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사라마구의 동명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이 영화는 <콘스탄트 가드너>, <시티 오브 갓>으로 이름을 알린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의 작품이다. 어느 정도 낯이 익다 하는 배우들-줄리안 무어, 마크 러팔로, 대니 글로버 등-이 주요 캐릭터로 등장하지만, 영화에서는 이들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건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 예를 들어 마크 러팔로의 경우 안과의사 역을 맡았는데, 여기서는 그저 ‘닥터’로만 불린다. 아내로 나오는 줄리언 무어도 ‘의사의 아내’, ‘제1병동 대표’ 등으로 나올 뿐이다. 원작을 읽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영화적 설정이라고 해도 익명성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지 않고 서 있는 차, 뒤에 늘어선 차량행렬들이 연신 경적을 울려 대지만 선두는 꼼짝도 않는다. 갑자기 눈에 뭔가가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면서 앞이 보이지 않게 된 한 남자. 앞은 안 보이는데 그에게 모든 건 그저 하얗게만 비춰진다. 그의 상태를 확인해 보던 이, 집까지 그의 차를 몰고 데려다 준 이 등 그와 접촉한 사람들 역시 이후에 눈이 멀게 된다. 아내는 물론이요 이후 이들과도 어떻게든 조우하게 된 사람들은 눈이 멀게 되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전염병은 급속하게 도시로 퍼져 나간다.
최초의 환자를 검안했던 안과의사 역시 아침에 눈을 뜨니 모든 것이 보이지 않게 된다. 감염이라 판단하고 신속하게 보건당국에 연락한 뒤 그는 격리 수용 조치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 된다. 아내는 눈이 멀지 않았으나 남편을 따라 수용소로 향한다. 이후에 갑작스레 눈이 멀게 된 사람들이 이 수용소를 채워 나가고 당국은 당황한다. 원인도 알 수 없는데 환자들이 말하는 증상은 다들 똑같았다. 눈에서 뭔가 흘러내리는데 앞이 하얗게 보인다고. 당국은 당황한 듯 제대로 된 수용시설을 제공하지 못하고 환자들의 불만은 쌓여 간다. 의사의 아내는 제 1병동 대표를 맡으며 남편과 함께 수용소의 규칙 등을 민주적으로 정하려 한다. 한편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의사의 아내는 다른 이들의 뒷바라지를 혼자 도맡아 하게 되는데 남편에게는 이것이 꼭 달갑지만은 않다. 어느덧 격리시설의 인원이 다 차게 되고 제3병동의 대표(가엘 가르시아 베르날)가 폭군으로 군림하려 하면서 나름 평화롭던 수용소 생활은 갈등을 겪는다. 3병동은 총으로 모든 것 위에 올라서며 식량 배급권을 독점한다. 이후 이곳의 모든 것은 순전히 군주(?)의 자의대로 움직이게 되며 처음에 정했던 원칙들은 깨지게 된다. 각 병동에서는 식량을 타기 위해 여자들을 성노예로 바치는 상황에까지 직면하게 되는데...
주제 사라마구의 이름은 많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의 소설들은 전혀 읽어보지 않았다. 영화보다 소설의 묘사가 더 세밀하고 또 함의들이 잘 드러나겠지만, 영화가 원작이 담고 있는 정신을 훼손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원작의 주제도 영화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영화가 원작의 주제를 따라간 것이겠지만. 영화에서의 의문점이라면 왜 한 사람은 눈이 멀지 않는가와 갑자기 시력을 잃은 자들은 모든 게 하얗게 보인다고 말하는 것일까인데, 이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겠다. 일단, 하얗다는 것은 텅 비었다는 뜻이다. 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어디에 무슨 사물이 자리해 있다라는 말은 텅 빈 공간을 무엇이 채우고 있다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세상은 애초부터 무엇으로 채워져 우리에게 선사된 것이 아니라 비워진 것을 채워나간 거이다. 건물과 차들, 그리고 요란한 광고판, 무엇보다도 사람들. 그렇지만, 눈을 감아버리면 그것들로 꽉 찬 도시는 텅 빈 공간과 마찬가지로 된다. 그리고 이 비어있다는 현상은 가시적인 것 외에도 우리의 내부에서 무엇인가가 빠져 나갔음을 뜻하기도 한다. 그건 바로 희망이다. 전염병 환자처럼 취급받고 제대로 구비되지 않은 격리시설에 수용된 그들. 환자는 늘어가만 가고 수용소는 꽉 차 가는데, 이 전염병의 해법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의 아내가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이라 해도, 어쨌든 눈 먼 자들은 서로가 같은 처지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들에게 이름이 딱히 필요치 않다. 의사의 아내도 시설에 남아 있으려면 익명성을 유지해야 하며 이들과 같은 처지가 되어야 한다.
