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수요일
매월 첫 번째 수요일은 참으로 싫은 날이다. 그것은 두려워하고 초조해 하며 맞이하여, 용기를 가지고 참아내고는, 빨리 잊어버리고 말아야 하는 것이다. 마룻바닥은 얼룩 한 점 없어야 하고, 의자란 의자는 먼지 하나 없어야 하며, 모든 침대도 구김살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잠시도 가만히 못 있는 97명의 작은 고아들을, 문질러 씻겨서 머리를 깨끗이 빗질하고, 풀이 빳빳하게 먹은, 바둑판 무늬를 넣어 굵은 실로 짠 무명 옷으로 갈아입혀 단정하게 단추를 채워 주어야 한다. 그리고는 97명 하나하나가 얌전하게 굴어야 한다는 주의를 듣고, 평의원이 말을 걸어 오면 '네, 평의원님'이라고 똑똑히 대답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다짐을 받는다.
정말이지 고민스러운 하루였다. 가엾게도 저루샤 애벗은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이므로 자연히 그 일들을 떠맡게 된다. 그러나 이 특별한 수요일도 언제나와 같이 그럭저럭 넘어갔다.
저루샤는 고아원에 오신 손님들에게 대접할 샌드위치를 모두 만들었으므로, 주방에서 몰래 빠져나와 항상 하던 자기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그녀가 특별히 시중을 들어야 하는 방은 F실이며, 그 곳에는 네 살에서 일곱 살까지의 꼬마들이 있고, 11개의 작은 침대가 한 줄로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저루샤는 자기가 맡은 아이들을 불러모아, 구겨진 옷을 펴 주기도 하고 코를 닦아주기도 하면서 빵과 우유와 자두가 든 푸딩을 먹는 즐거운 30분을 보내기 위해, 들떠 있는 아이들을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녀는 창가의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맥박이 뛰는 관자놀이를 차가운 유리창에 갖다 댔다. 그녀는 아침 5시부터 줄곧 선 채로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했고,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원장으로부터 꾸중을 듣기도 하고 재촉을 받기도 했다.
리펫 원장님은 평의원이나 손님들 앞에 나섰을 때처럼 조용하고 위엄 있는 태도를 무대 뒤에서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저루샤는 누렇게 시든 넓은 잔디밭과 그 앞의 고아원 부지의 경계가 되어 있는 높은 철책 저쪽에, 드문드문 별장이 있는 언덕과 잎이 모두 떨어진 나무숲 사이로 솟은 마을 교회의 뾰족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도 이것으로 끝난 것이다- 저루샤의 생각으로는 오늘은 대성공이었다. 평의원과 시찰 위원들은 고아원 안을 둘러보고 저마다 자기에게 돌아온 보고서를 읽으며 차를 마시고는, 이것으로써 앞으로 한 달 동안은 귀찮은 고아원의 일을 잊고 있어도 된다고 좋아하면서 서둘러 즐거운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저루샤는 몸을 앞으로 내밀듯이 하여 고아원 문을 미끄러져 나가는, 마차와 자동차의 물결을 얼마쯤 동경이 섞인 호기심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저루샤는 차례차례로 언덕 중턱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커다란 저택을 향해 돌아가는 사람들의 탈것을 뒤쫓아가는 것을 상상하고 있었다. 저루샤는 털외투를 입고 새의 깃털을 장식한 모자를 쓰고, 좌석 뒤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운전수에게 '집으로' 하고 차갑게 명령하고 있는 자신을 상상하였다. 그러나 자기가 돌아갈 자기 집 입구까지 가서는 상상의 화면이 흐려지고 마는 것이었다.
저루샤는 상상력이 풍부했다. 그것은 리펫 원장님으로부터 조심하지 않으면 앞으로 곤란할 거라는 주의를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제아무리 날카로운 상상력일지라도 저루샤가 들어가려고 하는 집의 현관에서 안으로까지는 데려가 주지 않았다. 아무리 호기심이 많고 모험심이 많다고 해도, 저루샤는 가엾게도 아직 여는 가정집 안에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었으므로, 고아들에게 시달림을 받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상상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저루샤 애벗,
사무실에서 볼일이 있대요.
빨리 가 보세요.
그게 좋을 거예요!
성가대에 들어 있는 타미 딜런이 그렇게 노래하면서, 계단을 올라와 복도를 지나서 F실로 가까워 오자 노랫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저루샤는 마지못해 창가를 떠나 현실의 고통과 마주쳤다.
"누가 날 부르니?"
저루샤는 타미의 노래를 가로막으며 물었다.
"리펫 원장님이 사무실에서 몹시 화를 내고 계십니다! 아-맨!"
타미는 노래하듯이 가락을 붙여 말했으나, 그 말투에는 조금도 악의가 없었다. 아무리 장난꾸러기 고아일지라도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기분이 상해있는 원장 앞에 불려가는 누나를 동정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타미는 이 누나한테 팔을 꽉 잡혀서 끌려가기도 하고, 코가 떨어져 나갈 만큼 얼굴을 박박 문질러 씻길 때도 있으나 저루샤가 좋았다. 저루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갔으나, 이마에는 주름이 두 줄 잡혀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 샌드위치의 빵이 마음에 들 만큼 얇게 썰어지지 않았나? 호도과자에서 호도껍질이 나왔단 말인가? 여자 방문객 중 한 분이 수지 호돈의 구멍 난 양말을 발견했나? 아니면... 아아, 끔찍해!... 내가 맡은 F실의 장난꾸러기들이 평의원님에게 무슨 실례되는 짓이라도 저지른 게 아닐까?
아래층의 긴 복도에는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그리고 저루샤가 계단을 내려가고 있을 때, 마지막 평의원이 막 돌아가는 중이어서 주차장으로 통하는 문가에 서 있었다. 저루샤는 그 남자의 모습을 얼핏 보았을 뿐이었으나, 그 인상은 키가 몹시 크다는 것뿐이었다.
그 사람은 구부러진 길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동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차가 갑자기 움직여 가까이 다가와서, 번쩍거리는 헤드라이트가 정면으로 비추자, 그 사람의 그림자는 집안의 벽에 뚜렷이 던져졌다. 그 그림자는 바닥에서 복도의 벽에 걸쳐 손발을 기분 나쁠 만큼 크게 그려내었다. 그것은 마치 굼실거리고 있는 거대한 긴 다리 잠자리처럼 보였다.
저루샤의 걱정스러운 듯한 찌푸린 얼굴이 갑자기 웃음으로 변했다. 그녀는 본디 쾌활한 성격이어서 대수롭지 않은 일에서도 재미를 찾아내곤 했다. 만일 평의원과 같이 위엄 있는 인물로부터 무엇이든 유쾌한 것을 찾아 낼 수 있다면 그야말로 횡재인 것이다. 저루샤는 이 조그마한 일로 매우 유쾌해져서 웃는 얼굴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나 놀랍게도 원장 역시 겉으로 드러내어 미소짓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눈에 띄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원장은 마치 손님을 대할 때와 다름없을 만큼 기분이 좋은 얼굴이었다.
"저루샤, 앉거라, 너에게 할 얘기가 있으니까."
저루샤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침을 삼키며 기다렸다. 한 대의 자동차가 창문에 빛을 비추자, 리펫 원장은 그것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방금 나가신 손님을 보았겠지?"
"뒷모습을 보았을 뿐이예요."
"그 분은 평의원 가운데서 으뜸가는 부자이시고 이 고아원의 경영에도 많은 돈을 기부했단다. 그러나 그분의 이름을 밝힐 수는 없어. 그분이 밝히지 말 것을 특별히 조건으로 하고 계시니까."
