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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보이]지각있는 엘리트, 과연 필요했을까?

정주영 |2008.11.19 17:08
조회 47 |추천 0

 

 

 

 

 

시절과는 상관없이 여색잡기에 빠져 사랑 하나만 믿고 달려드는 이해명(박해일). 같은 총독부에 검사로 근무하게 된 그의 친구 신스케(김남길), 이해명을 철이 들게 한 조난실(김혜수).

 

해명의 적극적인 구애로 난실은 그와 함께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른 채 사랑 하나만 믿고 달겨든 이 남자와 어딘가 자꾸만 엇갈린다. 둘이 있어도 한 쪽에만 초점을 맞추는 카메라는 그런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그런데 왜 그럴까?

 

하나의 시퀀스가 제대로 끝맺은 것 같지 않고 어딘지 모르게 여운을 주며 아쉬움까지 남기는 <모던 보이>. 나는 영화가 마음에 안 든다. 지금이야 이 영화가 극장에서 간판을 내렸으니 쓸 수 있는 말이겠지만, 영화를 꼭 그렇게 마무리 지어야 했냐는 아쉬움이 있다. 시대와는 상관없이 그저 낭만에 취해 노는 한 인간을 보여주었다면 누군가는 들고 일어났을까? 차라리 그런 게 낫다고 본다. 해명은 사랑 때문에 지하 독립운동의 한복판에 뛰어든 꼴이 되었지만 전후 사정은 그도 모른다. 그저 그에게는 난실 뿐이었다.

 

엘리트. 이해명의 머리는 소설가이지 시인인 이상의 그것을 차용한 것이다. 게다가 조선총독부라니. 지금이야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예전엔 그곳이 국립중앙박물관이라고 해서 자주 드나들었더랬다. 내 전공이 그 쪽이라. 건물 하나만은 괜찮았는데, 문제는 지어진 목적이 불손하기 짝이 없어 독일에서 관광 온 사람도 이 사연을 알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실제로 이상도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사로 근무했었고 그는 수재 중의 수재였다고 하는데, <모던 보이>에서 총독부에 들어앉은 사람들은 조선인처럼 보이지만 시대상에 맞게 해석하면 해명 혼자만 조선인이라고 보는 게 맞을 거다. 수재라고 해도 자각있고 시대가 어떤 때인지를 알면 독립운동에 투신하겠지만 오히려 그는 자신의 입지를 이용해 낭만을 즐긴다. 한심하게도 보이겠지만 누구나가 다 독립운동에 투신할 수 있던 게 아닌 이상, 그를 친일파라고 부르기도 어째 어정쩡한 구석이 있다.

 

난실에게 집착할 수록 독립운동에 한 발짝씩 더 다가가는 해명에게 애초에 독립 따윈 문제가 아니다. 그에게는 사람, 여자, 그러니까 난실만 안중에 있을 뿐. 그래서 영화는 뭔가 자꾸만 미끄러지고 제대로 매조지 못하는 시퀀스들과 아이러니한 정서로 넘쳐난다. 영화관계자가 아닌 이상에야 이런 것을 일반관객들이 제대로 받아들이고 넘기기엔 힘들었을 것 같다. 해명의 사랑놀음 보다 적어도 엘리트라면 낭만도 낭만이지만 이런 정도는 해줘야, 그리고 이런 의식쯤은 갖고 있어야 한다는, 그것도 일제시대라면. 그런 논리를 감독은 교묘하게 감춘다. 아쉽거나 뭔가 찜찜하게 끝난 시퀀스들의 여운들이 해명의 회심, 혹은 개심으로 드러난다. 그래도 그가 총을 든 이유는 독립 때문이 아니라 난실을 위해서 라고 할 수 있다.

