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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들②

신문섭 |2008.09.29 00:06
조회 548 |추천 4

 

☆  장애를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들 ②  ☆

 

 

◇ 악성 베토벤


베토벤은 독일이 낳은 역사상 최고의 작곡가로 고전파 음악의 완성자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음악가였던 만큼,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14살 때 궁정 예배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었다. 그 후 17살에 빈에서 온 발트시타인 백작의 추천으로 빈에 가서 하이든으로부터 음악을 배웠다. 그는 대단한 노력가였고, 겉으로만 아름답고 화려한 것은 싫어했으며 마음속의 감동을 중시하였다.


그러다 26살 때 병을 앓아 마침내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으며, 32살 때는 유서를 쓰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 괴로움을 극복하고 힘차게 살아갔기 때문에 그의 음악은 귀를 즐겁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대예술로 전해져 오는 것이다. 그가 청각장애인이 되고 난 후 작곡한 불후의 명곡 교향곡 9번 '합창'을 들어보라! 그것은 귀로 듣는 음악이 아니라 가슴으로 듣는 음악이다.


◇ 낭만파 시인의 대명사 바이런


영국의 세계적 시인인 바이런은 1788년부터 1824년까지 살았다. 그는 런던의 귀족 집안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훌륭한 글재주로 주위의 칭찬을 받으며 성장했다. 켐브리지대학에 입학하여 역사와 문학을 전공했다.


1807년 '게으른 날들'을 발표했으나 평판이 좋지 않았고, 졸업한 뒤 무질서한 생활을 계속하다 유럽을 여행하다 돌아와 견문기 '차일드 헤럴 등의 편력'을 출판하고서 일약 유명해졌다. 계속하여 '해적', '라라', '돈환' 등 유명한 작품을 계속 발표, 19세기 낭만파의 대표적인 존재가 되었다.


항상 그리스 문화를 사랑했던 그는 23년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여해 독립군에게 사기를 북돋아 주었는데 '오늘 나는 36세가 되었다'는 시를 마지막으로 말라리아 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는 다리를 절었으나 언제나 자기 자신을 노래하고 생각하는 시를 쓴 시인으로서 자유롭게 살다 간 낭만주의자였다.


◇ 시각장애 수영선수 타마스 다르니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는 그 어느 때보다 장애인 선수들이 많았다. 헝가리의 타마스 다르니 선수는 수영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그는 시각장애인이다. 15살 때 친구가 던진 눈덩이가 왼쪽 눈을 강타한 것이 다르니에게 실명을 가져다 주었다. 7차례나 수술을 했지만 다르니는 왼쪽 눈이 움푹 파인 상처가 남아있다. 다르니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하여 2연패를 했다.


◇ KO승으로 재기에 성공한 의족복서 크레이크


의족의 복서가 KO승으로 재기해 미국 스포츠팬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 화제의 인물은 크레이크 보자노프스키. 그는 오토바이 사고로 우측다리를 전달, 재기불능의 판정을 받았다. 다리를 다치기 전만 해도 그는 13전 전승 무패를 자랑하는 촉망받는 권투선수였다. 그러나 그는 절망을 딛고 고무로 된 의족을 하고 다시 권투에 도전 교통사고 후 18개월만에 의족의 복서로 재기한 것이다. 프로데뷔 14연승을 올린 그는 "장애인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게 돼 한없이 기쁘다. 나는 오늘의 승리보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 짧은 다리의 금메달리스트 조아큄 크루즈


LA올림픽 육상 800m에서 금메달을 딴 브라질의 조아큄 크루즈(21세)선수도 장애를 극복한 올림픽 영웅이었다. 크루즈는 태어날 때부터 오른쪽 다리가 2cm나 짧아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특별히 고안해서 만든 특수 운동화를 신고 뛰었다. 그는 수술만 하면 정상인이 될 수 있었지만 집안 형편이 몹시 어려워 수술은 커녕 병원 한 번 가보지 못하고 자랐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구두닦이와 껌팔이를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가 운동을 시작한 것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처음 시작한 운동은 농구였다. 다니던 초등학교 농구 코트에서 절룩거리며 던진 볼이 링그물에 출렁거리는 것을 보고 배고픔을 잊곤 했다. 크루즈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달리기를 했는데 이 역시 배고픔 때문이었다. 그는 "운동을 하고 나면 더 허기가 왔지만, 달리는 동안은 배고픔을 느끼지 않아서 계속 달렸다"고 했다.