저루샤는 이제까지 한 번도 평의원의 이상한 점에 대해, 원장과 이야기하기 위해 사무실에 불려 온 일은 없었으므로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분은 이 곳에 있던 몇 명의 남자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졌었지. 너는 찰스 밴턴이나 헨리 프레이즈를 기억하고 있지? 그 애들을 이 평의원님이 대학에 보내 주셨던 거야. 두 사람은 아낌없이 내준 돈의 대가로 공부를 잘 해서 좋은 성적을 얻었지. 그분은 그 이외의 대가를 바라지 않아요. 이제까지 그분은 남자아이들에게만 도움을 베풀었단다. 여기 있는 여자아이로서 얼마든지 도움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어도, 나는 도저히 그 분의 주의를 끌 수 없었어. 내 생각으로는 그분은 여자아이는 좋아하시지 않는 것 같아."
이쯤에서 무슨 대답이든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저루샤는
"그런가 보군요."
하고 대답했다.
"오늘의 월례회에서는 너의 장래 문제가 논의되었단다."
원장은 한동안 침묵한 뒤에 천천히 침착한 말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것은 갑자기 긴장한 상대방에게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너도 알고 있듯이 아이들의 나이가 열 여섯 살이 되면, 이 곳에 두지 못하게 되어 있어. 하지만 너의 경우는 특별한 조치였어. 너는 열 네 살로 이 곳 학교를 졸업했어. 품행으로 본다면 언제나 좋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매우 공부를 잘 했기 때문에 마을의 고등학교에 보내기로 했었지. 그런데 너는 그 곳도 곧 졸업하게 된 거야. 그래서 이 곳으로서는 더이상 너를 양육할 책임을 질 수가 없어. 어쨌든 너는 다른 아이들보다 2년이나 더 이 곳에 있었으니까."
원장은 저루샤가 특히 오늘과 같은 경우에는 자기 식비를 벌기 위해 열심히 대청소를 하고 있는 사실은 모른 체하고 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너의 장래 문제가 평의원에 제출되어 너의 이력이 검토되었단다. 남김없이 샅샅이 검토된 거야."
원장은 피고석의 죄인에게 비난의 눈길을 보냈다. 피고는 자기 이력에 특히 부끄러운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게 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두려워하는 척하였다.
"물론 지금의 네 입장으로는 당장 취직하는 것이 당연하겠지. 그러나 너는 학교에서 특히 국어 성적이 좋았던 것 같아. 여기 시찰 위원이신 프리차드씨께서는 학무 위원도 겸하고 계시므로, 너의 작문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신 모양이야. 그분이 너를 위해 좋은 보고를 해주신 거야. 그리고 프리차드씨께서는 네가 쓴 '우울한 수요일' 이라는 제목의 글짓기를 위원님들에게 낭독해서 들려 주었어."
저루샤의 두려워하는 표정이 이제는 진짜가 되었다.
"이렇게 은혜를 입고 있는 이 고아원을 놀림감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그다지 감사의 뜻을 나타내는 방법으로는 생각할 수 없어. 우습게 썼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몹시 후회하게 되었을 거야.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방금 돌아가신 그분은 특히 풍부한 유머 감각을 지니고 계신 분 같아. 그 버릇없는 글짓기가 마음에 드셔서 너를 대학에 보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거야."
"대학에요?"
저루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은 조건에 관하여 나와 의논하시기 위해 남으셨던 거야. 그 조건이라는 게 또 이상하지. 틀림없이 그분은 이상한 분이야. 그분은 너에게 창작력이 있다고 믿고, 너를 작가로 만들겠다고 계획하고 계시니까."
"작가로요?"
저루샤의 마음은 마비되어 버려, 다만 원장의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것이 그분의 희망이야. 무엇이 될지 안될지는 두고 보아야 알 일이지만, 그분은 용돈도 넉넉히 주시겠대. 자기 돈이라는 것을 다뤄 본 적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너무 많은 정도지. 그러나 이 일에 대해서는 그분이 세밀하게 계획을 세우셨으므로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처지는 못 돼. 너는 이번 여름은 여기 있었으니까, 프리차드 씨께서는 고맙게도 네가 대학에 가져갈 것을 돌보아 주시겠다고 하셨어. 너의 식비와 학비는 직접 대학으로 납부해 주실 거고, 게다가 공부하는 4년 동안 매달 35달러의 용돈을 주시겠다는 거야. 그 정도면 너는 다른 학생들과 같은 생활을 꾸려나갈 수가 있을 거야. 그러한 돈들은 매달 그분의 비서가 너한테로 부치고, 그 대신 너는 매달 한 번씩 감사의 편지를 써야 해. 감사 편지라고 해서 돈 이야기를 하라는 건 아니야. 그분은 그 일에 대해 말하는 건 좋아하지 않아. 너는 학과가 얼마만큼 진행되어 가는가, 또는 너의 매일 생활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 드리면 돼. 말하자면 너의 부모님이 살아 계셨으면 써 보냈을 그런 편지를 말이야. 그 편지는 비서 앞으로 하여 존 스미스 씨에게 보내게 되어 있어. 그 신사분은 존 스미스 씨는 아니지만 이름을 알리고 싶지는 않다고 하시니까, 네게 있어서 그분은 단순히 존 스미스 씨 이외의 그 누구도 아닌 것이니까. 편지를 요구하시는 까닭은 편지 쓰는 일만큼 문장 공부에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이며, 네게는 편지를 쓸 가족이 없으니까 이런 방법으로 편지를 쓰라는 거야. 그리고 또 네 학교 생활과 공부하는 과정을 알고 싶어하시며, 그분은 네 편지에 대해 일체 답장은 주시지 않을 것이고, 또한 그 편지 따위에는 그다지 흥미도 느끼지 않으실거야. 그분은 편지 쓰기를 매우 싫어하시고, 그리고 또 너에게 답장을 쓰는 것이 짐이 되면 곤란하다고 생각하시니까. 만일 꼭 답장을 필요로 하는 그런 일이 생기면 -이를테면 네가 퇴학 처분을 받거나 하게 된다면- 그런 일은 설마 없겠지만, 그런 경우에는 비서인 그리그스 씨와 편지를 주고받기로 되어 있어. 그리고 매월 한 번씩 보내는 편지는 너의 절대적인 의무이며, 이것만이 스미스 씨께서 요구하는 유일한 지불 방법이니까, 계산서를 지불하는 마음으로 반드시 꼬박꼬박 편지를 써 보내야 돼. 그 편지는 공손하고 또 연습한 흔적이 똑똑히 나타나도록 노력해라. 언제나 존 그리어 고아원의 평의원님께 드리는 편지라는 것을 단단히 명심하도록, 알겠지?"
저류샤의 눈은 빨리 나가고 싶어 못 견디겠다는 듯이 문쪽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 흥분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으므로, 다만 빨리 원장의 따분한 잔소리로부터 벗어나서, 생각을 가다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저류샤는 일어나서 시험삼아 한 걸음 뒤로 물러서 보았다. 원장은 손짓으로 더 있으라고 했다. 그것은 원장으로서 이렇게 좋은 웅변의 기회를 버리고 싶지 않았다.
"너는 네게 굴러들어 온 이 행운에 대하여, 그것에 대한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해. 너와 같은 환경에 있는 아이들이 누구나 다 이러한 행운을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언제나 이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네, 원장님 잘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야기가 끝나셨다면 전 프레디 퍼킨스의 바지를 기워 주어야 하니까요."
