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명의 배우 벤 스틸러, 잭 블랙,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전면에 내세운 <트로픽 썬더>의 포스터이건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이름을 표기해 주지 않으면 누군지도 못 알아 보겠다. 간만에 데굴데굴 구를 뻔한 것을 참아가며 <트로픽 썬더>를 보았는데, 되짚어 보니 어느 누군가에게는 이 영화의 출연이 불편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1992년의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에 27세의 청년이 이름을 올린다. 리처드 아텐보로 감독의 <채플린>에서 채플린 역으로 분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결과는? 그는 단지 후보로만 지명되었을 뿐이다. 1992년의 남우주연상은 성격파 배우, 메소드 연기의 달인 알 파치노가 가져갔다. 눈이 먼 퇴역 장교로 나왔던 <여인의 향기> 덕에 그는 조연상 대신 주연상을 챙겨갔다. 그는 이 해에 <글렌게리 글렌로스>로 남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던 터라 주조연상을 다 가져갈 수 있을 것인가도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결국은 주연상 하나만 받아갔다. 그간 명연기를 선보여 자주 노미네이트 되었지만 오스카와 인연을 맺지 못한 그인지라 이 날의 수상은 그것에 대한 보상일 수도, 그의 연기력에 대한 평가를 보수적인 아카데미조차 외면할 수는 없었던가 보다. 27세의 청년에게는 다른 기회가 있을 것이다라고 다들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 그는 한 번도 아카데미에 후보지명 된 적이 없었다. 아카데미의 수상작들을 미리 점칠 수 있는 잣대가 되는 이 해의 골든글로브 시상식. 아카데미 시상식에 앞서 열리는 헐리우드 외신기자 협회가 수여하는 이 상, 1992년의 위너는 역시 알 파치노였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여기서도 위의 영화로 후보 지명 되었으나 알 파치노의 관록에 밀린 듯했다. 골든글로브에 이어 아카데미까지, 27세의 청년은 후보로 지명된 것만도 영광이라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해 그는 알 파치노에게 2연타를 맞았다.
자타가 공인하는 천재배우는 약물중독 등의 문제로 재활원을 드나들었고 다시 부활하여 전성기를 맞았을 때는 그의 인생을 반추하거나 투영할 수 있는 캐릭터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전에 그에게 먼저 손을 내민 건 골든글로브였다. 보스턴의 기괴한 여피족 변호사들이 나오는 TV시리즈 <앨리 맥빌>로 그는 2001년 골든글로브 TV 시리즈/미니시리즈/영화(TV) 부문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참고로 이 시리즈는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앨리 맥빌>은 4개의 골든글로브 트로피를 받아갔다.
<트로픽 썬더>를 잘 나가다가 한 순간에 망가진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라고 단정하기엔 무리가 있다. 카메오로 나오는 톰 크루즈나 조역인 닉 놀테, 그리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까지. <트로픽 썬더>에서 각각 주연, 조연, 카메오로 만날 수 있는 이 세 배우들의 공통점은 아카데미에 이름은 올렸으나 물을 먹은 바 있다는 점이다. 약물중독의 문제라면 톰 크루즈는 제외해야 하지만, 케이티 홈즈와의 열애설을 인정하며 오프라 쇼에 나와 그야말로 쌩쑈를 벌였던 일이나 그의 종교 때문에 심심찮게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르기 한 사건 때문이라도 이 세 배우들을 한데 묶어볼 수도 있겠다 싶다. 그래도 톰 크루즈는 세 명 중 가장 많이 오스카에 후보 지명된 바 있다. 관록(?)의 배우 닉 놀테가 아카데미와 별로 인연이 없다는 것도 의외의 사실 중 하나다. 바바라 스트라이젠드와 함께 나왔던 영화 <프린스 오브 타이드>와 <어플릭션>은 그와 아카데미에 다리를 놓아주었으나 수상하지 못했다.
<트로픽 썬더>의 카메오 톰 크루즈. 갑자기 격하게 노화된 아저씨 모드에 세계는 경악했다. 아니 한국에서만 그랬나. 오른쪽 사진을 두고 유난히 이 땅에서만 호들갑을 떨었던 것 같다. 이제서야 이 사진을 뒤적거려 보니 영화 출연 때문에 그랬구나 싶다. 딸 수리 때문에 그나마 이미지를 만회한 케이스. 1월인가 <발키리> 개봉을 위해 프로모션 차 한국에 온단다.
<트로픽 썬더>는 영화 속 영화가 나오는 작품이다. 주연배우들이 영화 속에서 맡은 역할은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아카데미를 다섯 번 수상한 메소드 연기의 달인 커크 라자러스로 나온다. 벤 스틸러는 한물 간 액션배우 터크 스피드맨을 연기한다. 영화 속 영화 제목은 이 영화의 타이틀과 같다. 베트남 참전용사의 수기를 바탕으로 촉망받는 신예감독 데미안(스티브 쿠건)이 메가폰을 잡지만, 배우들을 다루기가 만만치 않다. 더군다나 커크 라자러스는 이 영화를 위해 피부색을 바꾸는 수술까지 감행했다.
예산문제로 촬영을 접을 뻔도 했지만, 감독은 궁극의 방법을 택한다. 통제불능의 배우들을 정글 한 가운데 몰아넣고 기본적인 장비와 소품들만 지급한 체 알아서 베이스를 찾아오라는 것. 군데군데 카메라를 심어놓았다며, 이른바 날것 그대로의 영상을 관객들에게 선보이겠다는 건데, 일이 묘하게 꼬이기 시작한다.
이 글의 제목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실제로 뉴욕 출신인 그는 여기서는 호주 출신 배우 커크 라자러스다. 메소드 연기, 아카데미 5회 수상, 호주라는 캐릭터 설정은 단박에 러셀 크로우를 떠올리게 하는데, 실제로 그 누구도 오스카를 다섯 차례나 간 배우는 없다. 아마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자신의 캐릭터 설정을 읽으면서 15여년전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영화 속 영화인 <트로픽 썬더> 촬영 중 커크는 터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바보 역할을 진짜 바보가 되어 연기하면 아카데미에서 떨어진다고. 그런 척해야 수상할 수 있단다. <포레스트 검프>의 톰 행크스는 바보인 척 했지 진짜 바보가 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1992년으로 돌아가 <트로픽 썬더> 속 커크의 말을 현실에 적용시켜 보면 알 파치노는 장님인 척 연기했기 때문에 수상했고 진짜 채플린이 되어 연기한 자신은 떨어졌다는 자조 섞인 위로도 있는 듯하다. 그에게 이런 대사를 준, <트로픽 썬더>의 감독 벤 스틸러는 이 모든 것을 고려한 것일까? 게다가 여기에는 알 파치노의 이름을 노골적으로 패러디한 인물도 등장한다. 알파 치노. 알 파치노가 아니라 알파 치노.
여러모로 이 영화를 촬영하면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1992년의 아카데미를 떠올렸을 법 하다. 그러면서 그가 지은 건 미소였을까 쓴 웃음이었을까, 나는 그게 궁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