그의 달리기를 지켜 본 학교 체육 교사 올리베이라씨는 그가 불편한 다리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육상선수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직접 지도를 하여 정상의 길에 오르게 했다. 올리베이라씨 밑에서 맹훈련에 들어간 크루즈는 급격히 기록 향상을 보여 17살 때 400,800,1500m에서 남미 신기록을 세우며 육상 스타로 떠오른 것이다.


LA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나서 크루즈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첫 번째로 나의 조국 브라질에 금메달을 바치다니 꿈만 같다.  나는 매우 행복하다. 오늘 영국의 세바스찬 코 등 세계적인 강호들을 꺾고 우승했다. 나는 더욱 정진, 꼭 세계 기록을 갱신하겠다.' 크루즈는 비록 가난하지만 모 방송국이 2만 5천달러짜리 주택을 제공하겠다는 제의에 '그 돈으로 차라리 육상장이나 건설하라'고 한마디로 정중히 거절했고, 또 '카 퍼레이드 따위의 환영은 사양한다.'고 해서 그의 인간성을 돋보이게 했다.


◇ 메이저 대회 우승을 차지한 청각장애인 여자 골퍼 마르타 노스


미국 메이저 골프대회인 드 모리어클래식서 우승을 차지한 청각장애인 여자 골퍼 마르타 노스. 그녀는 지난 `92년 귀신경을 다쳐 골프를 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으나 불굴의 의지로 재기, 우승을 차지했다. 그녀는 우승이 확정된 순간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의사들은 거짓말쟁이였다."며 2년 동안의 병마와 고통을 이겨내고 얻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지난 `78년 프로에 데뷔, 지금까지 통산 2승밖에 올리지 못했던 그녀가 청각장애인이 된 후 오히려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은 시련에 부딪칠수록 강해지는 인간의 강인한 면모를 다시 한 번 느끼게 하는 사실이다.


◇ 전설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


전설적인 복싱영웅 무하마드 알리가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선수생활 때 입은 펀치드렁크의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알리가 전세계 장애인들의 희망으로 부각되면서 상담과 위문활동, 강연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미시간주 작은 마을에 은거하고 있던 알리가 갑자기 부상한 것은 지난해 7월 '96 애틀랜타 올림픽 개회식 때, 성화 최종주자로 선정된 알리가 온몸에 스며든 병마로 인해 뒤틀리는 몸을 버텨내며 성화에 점화하는 모습은 전 세계인들의 감동을 자아냈고 특히 동병상련의 장애인들에게는 희망을 심어 주었다.


올림픽이 끝나고 그의 집에는 매일 수백 통의 전화가 걸려와 "당신 덕에 희망을 갖고 살게 됐다."며 감사의 뜻을 전하고 있다. 유에스에이투데이지가 소개한 한 일화는 같은 장애인들에게 그가 우상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어떤 여자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당신은 내 남편에게 영감을 주었다. 죽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남편이 요즘 거리에서 나도 알리와 같은 파킨슨병 환자"라고 외치고 다니며 삶의 의욕을 보이고 있다고 전화를 한 것이다. 상황이 이쯤 되자 알리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알리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이곳저곳을 누비며 '희망의 전도사'로서 활약하고 있다.

 

그러나 알리는 장애인들이 아닌 굵직한 스폰서들이 요청하는 강연에는 상당한 몸값을 요구하고 있다. 행사장에 하루 모습을 나타내는데 10만 달러(약 8천 2백만원) 외국으로 나갈 때는 최소한 22만 5천달러(약 1억 8천 4백 50만원)를 받고 있다. 알리는 마비된 근육을 힘들게 움직여 사람들에게 말한다. "내가 성화에 점화할 때 왜 울었죠? 나도 했는데 여러분은 왜 못합니까. 뭐든지 포기하지 마세요."


◇ 소아마비 육상선수 루돌프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3개의 금메달을 휩쓸었던 미국의 여자 육상 선수 루돌프는 소아마비 장애인이었다. 그녀는 여자 100m,200m 그리고 400m 릴레이에서 3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어 3관왕의 영웅이 되었다. 루돌프는 그로부터 24년 지난 LA올림픽대회에 육상 경기 방송 해설자로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녀의 얼굴에서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가 있었다.