저루샤의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그리고 리펫 원장은 마지막 마무리 말이 허공에 떠버려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멍하니 그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루샤 애벗 양이 키다리 스미스 씨에게 보내는 편지
9월 24일
퍼거슨 기숙사 215호실에서
고아를 대학에 보내 주신 친절하신 평의원님께
저는 이 곳에 왔습니다. 어제 기차로 4시간 동안 여행을 했습니다. 몹시 이상스럽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이제까지 한 번도 기차를 타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대학이란 데는 매우 커서 몹시 어리둥절해지는 곳입니다. 저는 방을 나설 때마다 미아가 되어 버리곤 한답니다. 좀더 기분이 침착해진 뒤에 학교에 대해서 알려드릴 작정입니다. 그 때 학과에 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수업은 월요일 아침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토요일 밤입니다. 하지만 저는 우선 인사 편지를 쓰고 싶었던 것입니다.
알지도 못하는 분에게 편지를 쓰려니까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첫째, 편지를 쓴다는 그것부터가 이상합니다. 저는 이제까지 태어난 뒤로 편지라는 것을 서너 장밖에 써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잘 쓴 편지가 못 되더라도 너그러이 보아 주세요.
어제 아침 떠나기 전에 리펫 원장님과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원장님은 제가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또한, 저에게 이토록 친절하게 해주시는 신사분에게 어떠한 태도를 가질 것인가를 들려 주셨습니다. 저는 아주 예의바른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존 스미스 씨 따위로 불리기를 바라는, 그런 분에 대해 과연 그처럼 정중하게 대할 수 있을까요? 당신은 어째서 좀더 개성있는 이름을 고르지 않으셨나요? 마치 말을 매는 막대기 씨라든가, 빨래 장대 씨라는 분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듯 한 기분입니다.
저는 여름 동안 내내 선생님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랜 세월 뒤에 이렇게 누군가가 저의 일을 생각해 주시는 분이 생겨서, 저는 마치 가족을 찾은 듯한 기분입니다. 어쩐지 제가 누군가의 식구가 된 듯한 기분이어서 몹시 즐겁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일을 생각하려고 하면, 저의 상상력을 펼 내용이 너무나 작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건 단 세가지뿐인 걸요 뭐.
1. 선생님은 키다리이다.
2. 선생님은 부자이다.
3. 선생님은 여자애를 싫어한다.
저는 선생님을 여성을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부를까 하고 생각도
해보았습니다만, 그것은 내 자신을 모욕하는 거나 다름없겠지요. '부자 양반' 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마치 선생님에게 있어서는 돈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선생님을 모욕하는 결과가 됩니다. 그리고 또 부자라는 것은 극히 표면적인 성질의 것이니까요. 그리고 또 선생님 역시 평생동안 부자로 지낼 수 있을지 아닐지도 모르는 일이구요. 매우 영리한 사람들도 월 스트리트 (뉴욕의 증권거래소가 모여 있는 곳)에서 파산하고 있거든요.
그러나 적어도 선생님은 평생 동안 키가 큰 채로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생님을 '키다리 아저씨'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부디 기분 나쁘게 생각지 말아 주십시오. 이것은 친밀감이 담긴 극히 은밀한 이름이니까 리펫 원장님에게는 말씀 드리지 말아 주세요, 네?
이제 2분만 지나면 10시 종이 울릴 것입니다. 우리의 하루는 종소리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종소리에 의해 움직여야 합니다. 아주 씩씩하고 시원스러워서 마치 소방차의 말(이 무렵에는 말로 소방차를 끌었음) 이 된 듯한 기분입니다. 바로 지금 종이 울리기 시작했어요! 전등을 꺼야 할 시간입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제가 얼마나 열심히 규칙을 지키고 있는가를 보아 주십시오. 이것은 존 그리어 고아원에서 익힌 덕분입니다.
아저씨를 아주 존경하는 저루샤 애벗 올림
키다리 아저씨 귀하
10월 1일
키다리 아저씨께
저는 대학이 정말 좋습니다. 그리고 저를 이 곳에 보내 주신 아저씨가 정말 좋습니다. 저는 지금 너무너무 행복합니다. 한 시간 한 시간이 즐거워서 잠잘 틈도 없을 지경입니다. 이 곳이 존 그리어 고아원과 얼마나 다른지 아저씨께서는 상상조차 하시기 힘들 거예요. 저는 이 세상에 이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여자로 태어나지 않아서 여기에 올 수 없는 사람들이 불쌍해집니다. 아저씨가 젊은 시절에 계셨던 대학도 아마 이 곳만큼 멋있지는 않았을 거예요.
저의 방은 부속 병원이 새로 지어지기 전에는 전염병실로 쓰였던 탑 위에 있습니다. 이 탑의 같은 층에는 3명의 다른 여학생이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들에게 조금만 조용히 해달라는 안경잡이 상급생과 샐리 맥브라이드와 줄리아 러틀리지 펜들턴이라는 이름의 신입생입니다. 샐리는 머리털이 붉고 코가 들창코인데 매우 친절한 사람입니다. 줄리아는 뉴욕의 명문가의 딸로 아직 저를 본 척도 하지 않습니다. 그 두 사람은 같은 방을 쓰고 상급생과 저는 독방을 가졌습니다.
방이 모자라기 때문에 보통 신입생은 독방은 얻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독방을 얻었지 뭐예요. 아마 서무계가 제대로 자란 아가씨와 고아를 같은 방에 두는 것은 좋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거예요. 고아란 이런 득을 볼 수도 있는 거로군요!
저의 방은 북서쪽 구석에 있으며 창이 두 개인데 전망이 아주 좋습니다. 18년 동안 20명의 아이들과 한 방에서 지내 오다가 이렇게 혼자 있게 되니 몹시 편안한 느낌이 듭니다. 이번에 비로소 저는 저루샤 애벗을 사귈 수 있게 되었어요. 저는 저 자신을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아저씨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화요일
지금 신입생 농구팀을 짜고 있는 중인데 저도 끼여 줄 것 같습니다. 분명히 저는 몸집이 작긴 하지만 몹시 날쌔고 힘이 세며 강인한 정신력을 갖고 있어, 다른 사람이 공중에 뛰어오른 사이, 저는 교묘하게 남의 다리 밑으로 뚫고 들어가 공을 빼앗아 버릴 수가 있습니다. 연습은 아주 즐겁습니다. 오후에 운동장에 나오면 주위의 나무들은 붉고 노랗게 물들어 있고, 낙엽 태우는 냄새가 풍겨 옵니다(미국의 대학은 새 학년이 가을에 시작되므로). 그리고 누구나 다 큰 소리로 웃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제가 여태까지 보아 온 중에서 가장 행복한 소녀들이며 그 가운데서도 가장 행복한 것은 저입니다.
긴 편지를 써서 어떤 공부를 하고 있는가를 모두 말씀드릴 작정이었습니다만 (리펫 원장님이 아저씨가 그것을 알고 싶어하신다고 말씀하였으므로), 마침 지금 일곱째 시간의 종이 울리고 있습니다. 10분동안에 저는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운동장에 모여야 합니다. 아저씨께서도 제가 농구팀에 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이만 펜을 놓겠습니다.
저루샤 애벗
추신(현재 시간 9시)
샐리가 방금 제 방을 들여다보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난 집 생각이 나서 견딜 수가 없어. 너는 그런 기분 안 드니?"
저는 미소지으며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아주 훌륭하게 해 나갈 수 있을 거예요. 저는 향수병에 걸릴 염려는 없을 겁니다. 저는 고아원이 그립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어요. 아저씨는 그런 말을 들어보신 적 있나요?
10월 10일
키다리 아저씨께
아저씨는 미켈란젤로에 대해서 들으신 일이 있으세요?
