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극장 복도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노래가 귓가에 뱅뱅 돌다가 어느 순간 멈추고,
나는 뒤적뒤적 담배를 꺼내 문다.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는 발걸음이 유난히 가볍다. 왜 그럴까. 왜 그럴까.
나도 모르게 검지와 중지를 코끝에 갖다 댄다. 아 그렇구나. 남는구나. 어떻게든...
그렇다. <멋진 하루>는 어떻게든 남는 영화다. 내가 걷기 놀이를 할 수 있게 주저 없이 내밀어주는 아빠의 발등 같은 영화다. 그렇게 내가 사뿐사뿐 걸을 수 있도록 내 발밑에 남아 있는 영화다. 그러니 아니 흐뭇해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나는 가끔 리뷰를 쓸 때 음악을 듣곤 하는데, 지금은 척 맨지오니의 Feels so good을 듣고 있다.
뭐가 그리 나를 지금까지도 이리 흐뭇하게 만든 것일까. 둘의 하루를 지켜보던 두 시간 내내 발을 동동 구르며 간지럼을 타듯 안절부절 못했던 나는 왜 그렇게 반응했던 것일까. 두 배우의 야릇한 조화에 만족스러웠던 것일까. 장면마다 촉촉한 도시의 매력이 스크린을 타고 막 흘러내려서 그런 것일까. 끝까지 승리를 예감할 수 없는 팽팽한 감전(感戰)의 양상이 어떻게 흘러갈지 도무지 알면서도 또 다시 모르고 싶어지는 간접경험의 흥분 때문이었을까. 아니, 사실은 나는 왜 그런지 알고 있다. 기억이다. 기억. 희수를 문득문득 멍하게 만들었던 그런 기억이 나에게도 있어서다.
희수가 병운을 일 년 만에 찾아온 것도 알량한 기억이 있어서이다. 그 기억을 따라 자신의 현 처지를 알고도 싶었던 것도 같고, 정말 돈이 궁해서 찾아왔다가 왔다리 갔다리 ‘이건 아니잖아.’ 를 속으로 계속 외치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그 속을 누가 알리오. 자기밖에 모른다. 분명 시작은 매몰차게 돈만 받고 깔끔하게 떠나겠다는 심정이었겠지만, 못내 은근슬쩍 병운에게 져주는 척하다가 어쩔 때는 더욱 적극적으로 나선다. 징글징글한데, 살짝 살짝 병운의 눈빛이 자기한테 머무르는 순간에는 자꾸만 흔들린다. 마냥 똥 씹은 표정만 하고 있기 매우 힘들다. 도대체 왜 이런 인간을 만나서 이 고생일까. 어쩌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병운 편을 들어주고 있다. 내가 정녕 이런 인간이었던가. 자기반성까지 하게 되는 걸 보면 어차피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잖아. 라고 자연스레 고백하는 희수는, 병운을 병운으로 인정하고 있는 거다. 병운의 변명은 그렇게 듣기 싫어했으면서, 널 아무리 욕하고 어째도 나도 별 수 없었어. 라고 변명하기에 이른다.
어떤 기억이 희수를 여기까지 오게 했고, 또 저기가지 가게 한다. 기억의 힘이란, 그런 것일까. ‘언제나 나를 가르치는 건 시간.’ 문득 예전 여자 친구의 미니홈피 제목이 떠오른다.
병운은 예의 병운답게 갑작스러운 방문에 대처하는 자세가 아주 일관적이다. 사람이 올곧다. 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지, 아마.
