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좋아하는 배우나 감독의 죽음을 접할 때면 그것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던 죽음이라 하더라도 그 안타까움은 꽤나 크게 다가온다. 물론 그 중에는 당시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후에 재평가되거나 그 배우 혹은 감독의 진가를 알게 되었을 때도 그 아쉬움은 더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최근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손으로 혹은 사고로 혹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모든 죽음들은 혹은 의아하고 혹은 충격적이었으며 혹은 어안이 벙벙했다. 믿을 수 없었던 적도 있었고, 뭐가 그리 급해 그렇게 일찍 떠나야했냐고 탄식을 숨길 수 없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 기억들로 남아있는 영화인들의 죽음들. 혹은 너무나 안타까웠던 영화인들의 죽음.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그들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정리해 보았다.(순서는 기억의 순이며 이미지는 인터넷 여기저기서, 출생과 사망년도는 씨네21 DB를 참고했습니다.)
브랜든 리
1965 - 1993
대표작 : 리틀도쿄, 래피드 화이어, 크로우 등
내가 기억하는 첫번째 안타까운 죽음은 브루스 리의 아들 브랜든 리의 죽음이다. 그의 죽음을 처음 들었던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93년 3월 TV 뉴스를 통해서였다. 그 때 TV 뉴스에서 고 브루스 리의 아들 브랜든 리가 영화에서 폭파신을 찍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 당시엔 그저 이름만 아는 정도였고, 브루스 리의 아들이었다는 정도밖에 몰랐다. 그의 죽음이 너무나 안타까운 요절로, 너무나 안타까운 배우의 상실로 이어졌던 것은 그의 유작인 '크로우'를 94년 말에 보고나서였다. 지금 생각하면 조커를 연상시킬 정도의 기괴한 분장 속에서 슬프게 웃던 그의 표정은, 영화를 보는 내내 그의 요절을 아쉬워하며 아까운 배우 하나를 너무 일찍 잃었구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도록 만들었다. 조금만 더 오래 생을 유지했었더라면 아버지만큼은 아니어도 충분히 훌륭한 배우가 되었을텐데. 아버지의 뒤를 따라 너무나 일찍 우리 곁을 떠나버린 배우.
리버 피닉스
1970 - 1993
대표작 : 스탠바이미, 허공에의 질주, 인디아나존스-최후의 성전, 아이다호 등
두번째 안타까운 죽음은 리버 피닉스이다. 그의 죽음도 브랜든 리와 마찬가지로 TV 뉴스를 통해 접했다. 게다가 그도 브랜든 리가 죽었던 93년에 불과 23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브랜든 리의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좀더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는데 아침에 학교를 가기 위해 준비하던 중 아침 뉴스에서 헐리우드 스타 리버 피닉스가 변사체로 발견됐으며 사인은 약물중독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이었다. 브랜든 리보다는 지명도가 높았던 배우였던데다 왠지 반항적인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에 고딩시절이었던 그 때 당시에도 리버 피닉스의 죽음은 꽤나 안타까워서는 영화를 좋아하던 친구들과 함께 좋아하는 배우가 죽었다며 씁쓸한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우리 세대의 제임스 딘이 되어주길 바랬는데 이제 막 피어나려고 하던 차에 떠나버려서 더더욱 아쉬웠을 것이다. 후에 씨네21이나 키노같은 잡지에서 그를 재조명하면서 죽음 이후에 더더욱 안타까움이 커져갔던 배우.
김 기 영
1922 - 1998
대표작 : 하녀, 화녀,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육식동물 등
세번째 안타까운 죽음은 김기영 감독이다. 한동안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90년대 중반 그의 영화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다시 한번 작품활동을 시작하려던 찰라 불의의 화재로 세상을 달리했다. 특히 그는 6.25당시 폭격 속에 마을 주민 중 유일한 생존자로 살아남는 등 우여곡절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를 만들어 냈었으며 당시의 재평가이후 신작 '악녀' 촬영을 준비하고는 대단한 걸작을 만나게 될 거라며 껄껄껄 웃었던터라 그의 죽음은 특히 안타까웠다. 그때 당시 키노에 실렸던 이연호 기자의 장문의 추도문('가장 강렬하고 독창적이었으나 외롭고 힘들었던 김기영 감독님. 이제 편안히 주무십시오.'라고 했지.)을 보며 아. 정말 우린 대단한 거장을 잃어버리고 대단한 걸작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걸지도 모르겠구나.라는 탄식을 내뱉었던 기억이 난다.
