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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 러시아 비운의 로마노프조의 최후의 쨔르(황제) 니콜라이 2세(1868-1918)1

임주영 |2008.12.11 20:18
조회 215 |추천 1


제정 러시아 비운의 로마노프조의 최후의 쨔르(황제) 니콜라이 2세(니콜라스 알렉샨드로비치 닉샤 니콜라이 로마노프, 1868-1918)는 늘 매우 유약한 편이지만 헌신적인 부군(남편)이자 관대한 1남 4녀들의 부제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장점은 언제나 가정일을 잘 다스렸다.

여느 부친들보다 그는 가족애에 대한 관심을 쏟았다 한다.

하지만, 단점은 정치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늘 잘 서툴렀다 한다.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 1917년 3월 및 10월 러시아 대혁명으로 인해 결국 로마노프조는 붕괴된다.

그의 형제들은 남동생 게오르기, 미하일 알렉샨드로비치 로마노프의 큰형이 되고, 여동생 크셰냐 알렉샨드로브나 로마노프의 큰오빠가 된다.

가족들은 쨔리나(황후) 알렉샨드라 표트로브나 로마노프(엘리쟈, 엘리스, 알리샤 혹은 알리키라 부름. 1872-1918)인데 황후 알렉샨드라 표트로브나 로마노프는 독일인 헤셴 대공녀이자 여왕 빅토리아네 외손녀이다.

그녀의 양친은 모두 잃었다.

1남 4녀들 중 1녀 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프(1895-1918)와 2녀 타치아나 니콜라예브나 로마노프(1897-1918), 3녀 마리아 니콜라예브나 로마노프(1899-1918), 4녀 아나스타샤 니콜라예브나 로마노프(1901-1918?) 여대공녀들, 5남 황태자 알렉셰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알렉시스, 알렉쉬라 부름, 1904-1918)를 둔 참으로 헌신적이고 자상한 부제이다.

니콜라이 2세는 1868년 그의 부제 알렉샨드르 3세(1845-1894)와 모후 덴마크인 여대공녀 마리아 표트로브나 로마노프(마리 소피 프레데릭 다그마르(다그마), 1847-1928)의 장남으로 러시아 페테르불그 궁에서 출생했다.

1881년 그는 태자위에 오른후, 일본 열차 운행 여행 도중 그만 오쓰 사건으로 쓰다에 의해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한다.

귀국 후 태자 니콜라스 알렉샨드로비치 로마노프는 쨔리나(황후) 알렉샨드라(엘리쟈)와 연애결혼하기 전 마리아 크셰신스카야란 어느 발레리나를 보고 첫눈에 반해 서로 사랑한 사이가 되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약혼을 못해보고 서로 헤어져야 했던 운명을 나눴다 한다.

1894년 그의 부제 알렉샨드르 3세의 뒤를 이어 드디어 쨔르(황제)가 된 니콜라이 2세가 됐다.

나이 16세 때 선을 봤던 바로 독일인 헤셴 여대공녀이자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되는 바로 엘리쟈란 공주와 연애결혼에 성공했다.

쨔르(황제)인 그는 독일인 헤셴 여대공녀 엘리쟈를 쨔리나(황후)로 맞이해 그녀의 독일식 이름을 러시아식 이름 알리샤(알렉샨드라 표트로브나 로마노프)로 개명시켰다.

이들 부부 사이에 1남 4녀의 황자녀들을 두었다.

쨔리나(황후) 알리샤는 1895년 1녀 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프를 출산했는데 올가의 출생 당시 그녀의 머리가 컸다고 한다.

1897년 2녀 타치아나 니콜라예브나 로마노프도 출생했다.

타치아나의 의미는 표트르 일리치 챠이코프스키의 오페라 "예프게니 오네긴" 중 타치아나란 그 여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그리 된것이다.

1899년 3녀 마리아 니콜라예브나 로마노프도 예외는 아니다.

1901년 4녀 아나스타샤 니콜라예브나 로마노프까지 출생한다.

4녀를 둔 쨔르(황제) 부부의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아직까지 쨔리나(황후)가 황자를 출산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원성을 높혔다.

드디어 1904년 기다리고 기다리던 5남 황자 알렉시스(알렉셰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의 탄생소리에 백성들은 기쁨의 환희를 느낄 수 있었다.

기쁨도 잠시 황자 알렉시스가 그만 혈우병에 걸리고 말았다는 전보에 쨔르(황제)의 귀에 전해져 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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