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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반쪽 김성재를 만나다.

황종식 |2008.12.16 01:57
조회 136 |추천 0

 

방이중학교에 진학한 이후에는 한동안 조용히 지냈다. 이때가 아마 사춘기였고 남녀공학이라 여학생들에게 잘 보이려 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부모님들도 중학교는 국민학교 때와 달리 대학은 물론 장차 사회에 진출할 때까지 바로 연결되므로 공부에 더 신경을 써야한다고 자극을 주셨다. 

 

현재 서울대 치과대학에서 치과의사 수업을 받고있는 사촌동생이 공부를 잘해 부모님들은 경쟁심리에서 더욱 내게 관심을 보였다. 기대에 부응하듯 국민학교 때 못지않게 공부를 잘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됐다면 나는 아마도 모범학생으로 자라 지금쯤 일류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겠지. 그러나 내 운명은 아무리 얌전히 지내려고 해도 그리 안 되는 모양이다. 

 

영웅은 영웅이 알아본다고 했든가, 얌전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아본 악동들이 접근해왔다. 중학교에 들어가 공부한번 열심히 해보겠다고 마음먹었던 나였지만 작심 3일이었다. 내가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 못된 친구들이 자꾸만 함께 놀자고 다가왔다. 학교 안가고 껄렁껄렁 거리를 헤매면서 이 아이 저 아이 시비를 걸었고 밤에는 집에 안 들어가고 공사장 같은 곳에서 못된 짓 하면서 밤을 새웠다. 그렇다고 특별히 어떤 작업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속된 말로 이처럼 노숙하는 것을 우리는 '난장 깐다'고 했다. 

 

이런 생활을 하면서 학교성적은 내리막길을 걷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어머니가 학교담임선생님의 호출을 받아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이때는 음악적으로도 별 진전이 없었다. 내 인생의 침체기였다. 상문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좋은 학교에 입학해서가 아니라 이곳에서 오늘날 듀스의 두 친구가 뭉치게 된 것이다. 

 

김성재와 처음 끈이 이어진 것은 소위 프라모델을 통해서였다. 프라모델이란 플라스틱으로 조립한 장난감을 부르는 말이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여기에 취미를 붙여 방안에 틀어박혀 장난감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이런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식들 이렇게 재미있는걸 몰라.' 속으로 '바보같은 놈들'했지만 따돌림당하는 것 같아 친구들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이때 만난 친구가 일본에서 살다왔다는 친구였고 동창생이라는 성재를 소개받게 됐다. 성재는 프라모델 이야기를 하자 기다렸다는 듯 자신도 좋아하며 일본에서는 대유행이라고 말했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 친구를 만났구나'. 더구나 음악 좋아하는 수준도 맞아떨어졌다. 고기가 물 만난 듯 기뻤다. 

 

고교 1년 시절 성재(김성재)를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우리와 모든 것에 있어 취향에 차이가 많았다. 우리가 보다 고급스러웠다고나 할까. 대개 우리 또래의 음악 좋아하는 친구들은 메탈에 미쳐있었다. 모두다 잉위 맘스틴이나 게리 무어의 기타 연주하는 모습을 흉내내면서 그 것 말고는 음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행동했다.  

 

그러나 우리는 댄스였다. 그것도 랩댄스. 모두다 우리를 이방인 취급했다. 

 

댄스음악 하면 음악성이 떨어진다는 의미였다. 그렇다고 록이니 메탈이니 하는 아이들이 제대로 그 음악을 이해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저 겉멋만 들어 흉내내고있는 것을 보면 그 반작용으로 나와 성재는 더욱 열심히 춤추며 노래했다. 그 때만해도 과연 우리 나라에 랩이 유행할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우리는 그만큼 앞서 나가고 있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싶다. 

 

다른 친구들이 록음악에 빠져있을 때 우리가 랩댄스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기타보다는 키보드에 관심이 많았다. 사실 국민학교 다닐 때 피아노를 조금 치긴 했었다. 그 때만해도 바이엘 하나 떼면서 싫증을 느껴 요령을 피우곤 했었는데 댄스음악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신디사이저를 보고 나서는 건반악기의 매력에 몸살을 앓을 정도로 빠져들었다. 