 

루돌프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 "내가 월계관을 썼을 때, 나는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황홀했어요. 그러나 나에겐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었어요. 프로로 전향한 클레이는 억만장자가 됐지만 나한테 돌아온 것은 연봉 4천 달러의 초등학교 체육 교사 자리였어요. 하지만 그건 대가족의 생계를 꾸려 나가기엔 너무나 박봉이었어요. 결혼도 두 번이나 실패했지요. 첫 번째 결혼은 내가 금메달을 따고 난 직후였어요. 남편은 내가 금메달리스트라는 그 이유만으로 나와 결혼했지요. 그 남자는 나를 이용해서 부자가 되는 꿈을 꾸었던 거예요. 결국 금메달도, 인생의 목표로 생각했던 결혼도, 얻은 그 순간일 뿐 영원할 수 없었어요."

 

현재, 그녀가 손수 지도하는 학생은 4백여 명으로 루돌프 자신이 경험했던 '영광에의 집착과 대중에 의한 자신의 망각 같은 시행착오를 절대로 후진들에겐 남겨 주지 않을 것' 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 두 팔 없는 미식축구선수 로니 웨스트


두 팔이 없는 장애를 딛고 미식축구선수가 된 로니 웨스트가 살아온 4반세기의 삶은 끊임없이 자기와의 싸움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약물복용으로 태어날 때부터 두 팔이 없이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그런 장애에도 불구하고 여섯 살 때부터 수영을 하여 10년간 장애인 체육대회에 출전했으며, 미식축구사상 처음으로 두 팔이 없는 미식축구선수가 되었다.

 

장애인수영대회에서 5개의 세계기록을 보유한 웨스트는 "나는 두 팔이 없다. 그렇지만 스포츠를 좋아하며 내 스스로 만능 스포츠맨으로 자부한다."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미식축구선수가 쉽지만은 않았다. 포지션이 키커라고 했지만 가끔 태클을 해야 했고 필드골 시도도 봉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역시 팔 없는 장애인을 키커로 내세웠다는 상대선수들의 비난이었다.


그의 동료들은 그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는 경기를 거듭할수록 자신감을 가졌다. 그는 "이 세상에는 왼손잡이가 많이 있는데 나는 왼발잡이다."는 농담도 하는 자신에 찬 삶을 살고 있다. 


◇ 금메달 열 개의 소아마비 선수 레이 유리


올림픽 사상 가장 많은 금메달을 차지한 선수는 소년 시절을 휠체어 위에서 지낸 장애인이었다. 1873년 미국 인디애나 주에서 태어난 레이 유리는 소아마비에 걸려 휠체어 위에서 지내다가 10살 때부터 몸을 단련하기 시작했다. 달릴 수 없었던 유리가 할 수 있는 운동이란, 서 있는 자세에서 껑충 뛰어오르는 일이었다. 당시에 올림픽 종목에는 선 자세에서 치뜨는 높이뛰기, 넓이 뛰기, 세단뛰기가 있어 유리의 희망을 키워 주었다.


1900년 파리. 제2회 올림픽에 26살의 나이로 출전한 유리는 이 3개 종목에 우승했고, 1904년 세인트루이스에서의 제3회 대회에서도 역시 이 3개 종목을 모두 2연패했다. 그리고 중간 대회(1906년 아테네)와 그로부터 2년 뒤인 1908년의 제4회 런던 대회에서도, 종목이 없어진 선 자세에서의 세단뛰기를 제외하고, 나머지 2개 종목에서 각각 우승함으로써 연속해서 금메달 10개를 차지했다.


◇ 금세기 최고의 절단장애 여자스키선수 다이애나 골든


한쪽 다리를 절단한 불행을 딛고 미국 최고의 여자 스키선수로 우뚝 서 세계인들을 감동시켰던 다이애나 골든. 그녀는 장애를 극복하고 일어선 인간승리의 화신으로 오랫동안 전 세계 매스컴들의 칭송의 대상이 돼 왔으며 그녀의 스토리는 '스키에의 재도전'이란 제목으로 영화화 돼 우리 안방극장에도 소개된 적이 있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링컨태생으로 다섯 살 때부터 스키를 타기 시작한 다이애나는 12살 때인 `75년 골수암으로 오른쪽 다리를 잘라내야 했으나 각고의 노력으로 설원에 다시 돌아와 비장애인들도 넘보기 힘든 놀랄 만한 활약상을 보였다.

 

외발스키로 슬로프에 다시 선 그녀는 82년 첫 출전한 세계장애인선수권대회에서 첫 금메달을 목에 건 이래 미국 장애인스키선수권대회를 10차례, 세계장애인스키선수권대회를 19차례나 석권했으며, 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에서 시범 종목으로 채택된 장애인 대회전에서 우승 등 장애인 스키부문의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해 왔다.