그는 중세기에 살았던 이탈리아의 유명한 화가입니다. 영문학을 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그를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를 대천사인 줄 알았다고 하자 반 전체 학생들이 웃음을 터뜨리더군요. 미켈란젤로라니? 꼭 천사처럼 들리지 뭐예요. 대학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가 배운 적도 없는 온갖 것을 알고 있는 게 당연한 것으로 다루어지는 일입니다. 때로는 몹시 난처한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 가운데서,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것이 있으면 조용히 있다가 백과사전을 펴보기로 했습니다.
수업이 시작되는 첫날 참으로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누군가가 모리스 마테를링크(벨기에 작가 1911년 노벨문학상 수상 대표작으로 "파랑새"가 있다)라는 이름을 말했을 때 저는 그 사람이 신입생이냐고 물었던 거예요. 그것이 우스갯거리가 되어 온 학교에 퍼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쨌든 우리반의 누구에게도 지지 않고 명랑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명랑할 정도입니다.
아저씨는 제가 방을 어떻게 장식하였는지 알고 싶지 않으세요? 그것은 다갈색과 노란색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벽이 황갈색으로 칠해져 있었으므로 노란색의 무명커튼과 방석, 마호가니 책상(3달러짜리 중고품)과 등나무 의자와 가운데 잉크 얼룩이 있는 갈색 융단을 샀습니다. 얼룩이 있는 곳에다 의자를 놓기로 했습니다.
창문이 높아서 보통 의자로는 밖이 보이지 않습니다만, 경대의 나사를 뽑아 거울을 떼고 위에다 헝겊을 덮어 창문에 꽉 붙여 놓으니까, 창가의 자리로서 알맞은 높이가 되었습니다.
서랍을 빼내어 그것을 계단으로 삼고 올라가 앉으니 기분이 그만이군요.
이 물건들을 4학년생들의 경매장에서 고르는 데 샐리 맥브라이드가 도와 주었습니다. 샐리는 이제까지 내내 평범한 가정에서 살았으므로, 실내 장식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물건을 사서 진짜 5달러짜리 지페를 치르고, 거스름돈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아저씨는 상상도 못 하시겠지요. 글쎄, 저는 이제까지 백동전 한 닢 이상은 가져 본 적이 없으니까요. 존경하는 아저씨, 저는 용돈을 얻은 것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몰라요.
샐리는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사람입니다. 줄리아 펜들턴은 도무지 못 쓰겠습니다. 서무계는 방을 정하는 데 왜 그토록 이상하게 짝을 지었는지 모르겠어요. 샐리는 무슨 일이든 모두 즐거워합니다. 낙제한 것마저도요. 그러나 줄리아는 모든 게 재미없는 모양입니다. 남과 잘 사귀려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습니다. 글쎄 팬들턴 집안 사람이라면, 그 사실만으로도 아무 조사도 받지 않고 천국에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줄리아와 저는 서로 원수로 태어난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아저씨께서는 제가 무엇을 공부하고 있는가 몹시 알고 싶으시겠죠.
1. 라틴 어-제 2차 포에니 전쟁. 해니벌과 그 군대는 어젯밤에 트라시메누스 호숫가에 야영, 로마 군에 대비하여 복병을 배치했음. 새벽
4시부터 6시 사이 전투 개시. 로마 군 후퇴함.
2. 프랑스 어-(삼총사) 24페이지째. 동사의 제 3변화와 불규칙 동사.
3. 기하-원주가 끝나고 지금은 원추.
4. 국어-서술법을 배우는 중임. 나의 문체는 나날이 간결 명료하여 가고 있음.
5. 생리학-소화 기관에 들어가서 다음 시간에는 쓸개와 췌장을 배울 예정임.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저루샤 애벗 올림
추신
아저씨께서는 술을 드시지 않겠지요.
술은 간에 매우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수요일
키다리 아저씨께
저는 이름을 바꿨습니다. 학적부에는 저루샤이지만 평상시에는 어디서나 주디입니다. 자기 애칭을 자기가 만들어야 되다니 그다지 즐거운 일은 아니군요. 하지만 주디라는 이름은 제가 만든 것은 아닙니다. 프레디 퍼킨스가 아직 말을 채 배우기 전에 저를 그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리펫 원장님은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좀더 상상력을 발휘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원장님은 성을 전화번호부에서 따오는 것입니다- 첫 페이지를 보시면 애벗이라는 성이 맨 위에 나와 있습니다- 이름은 아무 데서나 주워 오곤 합니다. 제 것은 묘비에서 따왔답니다. 저는 옛날부터 제 이름이 아주 싫었습니다. 차라리 주디가 더 낫다고 생각되는군요. 정말 시시한 이름이고 내가 아닌 다른 소녀의 이름이에요- 푸른 눈의 귀여운 소녀인데다 아무 고생도 모르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귀여움을 받으며 구김살없이 자란 아이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정말 좋겠어요. 아무리 결점이 있더라도 집에서 귀염둥이로 자랐다면, 누구도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자기가 그렇게 자란 척하는 것은 조금 재미있는 일일 거예요.
이제부터는 꼭 저를 주디라고 불러 주세요.
아저씨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드릴까요? 저는 가죽 장갑을 세 켤레나 가지고 있어요. 전에 크리스마스 트리에 달려 있던 벙어리 장갑은 받은 일이 있지만, 다섯 손가락이 모두 있는 진짜 가죽 장갑은 가져본 적이 없었어요. 저는 틈만 있으면 그것을 꺼내어 손에 끼어 봅니다만, 교실에 끼고 가는 것만큼은 삼가하고 있습니다.
(식사 종이 울리고 있어요, 안녕.)
금요일
아저씨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국어 선생님이 지난번에 낸 저의 작문에 뛰어난 독창력이 나타나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정말로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이건 선생님 말씀 그대로, 옮긴 것이예요.
18년 동안이나 저 같은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존 그리어 고아원의 목적은 (새삼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저씨께서는 잘 알고 계시고 또 진심으로 거기에 찬동하고 계실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97명의 고아를 97명의 쌍둥이처럼 똑같은 사람으로 만드는 일이었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비상한 그림 재주는 아주 어렸을 적에 장작을 쌓아 놓은 창고 문에 리펫 원장님의 얼굴을 낙서하는 일로써 키워진 것입니다.
제가 자기가 어린 시절의 가정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것을 아저씨는 기분 나쁘게 생각지는 않으시겠지요. 하긴 아저씨께서는 높은 지위에 앉아 계시니까요. 왜냐하면 제가 너무 건방지다고 생각될 경우에는, 아저씨께서는 언제라도 저에 대한 송금을 그만두실 수 있잖아요?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그다지 예의바른 일이라고는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저에게 예의바른 것을 기대하시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고아원은 젊은 숙녀의 마지막 마무리를 하는 학교가 아니니까요.
대학에서 괴로운 것은 공부 시간이 아니라 쉬는 시간이에요.
아저씨, 저는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절반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여럿이 하는 우스갯소리는 모두 다 저만이 겪어 본 적이 없는 과거의 일에 관계되는 것인가 봐요. 저는 마치 말이 통하지 않는 세계에 있는 외국인이나 다름없습니다. 그것은 정말 비참한 기분이예요. 이 기분은 이제까지 내내 품고만 있었습니다.
고등학교에서도 모두가 한편이 되어 저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이었어요. 저는 좀 이상했고 모두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저의 얼굴에 존 그리어 고아원이라고 씌어 있는 듯이 느꼈습니다. 그러면 두서너 명의 상냥한 척하는 아이들이 다가와서 무엇이든 정중하게 말을 거는 것이었어요. 저는 그 아이들을 누구든 증오했습니다. 특히 상냥한 아이들이 가장 싫었어요.
여기서는 아무도 제가 고아원에서 자란 것을 모릅니다. 저는 샐리 맥브라이드에게,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돌아가시고 친절한 노신사가 저를 대학에 보내 주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점은 사실이니까요. 아저씨께서는 부디 저를 비겁자라고 생각지 말아 주세요.
