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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넘어선 메마름으로 바짝 말라버린 메시지... <풍선을 샀어>

백혁현 |2008.10.05 23:35
조회 50 |추천 0


  소설들은 어딘지 푸석푸석하다. 윤기가 없는 소설들에는 바짝 마른 건기의 냄새가 가득하다. 비 내려야 할 시기가 한참 지나고 또 한 시기쯤이 더 지나서, 찾아왔던 코끼리도 발을 돌리고 물 냄새의 기억마저도 사라진 듯한 메마름만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작가의 건조함은 도를 넘어서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구상의 모든 것이 자연의 일부이듯 소설도 자연의 일부라면, 이제 이 소설들에도 비, 내려야 마땅할 터인데...


  「풍선을 샀어」.
  “어느 날 토마스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풍선을 사라. 그것은 나의 친구이자 주치의였던, 훗날 베를린의 샤리테 병원 신경정신과 닥터가 된 토마스가 내게 내린 치료 방법 중 하나였다. 불안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때마다, 호흡이 거칠어질 때마다 나는 숨을 깊고 빠르게 쉬면서 후, 후, 훕훕훕, 풍선을 불며 호흡을 조절했다.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해도 쉽게 공황 발작을 일으키지 않도록 과호흡 상태에 익숙하게 만들기 위한 일종의 호흡 훈련법이었다...” 머나먼 도시에 살던 당시에 받았던 도움은 이제 오라버니의 집에서 살며, 니체의 삶의 방식을 따르고자 노력하는 내가 학생으로 있는 J에게로 전수된다. 그나저나 탄력없는 나의 삶이 니체의 삶을 따라 잡을 수 있겠는가.


  「달팽이에게」.
  “비 오는 날이다. 그리고 밤이다... 달팽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땅이나 나무가 젖어 있어 아무리 먼 데라도 달팽이들이 쉽게 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 고모 숨이 위태롭게 끊어졌다 이어지고 있었다... 가장자리부터 차츰 하지 고모는 희미해지고 있었다.” 나의 위태로운 사랑과 겹쳐지는 하지와 요지라는 두 고모의 죽음의 이야기...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하지만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해도 끄덕없이 어디론가 움직이고야 마는 사랑과 죽음에 대하여...


  「형란의 첫번째 책」.
  “나는 돌아가서 남편의 책상 앞에 앉을 생각이에요. 거기 앉아서, 그가 돌아오기를 다리겠어요. 시간이 흐른 후 나도 나의 삶을 살았다, 썼다, 그리고 사랑했다, 라고 짧게 요약할 수 있다면 나의 삶은 아주 실패한 것으로 끝나지는 않을 거예요...” 남편을 찾아서 찾아간 낯선 나라의 낯선 도시, 그 도시에서 자신을 받아들여준 나와 다를 바 없는 이방인의 무리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남편의 행적을 좇다 마주친 도서관의 쓰야키 씨를 향하여 주절주절 이야기를 한다, 내 생에 최초의 작품처럼...


  「버지니아 울프를 만났다」.
  “... 나는 다시 버지니아 울프를 만났다... 나는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무엇을 하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기 전에는 아무 일도 진짜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을 쓰면 고통의 원인이 줄어들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길이 하나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될 거라고도 말이다...” (작가의 자의식은 소설 속의 주인공을 통해 자꾸만 연예인을 만나듯 유명 문인 혹은 철학자를 만나게 하나보다.) 뇌에 물이 차오르는 할머니에게 떠밀려 이국의 도시에서 이국의 사람들과 살아가는 그녀의 구슬픔 따위...


  「밤이 깊었네」.
  “의혹도 베일도 다 사라지는 느낌이지, 라고 B는 밤에 관해 말했다... 밤이 오면 가까이 있는 것들에 대한 느낌이 달라진다고 B는 말했다... 그리고 또 B는 말했다. 밤은 나를 죽음으로 걸어가도록 설득하지. 생동적이고 매혹적인 것은 싫다고 말했던 사람이었다. 그건 사실일 것이다. 그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 나를 만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알고 있었다. 밤이 생동적이고 매혹적인지...” 파킨슨병에 걸려 조금씩 굳어가는 엄마, 그리고 어느 날 나무를 들이받고 죽어버린 B... 깊은 밤, 깊은 밤처럼 떠올릴 수 있을 법한 사람들을 위하여...


  「2007, 여름의 환(幻)」.
  “... 거짓말을 하는 데 필요한 첫번째 조건은 적어도 거기에는 두 사람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 이외의 다른 한 사람이.” 아우그스티누스의 거짓말 그리고 남편의 손가락에서 사라진 결혼 반지와 나이 어린 연인 B와의 술자리... 사실 정말 속이기 이려운 것은 ‘나 이외의 다른 한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마흔에 대한 추측」.
  “... 나는 내 삶을 냉정하게 돌아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나는 올해 삼십구 세가 되었고 이제 칠 개월 후면 마흔 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닥터 현을 찾아가 자문을 구한다. 그리고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이 나의 동년배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겨우 깨닫게 된다. 가장 단순한 삶을 위하여, 라는 제언이 붙을만하다. (그러고보니 삼개월 후면 이제 마흔 하나가 된다. 추측조차 불가능하구나, 혹은 추측의 가치조차 없거나...)


  「달걀」.
  “... 내 주머니 속으로 가비가 그 파란색 달걀을 불시에 쑥 집어넣었다. 무슨 돌덩어리라도 짊어진 사람처럼 나는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베를린에 갔다 우연히 만나게 된 가비라는 여자, 그리고 떠나는 날 가비에게서 받은 달걀 한 개의 무게... 그리고 한때는 유명 탁구선수였으나 이제는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던 이모의 죽음...


  사실 정신을 아주 바짝 차리고 읽는다고 해도 이 작가의 메시지를 읽어내는 일은 어렵다. 하지만 그만큼 쉬울 수도 있다. 소설가가 인용하는 여러 작가들을 읽어 내는 것으로, 소설가가 인용하는 여러 사례들을 읽어 내는 것으로 메시지에 갚음을 해도 상관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설의 메시지와 작가가 거론하는 사례들의 매칭이 매끄러워보이지는 않는다. 커플 매칭 사이트에서 억지로 소개시킨 남과 여, 같다고 하며 조금 지나치려나. 하지만 뭐, 그렇게 해서 결혼에 골인에 이르는 커플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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