 

그녀는 장애인용 장비가 아닌 일반 장비로 이러한 성적을 올려 86년 미국스키협회가 매년 최우수선수에게 주는 베크상을 받았으며, 88년에는 '스키 레이싱'지에 의해 올해의 알파인 여자스키선수로 뽑혔다. 그리고 같은 해에 정상인 스키선수들을 제치고 미국 올림픽위원회로부터 '올해의 여자스키선수'로 지목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녀는 자신에게 따라 다니는 '용기 있는'이란 수식어를 혐오한다. 그 단어가 모든 장애인들의 능력을 얕잡아 보는 그릇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이애나의 스토리는 과장해서 말하기 좋아하는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이미 하나의 전설로 떠받들어지고 있다.


◇ 영혼의 목소리 호세 펠리치아노


시각장애인 가수 호세 펠리치아노는 원래 푸에르토리코의 빈농의 아들로 미국에 이민 와 뉴욕의 스페인 이민촌 빈민굴에서 성장했다. 어릴 적부터 아코디언과 기타를 치기 시작한 그는 일반 시각장애인들이 앞을 못 보는 대신 다른 감각이 발달해 있듯이 그 역시 천부적인 음악소질로 인해 매우 빠른 음악적 성장을 거듭해 17살 때부터 공연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레코드로 데뷔한 것은 1963년부터였다. 물론 처음에는 그의 노래 대부분이 스페인어였기 때문에 라틴 아메리카 쪽에서 인기가 있었고, 그가 정작 미국에서 그의 이름을 드날린 것은 1969년 팝차트 3위까지 오른 그룹 DOORS의 히트곡을 터뜨리기 시작하는 그는 TV 인기시리즈 주제가와 영화음악 등으로 인기의 절정에 오른다. 그는 현재까지 30여년 넘은 가수생활 동안 레코드 발표, 그리고 끊임없는 순회공연으로 정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는 시각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못 다루는 악기가 없으며 일반가수들보다 훨씬 뛰어난 영혼의 노래를 마음껏 부르는 가수이다. 그리고 자신이 장애인이면서도 많은 자선사업을 하면서 비장애인들보다 훨씬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이다. 앞서 소개한 레이 찰스나 스티비 원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호세 펠리치아노는 가슴을 울리는 영혼의 목소리로 우리의 일상을 깨워 그의 행복한 세계로 불러들인다.


◇ '비밥바 룰라'의 주인공 진 빈센트


'비밥바 룰라'란 노래로 록큰롤 세대를 풍미하며 세계적인 스타급 가수로 부상한 진 빈센트는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장애인이 되어 고통 속에 살다가 세상을 떠난 불세출의 팝가수로 남겨졌다. 열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진 빈센트는 미 해군에 입대, 한국전에 투입됐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치닫던 1953년 사고를 당해 다리를 크게 다쳤다. 

 

장애인이 된 채로 한국전에서 전역했을 때 그는 건강문제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록큰롤 가수로서의 새 출발을 위해 그룹을 결성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그런 결과 1956년 6월 빌보드 팝싱글차트 7위에 올라 세계적인 스타가 된다. 그는 그 이듬해까지 모두 6곡을 인기차트에 올렸다.

 

그러나 진 빈센트의 불운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1959년 방송 DJ에게 뇌물을 주고 자기 노래를 선전했다는 비난 속에 미국을 떠나 영국에서 유배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는 1960년 영국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동료와 차를 타고 달리다 런던 교외에서 대형 교통사고를 당해 동료는 그 자리에서 숨지고 자신은 중상을 입었다.  이 사고 이후에도 그는 7년 이상 영국서 활동했지만 결국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사실과 위궤양에 화병까지 겹쳐 1971년 10월 1일 궤양출혈로 한 많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 중국 최대의 병법가 손자


손자는 B.C 6-5세기경 중국 전국시대의 제나라 병법가이다. 이름은 무(武), 자(子)는 존칭이다. 절도와 규율로 오나라의 군대를 양성하였으며 병서인 '손자'를 지었다. 그의 병서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인의를 전쟁의 근본이념으로 하였는데 거기에는 전쟁의 전술만이 아니고 제후의 내치, 외교, 국가경영의 비결, 승패의 비기, 인사의 성패 등에 대해서도 비범한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그의 뛰어난 전략은 후세의 무장들 사이에 널리 이용되었다. 우리 나라에도 일찍이 소개되어 애독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한 때 역과 초시(譯科 初試)의 교재로 쓰였으며 최근에는 소설로도 소개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그는 두 다리가 절단된 중증장애인이었다고 한다.