저는 다만 다른 사람들과 같아지고 싶을 뿐입니다. 저의 무서운 고아원의 어린 시절이 마음에 버티고 있는 것만이 커다란 차이니까요. 만약에 제가 그것에 등을 돌려 버리고 그 곳의 기억을 몰아 내기만 한다면, 저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바람직한 아가씨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모든 것에 차이가 있다고는 저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어쨌든 샐리 맥브라이드는 저를 좋아하고 있어요!
언제까지나 아저씨의 주디 애벗 올림
(옛날의 저루샤)
토요일 아침
지금 이 편지를 다시 읽어 보았더니 참으로 유쾌하지 못한 것이로군요. 하지만 월요일 아침으로 다가온 특별 과제를 앞에 놓고 있는데다가, 지독한 코감기에 걸려 있다는 것을 아신다면 양해해 주시겠지요?
일요일
깜박 잊고 이 편지를 어제 부치는 것을 잊어버렸어요. 분개해 마지않는 이야기를 더 쓰겠습니다. 오늘 아침 설교 때에 목사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아시겠어요?
"성서 속에 씌어 있는 가장 고마운 말씀은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라는 것이며, 가난한 자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자선을 행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라지 뭐예요.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은 마치 쓸모 있는 가축이나 다름없지 뭡니까! 제가 이처럼 나무랄 데 없는 숙녀로 키워지지 않았더라면 예배가 끝난 뒤에 곧장 목사님에게로 달려가서 마음먹은 대로 말해 주었을 거예요!
10월 25일
키다리 아저씨
저는 농구부에 들어갔습니다. 어깨에 있는 타박상을 보여 드리고 싶을 정도예요. 파란색과 갈색 바탕에 오렌지 빛의 가느다란 줄이 나 있어요. 줄리아 펜들턴도 농구부에 들어가고 싶어했으나 안 되었습니다. 만세!
제가 얼마나 비열한 근성을 가진 아이인지 아셨지요?
대학은 점점 더 멋있어집니다. 친구도 선생님도 수업도 식사도 모두 좋습니다. 1주일에 두 번이나 아이스크림이 나오고, 옥수수죽 같은 것은 한 번도 먹어 보지 않았습니다.
아저씨께서는 한 달에 한 번만 편지를 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흘이 멀다 하고 아저씨에게 편지를 쓰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이 곳에서의 새로운 모험이 너무도 즐거워서 누구에게든지,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어요. 그런데 제가 아는 분이라곤 아저씨밖에 없거든요. 부디 저의 이 벅찬 감정을 이해해 주세요. 이제 곧 가라앉게 될 테니까요.
만일 제 편지를 귀찮게 생각하신다면 휴지통에 집어넣어 버리세요.
이번에는 11월 중순 무렵까지 편지를 쓰지 않기로 약속하겠습니다.
수다쟁이
주디 애벗 올림
11월 15일
키다리 아저씨
제가 오늘 어떤 것을 배웠는지 좀 들어 보세요.
꼭지각의 옆면적은 윗면과 밑면의 둘레의 합에 빗높이를 곱한 것의 2분의 1과 같다.
정말 같지는 않지만 이것은 정말이예요. 저는 그것을 증명할 수가 있습니다.
아저씨는 저의 옷에 대하여 아직 아무것도 들으신 적이 없으시지요. 무려 여섯 벌이나 된답니다. 모두 아름다운 새 옷이고 모두 내 것으로 산 거예요. 누군가 큰 사람이 입던 것을 물려받은게 아니라구요. 이런 일이 고아의 생애에 얼마나 큰 행복을 가져왔는지 아저씨는 모르실 거예요. 이 옷을 준 것은 모두 아저씨예요. 진실로 마음 속 깊이 감사하고 있어요. 교육을 받는다는 것도 고마운 일이지만, 여섯 벌의 새 옷을 갖는다고 하는 현기증이 날 만큼 기쁜 경험은 그 무엇에다가 비길 바가 못 됩니다. 이 옷을 골라 주신 분은 다행스럽게도 리펫 원장님이 아니라 시찰관인 프리차드 씨예요.
분홍빛 얇은 비단을 씌운 야회복(이걸 입으면 저는 정말 아름다워집니다), 교회 갈 때 입는 파란 드레스, 다과회 때 입는 동양풍의 장식이 달린 엷은 빨간 비단 드레스(이걸 입으면 마치 집시 같습니다), 그리고 또 장미빛 메린스 옷감의 드레스 한 벌, 외출용 회색 나들이옷과 수업 시간에 입는 평상복이 있습니다. 이건 줄리아 펜들턴에게는 대단찮은 의상일지도 모르나 주디 애벗에게 있어서는... 뭐라고 해야 좋을지!
아저씨는 제가 경박한 계집아이라고 또, 여자아이를 교육시킨다는 건 정말 돈의 낭비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실는지요? 하지만 아저씨 역시 만일 한평생 동안, 바둑 무늬의 무명 옷만 입고 살았다면 제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 주실 겁니다. 더구나 제가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에는 바둑 무늬의 무명 옷 시대보다도 더욱 나쁜 시대에 들어갔던 거예요.
자선 상자! 비참한 자선 상자에서 나온 옷을 입고 학교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을, 제가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아저씨는 상상도 못 하실 거예요. 저는 반드시 그 옷의 처음 임자인 아이 옆자리에 앉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친구들과 소곤거리거나, 킥킥 웃으며 제 옷을 손가락질하는 것이었어요.
자기의 적이 버린 옷을 입어야 하는 비참함은 저의 영혼에 깊이 사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상처는 비록 앞으로 남은 생애를 비단 양말을 신고 산다고 해도, 지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전쟁 소식 -현장 취재 뉴스-
11월 13일 목요일 이른 새벽
해니벌 장군은 로마 군의 전위를 격파한 뒤, 카르타고 군을 이끌고 산악 지대를 넘어 카실리눔 평야에 도착했다. 경무장한 누미디아 군은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보병대와 교전, 두 차례 대전투를 벌였으며 한 차례 소전투를 벌인 뒤 로마 군에게 큰 손해를 입히고 패주하였음.
전선특별 보도원의 영광을 안은 주디 애벗 올림
추신
저는 어떠한 종류의 회답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 질문 등으로 괴롭혀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도 미리 주의 받고 있습니다.
아저씨께서는 부디 이번 한 번만은 대답해 주시지 않겠어요? 아저씨는 아주 나이가 많은 분이신지요. 아니면 조금만 늙으셨는지요? 그리고 또 머리가 모두 대머리이신지 아니면 조금만 벗겨지셨는지? 아저씨에 대하여 기하의 정의처럼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키가 크시고 부자이시고 여자아이를 싫어하시는 남자, 그러면서도 어느 건방진 계집아이에 대해서는 매우 너그러우신 아저씨는 도대체 어떤 분이신지요?
목이 빠지도록 회답을 기다리겠습니다.
12월 19일
키다리 아저씨께
결국 답장은 주시지 않으시는군요. 매우 중요한 질문이었는데도!
아저씨께서는 대머리이신가요?
저는 아저씨가 어떤 분인지 생각나는 대로 그려 보았습니다. 매우 만족스러운 것이 되었어요. 그런데 머리 꼭대기에 가서 그만 꽉 막히고 말았습니다.
저는 아저씨의 머리가 흰지, 검은지, 흰머리가 섞였는지, 아니면 머리칼 따위는 하나도 없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군요.
이것이 아저씨의 초상화입니다만, 문제는 머리카락을 좀더 그리느냐 어쩌느냐에 있습니다.
아저씨의 눈이 어떤 빛인지 알고 싶지는 않으세요?