 

 

영화로도 제작된 소설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은 이상이 남긴 시 &#-9;건축무한육면각체&#-9;를 단서로 그가 남긴 수수께끼를 풀어낸다. 소설에 따르면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 총독부에 근무할 당시만 해도 김해경이라는 이름을 썼었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당대의 수재요, 총독부의 유일한 조선인이었다고 한다. 어느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돌연 총독부를 나와 갑자기 봉두난발을 하고 이름을 이상으로 바꾸고 유곽을 어슬렁 거리기 시작한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기생 금홍과의 로맨스, 그리고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가 되었다. 이상의 소설 <날개>에 나오듯이. 그러니까 <날개>의 주인공은  사실은 그인 셈이다.

 

소설은 이상이 왜 총독부를 나왔는지 나오기 직전 수행한 일이 무엇인지 등을 추적하고 여전히 일제가 남겨놓은 잔재들이 암약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위 소설을 팩션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정지우 감독의 <모던 보이>의 해명이라는 캐릭터가 이상을 모델로, 그것도 헤어스타일만 그렇게 차용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 연관성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해명이라는 이름과 김해경이라는 이상의 본명도 어딘지 어감이 비슷하지 않은가. 해경이 총독부를 나와 이름을 바꾸고 시인이자 소설가요 낭만(?) 보이로 탈바꿈했다면 <모던 보이>의 해명은 엘리트라는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낭만을 동시에 추구하는 그런 인물이다. 아무 것도 할 게 없어서 놀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면 이해명을 위한 변명이 될 테지만 오히려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은 감독은 왜 그에게 시대가 요구하는 행동하는 지식인이 될 것을 종용했는지다. 그냥 그대로 두었다면, 난실에게 집착하지 않았다면 이해명이라는 인물이 꼭 시대의 부름에 응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이다. 요컨대 시대성이 개입하지 않은 개인의 모습이라면, 그리고 그 인물에 대한 판단을 관객에게 맡겼다면 어땠을까 하는 거다.

 

 

 

이와 관련해서 볼 다른 한 편의 영화는 장진영, 김주혁 주연의 <청연>이다. 어줍잖은 민족주의 논란 탓에 희생된 영화. 여기서는 시대도 시대지만 박경원이라는 한 개인의 모습에 치중하며 일제시대에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또한 시대의 유행도 즐겼던 한 인간의 모습이 담겨있다. 어느 입장에 서냐에 따라 역사적 인물에 대한 판단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영화는 그 모든 것을 보류한 채 판단을 관객에게 맡긴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미화한 것 같지도 않다. 하늘을 날고 싶어서, 제대로 된 비행기술을 배우고 싶어서 일본으로 건너간 그녀를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개인의 꿈은 시대의 상황에 부딪힌다. 결국은 조국에서도 일본에서도 그녀는 꿈을 이룰 수 없어서 하늘로 오르고 만다. 그리고는 그녀는 생을 마감한다. <청연>의 카메라는 그 모든 사건을 참으로 담담하게 담는다.

 

지금 나의 삶이 시대의 요구와 얼마나 합치하는가를 누군가 따지고 있다면 그는 어떤 사람일까. 대단한 포부를 지녔거나 참새들 틈에 낀 봉황 같은 사람이 아닐까. 누구나 자신을 그렇게 여길 수는 있지만 아무나 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제시대라고 해서 모든 조선인들이 대동단결하여 일제에 저항한 것은 아닐텐데, 우리의 민족주의는 마치 꼭 그래야 했던 것처럼 아니 과거의 우리 조상들이 모두 그러했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당연히 어떤 요구 앞에서는 그럴 것을 종용하는 것만 같다.

 

<모던보이>의 해명이나 <청연>의 박경원은 한 개인이었을 뿐. 그런데, 친일도 독립운동에도 가담하지 않았던 사람은 역사가 어디에다 위치시켜 줄까? 해명은 감독에 의해 독립운동으로 기울고, 박경원은 그러지 못했다. 대신 그녀는 하늘을 택했다. 그 높은 곳에서야말로 시대의 버거움도 벗어던지고 잠시나마 개인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진정한 공간이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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