◇ '작은 신의 아이들'의 청각장애인 배우 말리 매틀린


지난 `87년 '작은 신의 아이들'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청각장애인 배우 말리 매틀린의 인기가 식을 줄 모르고 있다. 빼어난 미모와 탁월한 연기력으로 첫 작품 '작은 신의 아이들'의 농아 주인공 사라역을 훌륭히 해내 전세계 영화인은 물론 장애인들의 찬사를 받았다.

 

평소 "나는 농아배우가 아니라 배우이면서 동시에 농아인 한 인간"임을 강조해 오던 그녀는 출연작마다 비장애인을 넘는 탁월한 연기실력으로 '농아'아닌 진정한 배우임을 일깨워 왔다. '작은 신의 아이들'에 이어 그녀는 두 번째 영화 '워커'에 출연했고, 미장원에서 농아특수학교에 필요성을 역설하며 특수학교 보호입안을 요구하기도 했다. 배우이면서 동시에 농아들의 권익에 앞장서는 사회사업가의 역할도 한 것이다.


◇ 발명왕 에디슨


에디슨은 오하이오주 미란에서 태어난 발명가로 그의 발명은 매우 많아서 특허가 1,300여 가지나 되는 발명왕이다. 우리 주위에는 그에 의해 발명된 것이 많다. 축음기(1877), 영화(1888), 자동발신기(1874), 전화송신기(1879), 전차의 실험(1881), 발전소(1882)등이 있다. 그리고 에디슨 효과의 발견은 3극 진공판 발명의 기초가 되어, 라디오 발명의 길을 열어 준 과학에서의 중요한 발견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에디슨은 집안이 무척 어려웠기 때문에 학교 교육을 받은 것은 겨우 3개월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철도의 신문팔이 일을 하면서 열차 안에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러다 15살 때 역장 아들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 인연이 되어, 전신술을 배워 전신 기사가 되었다.


이 무렵에 전기학을 공부하여 발명의 토대가 되는 지식을 얻어 1870년경부터 여러 가지 발명을 시작하게 되었다. 1876년에는 멜론 파크에서 자기의 연구소를 만들어 참을성 있게 꼼꼼히 연구를 계속하면서 그는 '천재라는 것은 98%의 땀과 2%의 영감'이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 말에서 우리는 에디슨이 소리가 잘 안 들리는 자신의 핸디캡을 오히려 깊이 몰두할 수 있는 연구심으로 바꾼 피나는 노력가였음을 알 수 있다.


◇ 매일 특수 악보와 싸우는 시각장애인 와나미


시각장애인이란 부가적 조건 때문이 아니라 순수한 음악성으로 세계적 명성을 누리는 바이올리니스트 와나미는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었다. 4살 때부터 바이올린 수업을 시작한 그는 17살 때인 1962년 일본 최고의 등용문인 마이니찌신문 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았고, 20때 콘티보 국제 콩쿠르에 입상하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1년 중 6개월 이상을 해외 연주활동으로 보내는 그는 88년 서울 장애자 올림픽 때 기금마련을 위해 서울 공연을 갖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음악적 명성에 못지않게 그의 어머니가 쓴 '어머니와 아들의 심포니'란 책으로도 유명한 그는 항상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이올린을 켠다고 한다.


◇ 소아마비 바이올리니스트 이자크 펄만


준수한 이목구비, 훤칠한 외양도 지니지 못했으나, 현재 온 세계를 통틀어 가장 소중한 바이올리니스트인 이자크 펄만, 그는 소아마비 장애인이다.

 

몇 년 전 그는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Together"란 타이틀의 음반을 만들었는데, 도밍고의 멋진 노래들을 바이올린으로 받쳐주는 그의 연주로 완벽한 앙상블을 이뤄냈다. 그는 1945년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1958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13살 때 유명한 텔레비전 쇼에 소개되면서 유명세를 치르기 시작한 이래, 줄리아드 음악원을 졸업했고, 1964년 메벤트리트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연주자로서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은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그는 신체 장애인으로서 얻는 프리미엄은 단연코 거절한다. 그는 그의 연주가 연주 그 자체로 평가되기만을 원한다. 그는 이점에 대해서 "사람들은 누구나 내 연주만을 갖고 나를 평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두 번의 부자유를 겪게 되는 것이지요."라고 말한다. 활달하고 환하게 웃는 것을 좋아하는 그는 앞으로도 뛰어난 앙상블 연주자로서 이름을 남길 것이다.


추천수4
반대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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