아저씨의 눈은 회색이고 눈썹은 현관의 처마처럼 튀어나오고(소설에서는 흔히 짙은 눈썹이라고 하지요), 입술은 한일자인데 양끝이 약간 아래로 쳐져 있습니다. 이처럼 저는 아저씨를 잘 알고 있어요! 아저씨는 괴팍스럽고 신경질적인 노인이시죠.
(예배종이 울립니다).
오후 9시 45분
저는 새로 한 가지 규칙을 정했습니다. 절대로 지키기로 하겠어요. 그것은 결코 밤에는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일 아침에 복습 시험이 많더라도 말이에요. 그리고 공부 대신에 아주 쉬운 책을 읽는 거예요. 제게는 꼭 필요하니까요.
어쨌든 과거 18년 동안의 공백을 메워야 하니까요. 저의 머리는 깊고 깊은 굴이 생긴 것처럼 텅 비어 있어요. 아저씨께서 아시면 기가 막히실 거예요. 저 역시 이제야 겨우 그 무지의 심연을 깨달았으니까요. 가족이 있고 가정이 있으며, 친구나 책에 모자라는 것이 없었던 여자아이라면, 대개는 너무 잘 알고 있을 일들을 저는 전혀 본 일 조차도 없습니다.
이를테면, '어미거위의 노래(영국의 동요집)' '데이비드 카퍼필드(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소설, 1850년)'도 '아이반 호(영국 스코틀랜드의 소설가 월터 스콧 경의 소설, 1820년)'도 '신데렐라'도 '푸른 수염(중세 프랑스의 이야기 주인공으로 아내를 6명이나 죽였음)'도 '로빈슨 크루소 표류기(영국의 소설가 다니엘 디포의 소설, 1719년)' '제인에어(영국의 소설가 샬롯 브론테의 소설, 1847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읽은 적이 없으며, 루드야드 키플링이라는 이름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헨리 8세가 몇 번이나 결혼한 것도, 셀리가 시인이라는 것도 몰랐었습니다.
인간은 아주 먼 옛날에는 원숭이였다는 사실도, 에덴 동산은 아름다운 신화라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R.L.S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을 말하는 약자인 것도, 조지 엘리엇이 여자라는 것도 몰랐었습니다. '모나리자'의 그림을 본 적도 없으며 (아마 아저씨께서는 곧이듣지 않으시겠지만 정말이에요), 그리고 또 셜록 홈즈라는 이름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어요.
이제는 이미 그런 것을 모두 알고 있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많이 알고 있습니다. 이제 뒤처진 것을 회복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아시겠지요. 아아, 그러나 그것은 즐거운 일이에요! 빨리 저녁이 되었으면 하고 하루 종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녁이 되면 '공부 시간'이라는 팻말을 방 문에 달고 편안히 빨간 가운을 입고 털이 푹신푹신한 슬리퍼를 신고서 쿠션을 있는 대로 소파 등에 기대어 놓고 대는 것입니다. 한 권으로는 모자랍니다. 한꺼번에 네 종류의 책을 읽는 거예요.
지금은 테니슨의 시와 '허영의 도시(새커리의 소설)'와 키플링의 '고원 이야기'와 그리고 또 -웃지 마세요- '작은 아씨들'입니다. 소녀 시절에 '작은 아씨들'을 읽지 않고 자란 사람은 학교 전체에서 저 혼자뿐입니다. 하긴 저는 아무에게도 그런 말은 하지 않습니다(그런 말을 하면 전 이상한 아이로 낙인이 찍히고 말 테니까요). 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살짝 지난 달의 용돈 가운데서 1달러 12센트를 내고 사왔습니다. 이번에는 누가 소금에 절인 라임(레몬과 비슷한 신 열매로 '작은 아씨들'중에서 에미가 학교에 가져갔다가, 선생님에게 꾸지람을 듣는 장면이 있음) 이야기를 해도 저는 얼른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있을 거예요.
(10시를 알리는 종이예요. 이 편지는 정말 몇 번이나 중단된 것입니다.)
토요일
안녕하십니까?
기하학에서 새로운 분야로 들어간 결과를 보고 드리겠습니다. 지난 주 금요일로서 평행 6면체를 마무리짓고 절단형 각주를 시작하였습니다. 학문의 길은 매우 험준하고 가파른 것으로 생각됩니다.
크리스마스 방학이 다음 주일부터 시작되므로 여행 가방이 복도에 수북이 쌓여 지나다니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몹시 들떠 있어 공부 같은 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저는 멋진 휴가를 보낼 생각입니다. 텍사스 주에서 온 1학년 학생 한 명이 기숙사에 남게 되어 있으므로, 둘이서 소풍도 가고 얼음이 얼면 스케이트를 타러 갈 계획입니다.
그리고 또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모조리 읽어야겠어요. 그런데 3주일간이나 된답니다.
안녕!
아저씨께서도 저처럼 행복한 방학을 느끼기를 기원합니다.
언제나 아저씨의 주디 올림
추신
저의 물음에 대한 회답을 잊지 마세요. 만일 편지를 쓰시는 것이 귀찮으시다면 비서를 시켜 전보를 쳐 주세요.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스미스 씨는 대머리임
아니면
스미스 씨는 대머리가 아님
또는
스미스 씨의 머리는 백발임
전보 요금 25센트는 제가 다달이 받는 용돈에서 빼셔도 좋습니다.
1월까지 안녕.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시길.
크리스마스 휴가가 끝나 갈 무렵
(날짜를 분명히 기억 못 해서 미안합니다)
키다리 아저씨
아저씨가 계신 곳도 눈이 오고 있는지요? 제가 있는 탑에서 바라보는 세계는 흰 천으로 덮이고, 팝콘과 같은 큰 눈송이가 내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벌써 저녁때여서 태양(썰렁한 황색)은 더욱 썰렁해 보이는 보랏빛 언덕 저쪽으로 지고 있습니다. 저는 마지막 광선을 이용하여 이 편지를 쓰기 위해 창가의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중입니다.
아저씨께서는 선물로 주신 다섯 개의 금화를 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것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아저씨는 이제까지 아주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제가 가진 것은 모두 아저씨가 주신 거잖아요. 그것도 부족해서 또 이렇게 받는 것은 잘못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저는 기뻐하고 있어요. 그 돈으로 제가 무엇을 샀는지 알고 싶지 않으세요?
1. 가죽 케이스에 든 은딱지 손목시계(시간에 늦지 않게 수업에 들어 나갈 수 있도록).
2. 메슈 아널드의 시집.
3. 보온병.
4. 담요(무릎을 덮는 것. 저의 방은 몹시 춥습니다).
5. 노란 원고지 5백장(저는 이제 곧 작가의 길을 걸을 셈입니다).
6. 동의어 사전(작가로서 어휘를 풍부하게 하기 위하여).
7. (이 마지막 물건 이름을 고백하는 것은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만) 비단 양말 한 켤레.
이제 아저씨께서는 제가 숨기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비단 양말을 산 동기는 정말 야비한 것이었어요. 줄리아 펜들턴이 매일 밤 기하 공부를 하러 내 방에 와서는, 소파에 다리를 포개고 앉는데 언제나 비단 양말을 신고 있지 뭐예요. 하지만 이제 두고 보세요. 그녀가 휴가에서 돌아오기만 하면, 저는 이 비단 양말을 신고 가서 그녀의 소파에 앉아 줄 테니까요. 글쎄 아저씨, 저는 이렇게 고약한 인간이랍니다. 그러나 저는 조금 정직하긴 하죠. 그리고 고아원 시절의 기록을 보더라도 제가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아저씨도 이미 잘 알고 계실 거예요.