콘도 요시후미
1950 - 1998
대표작 : 데뷔작이자 마지막 작품이 된 '귀를 기울이면'
네번째 안타까운 죽음은 콘도 요시후미 감독이다. 사실 이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필로그래피는 단 한 작품 '귀를 기울이면'뿐이었고, 당시엔 일본문화 개방이 이제 막 시작되려던 참이었던데다가 미야자키 하야오와 같은 널리 알려진 감독이 아니었던터라 그의 죽음에 우리나라의 매스미디어가 주목했을리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의 죽음에 안타까움을 가졌던 것은 바로 그의 데뷔작이자 마지막 작품이 된 '귀를 기울이면' 때문이다. 처음 학교의 불법상영회로 보았던 1996년. 난 이 만화에 흠뻑 빠졌다. 뒷골목을 통해 선배가 이 만화의 비디오테입을 손에 넣었을때 그걸 빌려와 돌려보고 돌려보고 복사해서 가지고 있게 되었을 때 얼마나 행복했던지. 그리고 10년이 지나 이 만화를 극장에서 보았을 때. 얼마나 행복했던지. 이제 그 행복을 맛볼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죽음을 들었을 때나 지금이나 너무나 안타까울 뿐이다. 만약 그가 살아있었다면 제2의 미야자키 하야오가 되지 않았을까. 더더욱 안타깝다.
구로사와 아키라
1910 - 1998
대표작 : 라쇼몽, 7인의 사무라이, 요짐보, 카게무샤 등
다섯번째 안타까운 죽음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다. 사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아마 신문을 통해서 접하고 그 다음에 키노에서 그의 죽음을 추모하던 장문의 특집기사를 내보내면서 더 자세히 알게 되었던 것 같다. 물론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경우 우리 세대의 감독이 아닌 우리 윗세대의 감독이지만 그가 아시아영화에서 나아가 세계영화에서 남긴 흔적은 윗세대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닌 우리세대까지 혹은 그 다음 세대까지 계속해서 전해질 거장이기에 그의 죽음은 다르게 다가왔던 거 같다. 좀더 오래 사셔서 더 좋은 영화를 남겨주었으면 하는 아쉬움. 거장만이 가지게 해줄 수 있는 아쉬움이었다.
스탠리 큐브릭
1928 - 1999
대표작 : 킬링,닥터 스트레인지 러브,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닥터 스테리인지러브 등
여섯번째 안타까운 죽음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과 마찬가지로 한 시대를 풍미한 또하나의 거장이 죽어서였는지 그의 죽음은 더 큰 안타까움이 남았던 것 같다. 게다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작품활동이 거의 멈춰진 상태였던대 반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와이드 아이즈 셧'의 후반작업을 왕성히 진행하고 있던 차에 세상을 떠난지라 아직 더 만들고 싶고 더 찍고 싶은 영화들이 많았을텐데, 그의 팬들이 그의 차기작을 항상 기다리고 있었을텐데라는 생각에 더 많은 아쉬움이 남았다. 게다가 지독히도 완벽주의자였던 그가(참고로 '풀메탈자켓'이 국내 개봉할 때 광고문구까지 그의 결재를 받아야했다고 한다.)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눈을 감으면서도 편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니 그런 아쉬움은 더더욱 커졌었다.
장 국 영
1956 - 2003
대표작 : 영웅본색, 천녀유혼, 아비정전, 패왕별희, 동사서독, 금지옥엽 등
일곱번째 안타까운 죽음은 장국영이다. 그의 죽음을 처음 알았던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났던 4월 1일 인터넷 서핑 도중이었다. 갑자기 뜬 그의 사망기사에 정말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만우절의 장난기사일 거라 생각했다. 그만큼 그의 죽음은 믿기 어려웠다. 그것은 리버피닉스가 우리에게 반항의 이미지였다면 장국영을 비롯한 당시의 배우들은 우리에게 사나이의 로망이거나 여학생들에겐 로맨틱의 우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게 주윤발과 같은 마초의 이미지는 없었지만 당시의 배우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고 함께 출연했던 그 사실만으로도 장국영은 우리에게 하나의 아이콘이었다. 우리의 학창시절을 수놓았던 스타의 죽음. 그래서 어떤 배우와 감독보다도 더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이 은 주
1980 - 2005
대표작 : 번지점프를 하다, 오 수정, 연애소설, 주홍글씨, 태극기 휘날리며 등
여덟번째 안타까운 죽음은 이은주이다. 그의 죽음도 불현듯 다가왔다. 어느날 갑자기 그의 자살기사가 떴을 때 다른 스타와 감독의 죽음처럼 믿기 어려웠다. 아직도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이병헌을 기다리기 위해 빗속에서 기다리던 장면이 눈에 선했는데, 그 좋았던 배우가 스스로 목을 매다니.라는 생각에 깜짝 놀랐던 것 같다. 충분히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고, 앞으로도 훨씬 더 좋은 연기를 보여줄 거라 생각했는데. 자신의 능력을 자신의 연기를 모두 보여주기도 전에 좋지 않은 일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해야했던 배우. 지금 살아있다면 어떤 모습을 보여줬을까.라고 생각하면 더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정 은 임
1968 - 2004
대표작 : FM 영화음악실
아홉번째 안타까운 죽음은 정은임 아나운서다. 사실 정확히 영화인은 아니지만 나에게 그녀는 항상 영화음악실의 진행자였고 그래서 언제나 영화인이었다. 잡지나 신문을 통해 영화저널을 접하기 어려웠던 고등학생 시절. 그녀의 영화음악실은 우리에게 영화를 가르쳐주고, 영화소식을 전해주고, 영화음악을 들려주던 선생님이었고 잡지였으며 소식통이었고 영화음반이었다. 아마도 그녀를 통해 영화를 알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만큼 당시 우리에게 정은임의 영화음악실은 절대적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동차 사고로 사경을 헤맨다고 했을 때, 지금까지 말한 어떤 영화인의 죽음보다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영화를 좋아하던 그 시절의 한 페이지가 송두리째 사라져버리는 느낌이었다. 이제 더이상 그녀의 목소리로 영화음악실을 들을 수 없게 되었구나. 그녀의 죽음은 그래서 무엇보다 더 안타까웠다.
