 탄생했지요. 1886년 5월 1일에 시카고에서 벌어진 참사, 곧 8시간 노동 보장을 위해 미국 전역에 총파업이 벌어졌는데, 이 때 경찰이 발포하여 무고한 6명의 시민이 죽는데, 다음 날 자본가들이 조작한 헤이마켓 사건이 벌어지면서 노동 탄압의 극악무도한 현실을 드러냅니다. 이 참상을 보고받은 1889년 7월 파리에서 열린 제 2 인터내셔널 설립대회에서는 1890년 5월 1일을 '노동자의 날'로 정했습니다.
'노동자의 날'은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려는 그 정신과 그 정신을 수호하려는 연대 투쟁을 기리고자 생긴 날입니다.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려면 불평등한 계약 관계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 관계는 노동자가 반드시 약자일 수밖에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공평해지려면 고용주가 법적으로 좀 더 제약을 많이 받고 노동자는 좀 더 많은 권리를 보장받아야 합니다. 그게 노동법에서 기본이고요. 그런데 요즘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추세는 이 불공평한 관계가 뒤집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용주들의 입맛에 맞게 모든 것이 바뀌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몇 번이고 들어보셨고 어떤 분들은 그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셔서 아시겠지만, 그것은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광풍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자아 실현, 사고의 주체성 회복 같은 의식 고양은 자본에 올라탄 물신에 의해 배부른 소리로 치부되고, 얼핏 보기에는 정말 그럴듯해 보이지만 뜯어보면 새빨간 거짓말인 오로지 기득권을 가진 자들 배만 불려주는 법이 자꾸만 생기고, 그런 부작용을 막는 법도 그들 입맛에 알맞게 개정되고 있지요. 그 때문에 생기는 불안이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 흐름에 저항하는 움직임은 매우 적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잔인한 흐름에 휩쓸려 고통을 겪고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정말 중요하다고 이야기한 자아 실현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오로지 생존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강해진다는 것은 저도 이해합니다. 앞에서 말한 15%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 아니면 그 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물론 저도 그 15%가 아닌 나머지 85%에 속합니다. 한겨레 신문사 편집위원을 맡으면서 먹고 사는데도 신경을 쓰고 있지요.
사람은 물질이 어느 정도 충족이 되어야 자아 실현이라는 정신적 과제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그건 어느 시대에든지 마찬가지였습니다. 취직을 해야 한 사회인으로서 온전한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시 자아 실현을 미뤄야 할 지도 모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아 실현은 잠시 미뤄둬야 하지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지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최후의 목표는 자아 실현입니다. 그 자아 실현을 방해하는 사회적 대상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분명히 드러납니다. 곧 여러분이 맞서 싸워야 할 사회적 대상은 분명히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 여러분이 먼저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은 바로 게으름입니다. 환경 탓을 하기 전에 열심히 공부해서 환경을 극복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자본의 거대한 힘과 달콤한 유혹에 굴복하지 말고, 과감하게 그 유혹에서 벗어나 자본을 비판하고 맞서 싸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여러분들이 지금 처한 참담한 현실을 깨닫고, 책을 읽고 또 읽어야 하며 사회 전반에 관한 토론과 논쟁을 벌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희망이 없으며 '무식한 대학생'이라는 불명예를 벗을 수 없습니다.
긴 강의 끝까지 듣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대는 대학에 입학했다. 한국의 수많은 무식한 대학생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지금까지 그대는 12년 동안 줄세우기 경쟁시험에서 앞부분을 차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영어 단어를 암기하고 수학 공식을 풀었으며 주입식 교육을 받아들였다. 선행학습, 야간자율학습, 보충수업 등 학습노동에 시달렸으며 사교육비로 부모님 재산을 축냈다.
그것은 시험문제 풀이 요령을 익힌 노동이었지 공부가 아니었다. 그대는 그 동안 고전 한 권 제대로 읽지 않았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했다. 그대의 대학 주위를 둘러 보라. 그 곳이 대학가인가? 12년 동안 고생한 그대를 위해 마련된 '먹고 마시고 놀자'판의 위락시설 아니던가.
그대가 입학한 대학과 학과는 그대가 선택한 게 아니다.그대가 선택 당한 것이다. 줄세우기 경쟁에서 어느 지점에 있는가를 알게 해주는 그대의 성적을 보고 대학과 학과가 그대를 선택한 것이다. '적성' 따라 학과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성적' 따라, 그리고 제비 따라 강남 가듯 시류 따라 대학과 학과를 선택한 그대는 지금까지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은 고전을 앞으로도 읽을 의사가 별로 없다. 영어영문학과,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한 학생은 영어, 중국어를 배워야 취직을 잘 할 수 있어 입학했을 뿐, 세익스피어, 밀턴을 읽거나 두보, 이백과 벗하기 위해 입학한 게 아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어학원에 다니는 편이 좋겠는데, 이러한 점은 다른 학과 입학생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인문학의 위기'가 왜 중요한 물음인지 알지 못하는 그대는 인간에 대한 물음 한 번 던져보지 않은 채, 철학과, 사회학과, 역사학과, 정치학과, 경제학과를 선택했고, 사회와 경제에 대해 무식한 그대가 시류에 영합하여 경영학과, 행정학과를 선택했고 의대, 약대를 선택했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그대의 무식은 특기할 만한데, 왜 우리에게 현대사가 중요한지 모를 만큼 철저히 무식하다. 그대는 와 가 '민족지'를 참칭하는 동안 진정한 민족지였던 가 어떻게 압살되었는지 모르고, 보도연맹과 보도지침이 어떻게 다른지 모른다. 그대는 민족적 정체성이나 사회경제적 정체성에 대해 그 어떤 문제의식도 갖고 있지 않을 만큼 무식하다.
그대는 무식하지만 대중문화의 혜택을 듬뿍 받아 스스로 무식하다고 믿지 않는다. 20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읽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무식하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지금은 대중문화가 토해내는 수많은 '정보'와 진실된 '앎'이 혼동돼 아무도 스스로 무식하다고 말하지 않는다.하물며 대학생인데!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에 익숙한 그대는 '물질적 가치'를 '인간적 가치'로 이미 치환했다. 물질만 획득할 수 있으면 그만이지, 자신의 무지에 대해 성찰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그대의 이름은 무식한 대학생. 그대가 무지의 폐쇄회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좋은 선배를 만나고 좋은 동아리를 선택하려 하는가, 그리고 대학가에서 그대가 찾기 어려운 책방을 열심히 찾아내려 노력하는가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