또 남들이 불러줄 수 있는 이름을 지워버림으로써, 이들은 죽은 자, 유령이 된다. 이름없는 자들은 도시를 배회하는 유령이다. 불러줄 이름이 없기 때문에 떠돌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격리시설에 수용된 이들은 보이지 않는 자들의 사회를 나름 구성해간다. '희다'라는 상태가 성서에 따르면 우리 이전에 최초로 존재한 빛의 색이라고 한다면 거의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들로 연대해 만들어 가는 눈 먼 자들의 사회야말로 최초의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창조해 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속 감염자들의 '하얗게 보인다'는 증상을 갖고 이 '하얗다' '희다'의 의미를 추적해 나가면 다층적으로 <눈 먼 자들의 도시>를 분석할 수 있겠고 또 우연찮게도 그것에 맞는 상황들이 영화 속에 나온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성서에서는 최초의 인류에게 만족스런 환경이 제공된 반면 이들은 제한된 공간 안에서 적합한 생존방식을 찾아야 했고, 바깥에서 학습한 대로 이들은 나름의 사회를 구성한다는 점이랄까. 적어도 제 3병동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희망이 부재한 세상 혹은 환자들의 세계. 눈 먼 자들로 넘쳐나는 도시와 더 이상 이들을 수용할 수 없게 된 격리시설, 그리고 치료법도 없고 원인도 모른 채 세월을 보내야 하는 사람들. 화재로 전소된 격리시설에서 나와 보니 세상은 무정부 상태다. 이때의 도시는 시력을 잃은 자들은 먹을 것을 갈구하며 나머지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텅 빈 공간으로 그려진다. 우리 마음 속에 희망이 빠져 나갔다면, 세상의 모습은 그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그렇지만 '하얗다'는 건 비어있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부활을 뜻하기도 한다. 성서 속의 예수의 부활로 해석되는 <반지의 제왕>에서의 간달프의 부활를 예로 들어보자.그에게는 광채가 나며 이제는 더 이상 '회색의 간달프'가 아니라 '백색의 간달프'로 불리게 된다. 로한의 세오덴 왕을 다시 그 전설적인 용맹한 왕으로 불러낼 때 그는 그의 빛을 세오덴 왕에게 투사한다. 그리고 세오덴 왕은 이전의 기력을 다시 찾는다. 그러니 '하얗다' '희다'라는 건 부활과 동시에 희망을 주기도 한다. 최초의 감염자가 갑자기 보인다고 말했을 때 모두에게는 희망이 생긴다. 그 뒤로는 두 번째, 세 번째 감염자들이 눈을 뜰 희망, 남아있는 자들은 그것을 보았다.
인도자의 역할은 중요하다. 어디로 가든 받아주지 않는 무리들. 모든 사람들이 감염된 후에도 이들은 그저 격리된 존재로 남아있어야만 했다. 희망을 잃고 도는 무리들을 이끌어 가는 리더. <눈 먼 자들의 도시>의 의사의 아내는 우리를 격리시설로 텅 빈 도시로 안내한다. 여전히 그가 왜 눈이 멀지 않았는지는 수수께끼이지만 우리는 그의 눈으로 화면을 보게 되고 사건의 추이를 지켜 보게 된다.
광신. 밀로스 포먼의 소설이자 영화인 <고야의 유령>에서는 시대의 변화에 맞춰 변신해 가는 인물과 격변의 시대를 자신의 느낌대로 묘사하는 화가, 화가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한 소녀가 나온다. 구악인 종교재판의 부활로 이 소녀가 심문에 걸리고 고문을 받으며 정신병원에 수감되기까지, 그리고 한 야심가가 사제에서 혁명의 총아로 모습을 바꾼다. <눈 먼 자들의 도시>의 격리시설과 <고야의 유령> 그리고 밑에 있는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정신병원의 모습은 어딘가 유사성이 있어 보인다. 잘 곳이 없어 아무렇게나 수용된 사람들, 복도에서 잠을 청하는 이들, 오물들이 널려 있고 온갖 사람들이 섞여 있다. 방에 들어간 사람들은 차라리 낫다. <고야의 유령>에서의 정신병원 묘사나 <눈 먼 자들의 도시>가 보여주는 격리시설의 모습은 같다. 시대의 격차에 불구하고.
시대를 비웃는 천재, 그의 웃음에는 광기마저 묻어 난다. 그의 천재성에 가려 늘 2인자의 자리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던 궁정악장 살리에리. 밀로스 포먼의 <아마데우스>는 모짜르트 사망원인설들 중 하나인 독살설을 채택한다. 피터 쉐퍼의 원작을 스크린에 가져온 이 영화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천재가 시대를 잘못 만난 탓에 불화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의 전매특허 웃음소리는 그런 것을 반영한 것이리라. 모짜르트의 교향곡 25번이 배경음악으로 흐르고 한 노인이 자신의 손목을 긋는다. 자신이 모짜르트을 죽였다고 고백하면서. 이내 정신병원에 수감된 이 늙은이는 다름 아닌 살리에리다.. 이게 영화 <아마데우스>의 첫 장면이다. 그리고 그는 정신병원에서 자신을 찾아온 신부에게 한 천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곳에 잠깐 나오는 정신병원의 모습은 <고야의 유령>과 다르지 않은데, 그건 일차적으로는 감독이 같기 때문이기도 하고 영화 속 시대배경이 어느 정도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이기도 할 것이다. 천재가 시대와 불화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혼돈 혹은 격변기라 그랬는지 몰라도 이런 때의 불안감이 <고야의 유령>과 <아마데우스>에서 그런 대중없이 아무나 감금한 것처럼 보이는 병원의 모습은 시대의 불안감을 드러내 주는 것처럼 보인다.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격리시설의 사람들은 나름 사회를 구성했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하얗게 모든 것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일말의 불안감 같은 걸 느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영화의 수용시설의 풍경이 위의 영화들과 다르지 않은 것은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혼란한 시절에는 희망을 찾기가 어렵고 희망이 없는 곳에는 혼돈만이 존재할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