 

마침 일본출장을 떠나시는 아버지에게 부탁을 했다. 들어주지 않을 줄 알았던 아버지가 키보드를 사들고 오신 것은 의외였고 그 일로 나는 랩댄스의 세계로 더욱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작곡도 했다. 그리고 성재를 불렀다. "야, 이거 내가 작곡한 거야." 죽이 맞아 노래하며 춤추고 즐겁게 지내던 성재와 나는 '일본진출' 계획까지 세웠다. 나중에 성재가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그 친구는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 일본을 자기 집 앞마당처럼 다닐 수 있었고 일본어도 잘했다. 음악에 깊이 빠져있던 우리는 일본에 날아가 앞서가는 음악이 뭔지를 보고 싶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성재의 제의로 우리는 대망의 꿈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나로서는 처음 외국 땅을 밟아보는 것이라 더욱 흥분이 됐다. 동경시내 흑인클럽에 들어가 주크박스에 1백엔을 집어넣으면 신나는 뮤직비디오가 나왔고 우리는 흥겹게 몸을 흔들어댔다.  

 

우리는 2주일간 일본에 머물렀는데 가기 전 생각처럼 일본가수들의 콘서트를 보자는 계획은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사건이 있었다. 그때는 마침 8.15광복절을 끼고있어 곳곳에서 재일교포 학생들이 일본학생들을 혼내주며 평소 그들에게 당해오던 울분을 풀고 있었다. 

 

우리도 예외일 수 없었다. 거리에 나가 가장 '일본적'으로 생긴 일본학생들을 물색했다. 시비 거는 것은 성재 몫이었다. 일본말을 할 줄 알아야 시비도 그럴듯하게 붙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못되게 생긴 아이들만 골라 정말 흠씬 두드려 팼다. 

 

지나가던 일본경찰이 호루라기를 불어댔다. 성재와 나는 젖 먹던 힘을 다해 도망을 쳤다. 우리 나라도 아닌 일본 땅에서 일본경찰에게 잡히면 어찌되겠는가. 한참 뛰다보니 나 혼자였다. 큰일이었다. 일단 경찰에게 잡힐 위험은 사라졌지만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나는 졸지에 미아가 돼있었다. 

 

일본에는 사고무친에 어딘가 어딘지 길도 알 수 없는데 혼자가 돼 정말 큰일이었다. 머리를 굴렀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침착하게 느껴지지 않겠지만 의외로 나는 침착한 구석이 있다. 성재와 함께 묵고 있는 숙소의 친구 이름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친구는 도쿄 시부야 거리에 잘 가서 지낸다는 이야기도 생각났다. 무작정 이 사람 저 사람 수소문해 시부야 거리로 찾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 친구가 시부야 거리에서 다른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있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 친구는 재일교포였지만 성재와 달리 우리말은 전혀 하지 못해 집이 어디냐고 의사소통 하기도 쉬운 노릇은 아니었다. 손짓 발짓 다해서 물었더니 알아들었는지 '오쓰카 게이츠'라는 지명을 댔다.  

 

무조건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오쓰카 게이츠'만 외쳤다. 어느 정도 눈에 익은 동네가 눈앞에 나타났다. 환호성이 입에서 절로 나왔다. 성재가 집 앞에서 걱정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놈은 태평양 한가운데다 떨어뜨려 놓아도 찾아올 것"이라며 어깨를 두드렸다.  

 

일본여행은 인생행로를 급선회할수 있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일본 레코드점에서 잔뜩 사들고 온 CD와 테이프를 들으며 모종의 결심을 했다. 상문고교에서 안양예고로의 전학을 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이미 학과공부에는 신물이 나 있었고 특히 일방적으로 머리에 집어넣는 주입식 교육은 체질에 전혀 맞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의견을 말했다. 날벼락이 떨어질 줄 알고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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