에드워드 양
1947 - 2007
대표작 : 광음적고사, 고령가소년 살인사건, 하나 그리고 둘 등
열번째 안타까운 죽음은 에드워드 양 감독이다. 몇편의 필로그래피를 남기진 못했지만 그의 영화는 언제나 세계가 주목하곤 했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자신의 나라에선 개봉조차 못하는 감독이었다. 내가 에드워드 양 감독을 좋아하게 된 것은 결국 그의 유작이 되어버린 '하나 그리고 둘'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내 인생의 영화 중 한편으로 기록되어 있는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난 그 영화를 비디오로 봤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쉬웠다. 그래. 이제 그의 영화가 나온다면 무조건 달려가 극장에서 보는거다. 그렇게 다짐했지만 암이라는 병마가 그를 데려가면서, 그는 더이상 신작을 만들지 못했다.
히스 레저
1979 - 2008
대표작 : 기사 윌리엄, 브로크백마운틴, 아임낫데어, 다크나이트 등
열한번째 안타까운 죽음은 히스레저이다. 사실 나는 히스레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히스레저가 누구지?라고 생각했다. 정말 영화를 좋아하는 건 맞는지.. 그리고 기사를 읽고서 아. '브로크백마운틴'에 나온 배우구나.라고 생각하고 그걸로 끝이었다. 하지만 '다크나이트'를 보았다. 일찍 죽지 말았어야할 배우였구나. 여기 제2의 잭 니콜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배우가 있었구나. 안타까웠다. 이런 배우가. 이런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가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버리다니. 그도 앞서 일찍 떠난 배우들만큼이나 더 보여줄 것이 많았을텐데 이제 막 피어올라야했던 그가 바로 날개를 접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또다른 요절의 아픔을 느끼게 됐다.
최 진 실
1968 - 2008
대표작 :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미스터 맘마, 마누라 죽이기, 편지 등
마지막 열두번째는 오늘 새벽 유명을 달리한 최진실이다.(정확하게 말하면 어제가 되겠다.) 이 포스트를 올리게 된 이유도 최진실에 대한 명복의 의미다. 오늘 아침 인터넷을 통해 그녀의 죽음을 전해들었을 때, 이게 뭐지?라는 생각과 함께 현실감이 사라져버렸다.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잘못 읽고 있는 건가? 이거 오보아냐?라는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잠시 후 틀어본 라디오에서 최화정은 울먹이며 방송을 하고 있었고, 홍진경은 방송을 하지 않았다. 마치 이 모든 것이 거짓말 같아서 계속 어안이 벙벙해져있었다.
우리세대에게 최진실이라는 의미는 각별하다. 고등학생 시절 과연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던 남학생이 얼마나 됐을까? 아니 다른 배우나 가수를 좋아했다고 해도 그녀를 같이 좋아하지 않은 남학생이 얼마나 됐을까? 그녀는 우리에게 말 그대로 한 시대의 아이콘이고 상징이었으며 남학생들의 로망이었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의 상큼함. 우린 그녀에게 열광했다. 그녀가 나오는 영화가 상영될 때 그녀가 스크린에 나오면 카메라 플래쉬가 터졌고, 그녀가 의류광고를 하던 카탈로그는 품귀현상이 일어나곤 했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그런 존재였다.
어쩌면 최진실은 '영화인' 이나 '배우'라기 보단 '탤런트'에 가까울지 모르지만 내 기억에 항상 남아있는 최진실은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서 상큼발랄한 새댁이고, '당신은 모르실거야'를 부르며 삑사리를 내던 엉뚱한 새댁이다. 물론 탤런트로서 드라마에서 보여준 그녀의 연기력은 영화의 그것을 능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기억, 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아직 그대로였다. 어쩌면 그것은 그 시절의 기억을 잊고 싶어하지 않는 내 바람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녀는 단지 내 기억으로만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그녀가 출연했던 영화들, 드라마들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웃고 울었으며 그녀의 외모에 빠졌던만큼 연기에 감탄하며 항상 함께 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 언제나 그모습 그대로 남아있어줄 거 같았던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 어떤 루머가 뒤에 있었던 간에, 어떤 소문이 횡행하던 간에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던 그녀였기에 더더욱 안타깝다. 우리 시대는 또한번 좋은 배우를 잃었다. 항상 톱의 위치에 있던, 항상 우리 앞에서 자신의 연기를 보여줄 거 같았던 배우 하나를 우리는 그렇게 떠나보냈다. 그 슬픔은 아직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 진심으로 그녀의 명복을 빈다.
고맙습니다.
당신이 있어주어서.
안타깝습니다.
당신이 더이상 있어주지 않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