여자가 많아서, 꿈이 헛 되서 그 표현이 안 어울린다고? 글쎄요. 병운이, 난잡해보이지는 않는군요. 매 순간 진솔했던 죄밖에 더 있겠습니까. ㅡ,.ㅡ;;;(이런 남자, 싫어할 여자들 많겠죠.) 정말 대책이 없는 인간, 조병운. 자존심도 없고 철도 없고 마냥 헤헤거리는 어리광 철부지처럼 보인다. 이래도 헤헤, 저래도 헤헤, 그렇게 떠드는데도 얼굴 근육이 지치지도 않는다. 뭐해 먹고 사는지, 도대체 이 많고 많은 사람들은 언제 다 사귀어놨었는지, 정말 인맥이 다이내믹하다. 빌딩으로 치자면, 펜트하우스부터 주차장까지 어디 하나 빼놓을 곳 없이 전 층을 다 훑고 다닌다. 일 년 동안 돈 안 갚고 내뺐다가 이제 와서 자기한테 미안해서 줬던 거 아니냐고 생색내는 그에게 정말 넌덜머리난다고 화를 내야 할까. 그냥 조용히 평생 그러고 살라고 쌩까야 할까. 고민이다. 옛 정을 생각해서 조금이라도 마음을 쓸라치면 정 뚝뚝 떨어지게 마냥 방긋방긋이다. 정말 상대방으로 하여금 효도르한테 신나게 줘터졌으면 좋겠는 심정이 들게 만드는, 그 이름 병운이다.
기억은 머릿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 곳곳에 산재해있다. 사람에게도 있고 공간에게도 있고. 여튼 게릴라처럼 숨어 있다 튀어나온다. 일종의 베트남전 같은 거다. 이길 수 없는 게지. 전략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또 이기면 안 되는 거기도 하고.
이 버라이어티한 둘의 하루도 마찬가지다. 곳곳에 포진되어 있는 기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지만, 조금씩 무너지는 모습이 보기 참 아름답다. 나도 때로는 저렇게 무너졌다 또 일어 났다를 반복하며 살고 있겠지, 싶은 것이 ‘아련하다.’ 는 기분이 든다.
나는 어땠을까. 나는 어땠을까. 영화 속 장면 장면 잊지 않기 위해 눈으로 기억하면서도 한편으로 뒷머리 저쪽 어디에서부턴가 스멀스멀 떠오르는 기억을 데이터로 삼아 대차대조표 차트를 실시간으로 만들어내느라 매우 분주했던 그 기분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어진다.

난 영화의 엔딩이 참 좋다. 왜냐하면 항상 기억을 떠올릴 땐 언제나 첫 장면부터 떠올리기 때문이다. 왜? 그 때가 제일로 밝고 찐하고 화사했으니까.
혼자 밤에 자다가 멀뚱히 천창 쳐다보고 있다가 씨익 웃게 되는데, 그 때가 바로 첫 만남의 애잔함을 되씹을 때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들 처음이 그렇게 좋았다. 처음, 처음, 처음, 그 기억만 꼭꼭 숨겨두곤 하는데 그들의 첫 만남을 내게 보여주었다는 것. 뭔가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을 잘 전달받은 것 같아 좋았다. 더불어 몇 가지의 아름다운 소품들도 더불어서 말이다. 그렇게, 그렇게 다들 살아가고 있나보다.

눈으로 단편소설을 읽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던 장면이 많았던 것도 이 영화를 소중히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일조했다. 내가 좋아하는 도시를 잘 표현해낸 장면들은 꼭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담아두었다. ㅎ(그리고 나서는 나중에 찾아 갈라고 ㅋ)
차창에 비친 빌딩의 모습도 좋고, 강변북로도 좋고, 마지막에 병운과 헤어지면서 희수가 뜻 모를 웃음을 지을 때의 그 구도도 참 좋았다. 도시의 매력은 일단 쓸쓸해서 좋다. 따스한 맛은 없지만 매몰차지만 외면할 수만은 없는 맛이 있다. 병운의 느낌과도 조금 겹쳐지기도 한다.
‘미안해.’라는 말이 쩌렁쩌렁 가슴팍을 때리던 한효주의 목소리는 알겠는데, 버스정류장에서 나왔다는 한효주를 못 찾았다. 나는 비를 피해 잠시 멈춰선 처마 밑에 함께 서 있던 여자를 한효주라고 알고 있었는데 버스정류장에서 나왔다니까 의아했다. 버스정류장이 있었나. 잘 기억이 안 난다. 아시는 분들이 도와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