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뛰었다. 12월의 밤에 나는 뛰었다.
상영시간에 10분이나 늦게 도착하고 나서 땀을 흘리며 좌석에
앉았는데, 영화를 보면서 그토록 뜨거운 순간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윌리엄에겐 섹스가 전부였다. 적어도 사라를
만나기 전, 그러니까 20살 이전엔.
그런 그가 사라를 만나고, 그들의 미치도록 뜨거운 사랑은 너무
나 빨리 또 멀리 와버린다. 콘돔이 가지는 몇 그램의
그것보다 훨씬 무거운 사랑의 무게 에 감당하지 못
하고 감정적인 혼란 상태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하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다가 이내 그녀를 비
난하고, 그녀가 준 생일선물(어떤 의미에서는 이별선물)에 고
마워하다가도 분노를 느끼기도 하는 그의 자기모순적인 모습은
너무나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특히 자동응답기
에 메시지를 남기는 장면이 인상깊었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소설의 그 뜨거운 순간을 잘 옮겨왔다.
소설을 읽으면서 윌리엄의 역할에 에단 호크의 모습을 계속 떠
올린지라(실제로 에단 호크의 자전적 소설이다.) 마크 웨버라
는 배우에게 어색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마흔을 바라보는 에단
호크에게서 어떻게 20살의 섬세한 감정을 느낄 수 있겠는가!
그제서야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떠올렸던 그는 ‘비포 선라이즈’
속의 영원한 20대인 ‘제시’였다는 걸 알았다.(그는 이 작품에서
윌리엄의 아버지로 나온다.)
영화를 보면서 소설에서 느끼지 못한 몇 가지를 발견했는데,
하나는 에단 호크의 글 솜씨 못지않은 섬세한 연출능력이고 다
른 하나는, 윌리엄의 아버지는 텍사스에 남길 원했고 사라의 아
버지는 갑자기 가족을 떠났듯이 윌리엄 또한 그들의 사랑의 순
간에 남길 원했고 사라는 그녀의 아버지와 같은 방식으로 윌리
엄을 떠났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만다라는 캐릭터에 대한 묘사
가 부족했던 것이 조금 아쉬웠다. 소설 속의 그녀는 알고 보면
생각이 깊고, 사랑의 상처에 괴로워하는 여성이지만 영화에서
는 너무 평면적으로 다뤄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라와 윌리엄
의 뜨거운 순간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런
지도 모르지만. 아쉽다, 참.
영화를 다 보고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상영시간에 늦은
게 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리 준비하고 앉아서 윌리엄
과 사라의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보는 것보다는 내가 없어도
그들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고 느낄 수 있었던,
그 경험이 좋았다.
이토록 뜨거운 순간은 그런 영화다. 처음 몇 장면을 놓쳐서 내
용을 파악하는데 어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토록 뜨거운 ‘순
간’을 그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