요컨대(이건 국어 선생님이 다음 말을 시작할 때 잘 쓰는 입버릇입니다) 저는 이 일곱 가지 선물에 대하여 매우 감사하고 있는 바입니다. 저는 이 물건이 모두 캘리포니아 주에 살고 있는 저의 가족으로부터 상자에 담겨서 부쳐 온 것으로 하고 있습니다. 시계는 아버지로부터, 작은 담요는 어머니로부터, 보온병은 이 곳 기후때문에 감기에 걸리지나 않을까 하고 언제나 걱정하고 계신 할머니로부터, 그리고 원고 용지는 남동생 해리로부터의 선물이에요. 이사벨 언니는 비단 양말을 주었고, 수잔 아주머니는 메슈 아널드의 시집, 해리 아저씨(남동생은 숙부님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로부터는 사전, 해리 아저씨는 초콜릿을 보내 주시겠다고 하셨지만 제가 굳이 동의어 사전으로 해달라고 고집을 피웠지요.
아저씨께서는 혼자서 저의 온 가족 역활을 하시는 것을 싫다고 하시진 않겠지요?
그러면 저의 방학 동안의 이야기를 해볼까요? 아니면 아저씨께서는 저의 교육 그 자체에만 흥미가 있으신지요? 이 (그 자체)라는 말의 미묘한 뜻을 잘 음미해 보십시오. 이건 요즈음 저의 용어 속에 더해진 것입니다.
텍사스 주에서 와 있는 아이의 이름은 리오노러 펜턴이라고 합니다(저루샤에 못지 않게 이상한 이름이죠?). 저는 이 아이가 좋습니다만 샐리 맥브라이드만큼은 아닙니다. 저는 샐리만큼 좋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저씨는 예외로 하고 말이예요. 저는 누구보다도 아저씨가 가장 좋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저씨는 혼자서 저의 온 가족을 한데 합친 분이거든요.
리오노러와 저는 2학년 학생 두 명과 함께 날씨만 좋으면 짧은 치마에 스웨터, 운동화 차림으로 시니 스틱(하키와 비슷한 경기용 막대기)을 한 자루씩 들고서, 시골길을 누비고 다니며 부근 일대를 답사했습니다.
한 번은 6킬로미터쯤 떨어진 도시로 가서 여대생들이 잘 가는 음식점에 들어갔습니다. 새우구이(35센트), 그리고 후식으로는 메밀가루로 만든 핫케이크에 메이플 꿀을 친 것(15센트), 영양가 많고 가격도 저렴했습니다.
아아, 그 즐거움이란! 특히 저는 더했습니다. 고아원 생활과는 하늘과 땅 차이거든요. 저는 언제나 학교를 나올 때는 탈옥수와 같은 기분을 맛보는 것이었어요. 저는 곧잘 자기가 지금 어떤 경험을 하고 있는가를 주책없이 이야기하려다가, 깜짝 놀라 마치 자루에서 튀어나오려는 고양이의 꼬리를 잡아당기듯이 슬그머니 집어넣곤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일을 무엇이든 말해 버리지 못한다는 것은 몹시 괴로운 일입니다.
본디 저는 대단히 개방적인 성격이니까 말이에요. 이렇게 아저씨에게 무엇이든 털어놓기에 다행이지 그렇지 않다면 저는 터지고 말 것입니다.
지난 주 금요일 밤에 퍼거슨 기숙사의 사감이 다른 기숙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당밀 캔디 파티를 열어 주셨습니다. 총인원 22명.
1학년생에서 4학년생까지 모두 사이좋게 사귀었습니다. 부엌은 아주 넓어서 돌벽에는 구리로 된 주전자와 냄비가 죽 걸려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작은 스튜 냄비도 세탁용의 큰 솥만한 크기입니다. 퍼거슨 기숙사에는 4백명이나 되는 여학생이 생활하고 있거든요. 새하얀 모자와 앞치마를 두른 주방장이 별도로 하얀 모자와 앞치마를 가지고 와서- 어디서 그렇게 많이 가져왔는지 저는 짐작도 못 하겠습니다.- 우린 모두 요리사로 둔갑했습니다.
아주 맛있는 캔디를 얼마든지 보아 왔지만 정말로 즐거웠습니다. 드디어 파티가 끝나서 우리의 몸도, 부엌문의 손잡이도 성한 데 없이 끈적끈적해졌을 때, 모두들은 모자와 앞치마를 입은 채 손에 손에 커다란 포크와 스푼, 프라이팬을 들고, 일렬로 서서 텅 빈 복도를 지나 교수 휴게실로 갔습니다. 그 곳에서는 여러 명의 교수와 직원이 조용한 저녁 한때를 즐기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가를 부르고 캔디를 증정했습니다. 선생님들은 정중하게 그러나 조금 수상쩍은 듯한 얼굴로 캔디를 받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우리가 그 곳을 나왔을 때에는 모두들 커다란 당밀 캔디를 빠느라고 입이 끈적거려 말도 제대로 못 하였습니다.
아저씨! 저의 교육이 얼마나 진지하게 되어가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아저씨께서는 제가 작가가 되기보다는 화가가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휴가도 이제 이틀이면 끝납니다. 다시 친구들과 만날 것이 기다려집니다. 제가 있는 탑은 조금 쓸쓸합니다. 4백명이 사는 기숙사에 겨우 9명만이 산다는 것은 너무나 쓸쓸합니다.
어머나! 11페이지나 썼군요. 미안하게도, 아저씨는 지루해서 혼이 나셨죠. 저는 아주 짤막한 인사 편지를 쓸 작정이었는데, 한 번 쓰기 시작하면 저의 펜이 저절로 척척 써 버리는 모양입니다.
그럼 안녕! 저를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눈 앞의 지평선에 작은 먹구름이 떠 있지만 않다면, 저는 아주아주 행복하겠는데!
시험이 2월에 있을 예정입니다.
애정을 드리며
주디로부터
추신
애정을 드리며라고 쓰는 건 예의에 어긋난 짓인지도 모르겠군요. 만일 그렇다면 용서하십시오. 저는 누구든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데, 그 대상으로서 아저씨든 리펫 원장님이든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저는 아무래도 원장님을 사랑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 아저씨가 참아 주시는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그 전날 밤
키다리 아저씨께
우리 대학에서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지 아저씨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휴가라는 것이 있었다는 사실마저 깨끗이 잊고 있습니다. 지난 4일 동안 저는 불규칙 동사를 57개나 머릿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시험이 끝날 때까지 모두 머릿속에 남아 있어 주어야 될 텐데요.
친구들 가운데는 소용이 없어진 교과서를 팔아 버리는 아이도 있지만, 저는 모두 모아 둘 작정입니다.
그렇게 하면 졸업한 뒤 자기가 받은 교육 전체를 책장에 죽 늘어놓고 무엇이든 상세한 설명이 필요할 때는 주저없이 거기서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 편이 머릿속에 모두 넣어 두려고 애쓰는 것보다 훨씬 쉽고 정확합니다.
줄리아 펜들턴이 저녁때 사교적 방문을 하러 와서 한 시간 동안이나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가족 이야기를 꺼냈으므로, 저는 이야기를 다른 데로 옮기려고 애를 썼습니다만 안 되더군요. 줄리아는 제 어머니의 처녀 시절의 성을 알고 싶다는 거예요. 고아원 출신에게 이런 실례되는 질문을 하다니. 저는 모른다고 할 용기가 없어서 비참한 기분으로 맨 먼저 떠오른 이름을 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몽고메리라는 것이었어요. 그러자 줄리아는 매사추세츠 주의 몽고메리 집안이냐, 버지니아 주의 몽고메리 집안이냐 하고 묻지 않겠어요?
줄리아의 어머니는 러더퍼드 집안 출신입니다. 그 조상은 노아의 방주(구약 시대의 대홍수 이야기에서 노아라는 사람이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만든 배)로 건너갔다는 것이며, 헨리 8세와 먼 친척이 된다나요? 그리고 아버지 쪽의 조상은 아담(구약 성서에 씌어 있는 인류의 조상) 보다 더 옛날부터 이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줄리아의 집안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아마도 명주실같이 아름다운 털이 있고 특별히 긴 꼬리를 가진 우수한 원숭이였을 겁니다.
오늘 밤에는 유쾌한 편지를 쓸 작정이었으나 졸려 죽겠어요. 게다가 또 시험도 걱정스럽고... 1학년짜리의 신분이란 그다지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시험을 앞둔
주디 애벗 올림
일요일
키다리 아저씨께
아주 아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맨 처음에 꺼내는 것은 삼가하겠습니다. 그전에 우선 아저씨의 기분을 좋게 해드려야겠지요.
저루샤 애벗은 작가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탑에서'라는 제목의 ,저의 시가 교지 2월호에 발표되었습니다. 그것도 제일 첫 꼭지에 실리다니, 1학년으로선 카다란 영예인 것입니다.
어제 저녁 교회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국어 선생님이 저를 불러서, 그 시는 6행째가 다소 서툴지만 그것만 없으면 아주 휼륭한 작품이라고 하셨어요. 만일 읽어 주시겠다면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 밖에 또 뭐 재미있는 소식이 없을까요? 아참, 저는 스케이트 연습을 시작했어요. 혼자서 아주 멋있게 얼음판을 다닐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체육관 지붕으로부터 밧줄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오는 기술도 배웠고, 높이뛰기를 1미터나 뛸 수도 있습니다. 이제 곧 1미터 반으로 끌어올리려고 생각중입니다.
오늘 아침 앨라배마의 목사님이 아주 좋은 설교를 하셨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신약성서 '마태복음' 7장 1절)는 제목으로 남의 과실을 너그러이 볼 필요와, 가혹한 판단으로 남의 기를 꺽지 말라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아저씨에게 들려 드리고 싶었어요.
지금은 겨울치고는 보기 드물 만큼 햇볕이 눈부신 오후로, 전나무에 달린 고드름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습니다.
눈에 띄는 온 세상은 무거운 눈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릅니다. 저는 슬픔의 무게로 고개 숙이고 있습니다.
자, 그럼 드디어 뉴스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주디야, 용기를 내어라!
이야기 안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아저씨는 정말 지금 기분이 괜찮으신가요?... 저는 수학과 라틴 어 산문에서 낙제 점수를 받고 말았어요. 저는 이 두 과목을 개인 교수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달에 다시 한 번 시험을 볼 것입니다. 아저씨가 실망하실 걸 생각하면 몹시 괴롭지만, 그렇지만 않다면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수업 과목에도 없는 다른 공부를 많이 했거든요. 저는 17권의 소설과 30킬로미터나 되는 시를 읽었습니다. '허영의 도시'며 '리처드 피버릴'이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며 모두가 읽을 만한 것들뿐입니다. 그리고 또 애더슨의 수필과 록허트의 '스콧의 생애' 기번의 '로마 제국 제1권' 벤베누토 첼리니의 '자서전'을 절반...첼리니란 사람은 매우 유쾌하더군요. 그는 언제나 아침 식사 전에 슬그머니 밖에 나가서는 살인을 하고 오거든요.
아저씨, 보시는 바와 같이 저는 라틴 어에만 매달려 있는 것보다 훨씬 유식해졌습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낙제하지 않겠다고 약속드릴 테니 용서해 주세요, 네.
회개하려고 노력하는...
주디 올림
그림설명: 주디가 그림을 그려서 간단한 설명을 붙여놓음. '이달의 소식' 이라고 제목을 쓰고 빵모자를 쓰고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주디. 스케이트를 배우는 주디. 높이뛰기 하는 주디(다리가 몹시 불편해요). 두 과목에 낙제하여 눈물 흘리는 주디. 하지만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다짐합니다. 라고 적어둠.
키다리 아저씨께
이건 이번 달 중간에 또 쓰는 임시편지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오늘 밤 웬지 쓸쓸합니다. 심한 폭풍이 불고 제가 있는 탑엔 눈보라가 치고 있습니다. 학교 안의 건물은 모두 불을 껐습니다만 저는 블랙 커피를 마셔서 잠이 오지 않습니다.
오늘 밤 저는 샐리와 줄리아와 리어노리 팬턴을 초대하여 만찬회를 열었습니다. 기름에 잰 정어리와 토스트 빵과 샐러드, 초콜릿, 우유가 든 케이크와 커피였어요. 줄리아는 매우 즐거웠다고 말했을 뿐이었으나, 샐리는 남아서 뒷설거지를 거들어 주었습니다. 오늘 같은 밤이야말로 라틴 어 공부에다 시간을 유효하게 써야겠지요. 그러나 저는 분명히 라틴 어엔 게으른 학생이에요. 리비와 '데 세넥추티(노년에 대해)'를 마치고 지금은 '데아 미키티아(우정론)'에 들어갔습니다(이건 담 키티아... 얄미운 키티아! 라고 발음하고 있습니다).
아저씨 잠깐 동안만 저의 할머니가 되어 주시지 않겠어요?
샐리에게는 한분, 줄리아와 리어노러에게는 할머니가 두 분씩이나 계셔서 오늘 밤은 모두 한 마디씩 자랑을 했어요. 저는 그 밖에는 아무것도 필요없다고 생각될 만큼 할머니가 가지고 싶어졌어요. 할머니란 매우 존경할 만한 친척이거든요.
그래서 만일 아무 지장만 없으시다면, 어제 시내에 나갔을 때 연보랏빛 리본으로 장식된 매우 아름다운 레이스 모자를 보아 두었으므로, 그것을 83세 생일 선물로 할머니에게 드릴 수 있게 해주셨으면 해요!
교회 시계가 12시를 알리고 있습니다. 졸음이 오는 것 같군요. 할머니 안녕히 주무세요.
할머니를 무척 사랑하는
주디 올림
3월 15일
D.L.L. 께
저는 라틴 어 작문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라틴 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공부할 겁니다. 열심히 공부를 계속할 거예요. 시험은 다음 주 화요일 일곱째 시간인데, 저는 합격하든가 아니면 실패하든가 두 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무조건 합격이라는 기쁜 편지냐, 아니면 산산이 부서진 가련한 것이 되느냐?
시험이 끝나는 대로 정중한 편지를 쓰겠습니다. 오늘 밤은 라틴 어 문법과 씨름을 해야 하므로 이만 총총.
시간에 쫓기는
J. A.
3월 26일
D.L.L. 스미스 아저씨께
아저씨께서는 결국 질문에 대답을 해주시지 않으셨군요. 아저씨께서는 제가 하는 일 따위에는 조금의 흥미도 보여 주시지 않는군요. 아저씨는 저 고약한 평의원 가운데서도 가장 고약한 분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저씨께서는 저를 교육시키는 것은 저를 위해서 하시는 게 아니라 다만 의무적으로 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아저씨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성함조차도 모릅니다. 어떤 '물체'에다 편지를 쓴다는 건 정말 재미가 없습니다. 아저씨께서는 저의 편지 따윈 보시지도 않고 휴지통에 던져 버리실 거라고 생각됩니다. 앞으로는 공부에 관해서만 쓰겠어요.
라틴 어와 기하의 재시험은 지난 주일에 끝났습니다.
양쪽 다 합격하였으므로 조건부 낙제에서 해방된 셈이죠. 삼가 알려 드립니다.
삼가 문안드립니다.
저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