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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눈물- 종교의 배타성에 대한 이야기

서지애 |2009.01.04 15:02
조회 164 |추천 0

탱크부대 등 대규모 지상군…하마스 박격포로 반격,국방장관 “짧지도 쉽지도 않은 전투” 장기전 시사

중동의 눈물- 종교에 대한 고찰(?)

 

 

 

가슴이 아프다.

연일 보도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폭격은 사진만 보아도 얼마나 무참한 살해가 벌어지는지 알 수 있다.

 

아무리 "천하의 몹쓸 놈"이라는 칭호를 얻어듣는 사람이라도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할 이유가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들은(유태인) 믿지 않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가끔 아이들 중에서조차 힘이 약한 아이를 괴롭히거나 친구의 잘못에 대해 지나치게 야유하고, 트집을 잡는 경우를 보게 되면 나는 가끔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 중 잡혀온 여인에 대해 이야기 한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인을 돌로 치라"

 

아무도.. 심지어 그 여인을 잡아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지금으로 말하면 유태인들 중의 권력자)까지도 그 말씀에 함부로 여인에게 돌파매질을 하지 못했다는 성경의 유명한 일화이다.

 

이 일화를 확대 해석해보면 인간이 인간의 죄를 심판하고, 벌하는 것은 지극히 교육적이고, 교화적인 것이 아닌 이상 합당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하물며 전쟁. 전쟁이야 말로 합당한 것일까.

이스라엘 입장에서 논하여 보아도 그들이 일으킨 전쟁은 합당하지 못하다.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위협을 가하는 테러 집단이며 그들의 시오니즘에 저항하는 집단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하마스를 생명과 피로 심판할 명분은 없다. 오로지 인간을 심판하는 것은 신의 권리일 뿐.

그들이 믿는 하나님 조차도 이방인이라 하여 생명을 바로 앗아가지 않았다.  구약의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은 잔악하고, 이방신을 섬기는 니느웨이 사람들에게 '요나'란 선지자를 보내어 변화의 기회를 주고자 하였다. 그 과정에서 요나는 증오스러운 니느웨이 사람들에게 그런 기회조차 줄 필요가 없다며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을 때 큰 물고기를 예비하여 요나를 삼키게 했다는 성경 속 일화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전쟁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이미 신약 성경에는 우물가의 사마리아(유태인이 멸시하는 이방인) 여인에게까지도 신은 인간다운 생존권과 예배의 권리를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요한복음 8장)

 

사마리아 여인 曰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사마리아

한 때 아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식민지화 했을 때, 이스라엘의 북쪽에는 아시리아인들과 유태인간의 민족적 교합이 있었다. 당시 아시리아의 문화에 동화되고, 혼혈된 유태인을 가리켜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그들의 역사는 계속 이어져 지금도 몇 천명의 사마리아인이 생존하고 있다고 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 자체도 유태인이 아닌 이방인들에게까지 참된 진리를 공유할 수 있다는 반시오니즘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이방인들도 유태인들과 공존해야 할 집단임을 일깨워주는 역사적인 사실이었다.

 

그러나 유태인은 분명히 예수님(메시야)이 이 땅에 오신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물며, 그의 부활도 인정하지 않는다. 아직도 그들만의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했기에 그들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으며,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인류에 왔다는 주님의 말씀을 묵살한 채 지금도 시오니즘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를 공격에 대하여 비난하고, 안타까워한다.

그런데 그것은 더 나아가 유태인의 시오니즘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더 발전하면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에 대한 비난으로 바뀌게 된다.

둘은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종교로써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이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마도 보수 크리스쳔인 미국의 대통령 부시도 한 몫 했겠다 싶다.

 

그러나 유태교와 기독교를 나는 '샴쌍둥이'에 비유하고 싶다.

몸의 일부분은 붙어있으나 그들은 절대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없다.

두 종교가 인류를 바라보는 시각에 얼마나 큰 차이점이 있는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다르다, 다르다 해도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것 같아.. '샴쌍둥이'에 대한 비유를 해본다.

 

인류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하냐, 인정하지 않냐에서 출발할 수 있겠다.

 

기원전 150년까지 집대성된 구약에는 '예수님'의 존재가 나와있지 않으며(다만 예언되었을 뿐), 죄를 지었을 때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의 번제물이 필요했다.

구약의 시초. 즉 창세기에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그 후손들은 아담과 하와의 선죄, 즉 원죄를 안고 세상에 온다는 '성악설'을 믿게 되었다. 따라서 양이나 가축의 피를 번제물로 드려 원죄를 씻어야 했다. 즉, 구약시대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다리 역할이 없었으며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집단이 '유태인'이라는 한정된 집단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지금의 시오니즘은 바로 하나님, 유일신을 믿는 한정된 집단에 대한 강한 소속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반면 예수님의 탄생부터 시작하는(기원후) 신약시대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해주실 예수님이 세상에 발자취를 남기시면서 하나님을 믿는 집단이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것은 예수님이 원죄를 속죄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을 믿는 사람 누구든지 구원을 받게 된다는 가능성 때문이었다. 구약시대의 번제물 없이도 누구든지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더불어 예수님의 제자들이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을 받고 각 나라(당시에 소아시아와 유럽)에 퍼져 전도 사역을 하게 되면서 시오니즘을 본격적으로 탈피하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음'이란 기쁜 소식, 복된 소식으로써 그 내용은 유태인이 아닌 이방인들에게도 예수님을 믿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의 소식을 의미한다.

신약 성서에는 시오니즘을 탈피하자는 주장과 관련된 일화나 명제들이 수없이 기록되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인한 만인의 속죄를 부인하는 유태인들은 유일신을 믿는 자신들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인류를 바라보고 있다. 물론 2000년이 넘게 지구촌 곳곳에 흩어져 살아온 유태인들의 상황을 고려해볼 때 두 가지 의문점을 끌어내볼 수 있다.

첫째. 2000년 동안 타민족, 타문화에 대한 공존의 가능성은 없었을까.

둘째. 나라 없는 오랜 세월 동안 세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들의 독자적인 혈통과 명분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다분히 뻔한 답이다.

첫째. 타민족, 타문화에 대한 공존이나 동화 대신 그들이 선택한 것은 부의 축적으로 인한 권리 획득이었다. 더 나아가 그것이 권력 획득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둘째.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시오니즘 때문에 유지가 가능하였다. 그것이 없었다면 현대 사회에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부활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혹시 샴쌍둥이 관계이기에 크리스쳔은 유태인에 대하여 호감을 갖고 있지 않는가? 라는 물음을 던질지 모르겠다. 사실 나도 이스라엘을 여행하면서 깜짝 놀란 것이 예루살렘 거리 거리마다 이스라엘 국기와 미국 국기가 번갈아가면서 걸려 있었기에 얼마나 미국과 이스라엘이 우방 관계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또 '미국' 하면 크리스쳔 윤리로 세워진 국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는가. 따라서 크리스쳔과 유태인의 관계로까지 확대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더 알아두어야 할 것은 오늘날 지구촌에서 '국가'라는 집단이 어떠한 제스쳐를 취할 때에는 결코 명분만을 이유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계적으로 흩어진 유태인들은 그들의 권력을 갖게 되었고, '미국'을 움직일 수 있는 경제적인 힘까지 얻게 되었다. 참고로 유태인들의 막강한 권위자들을 살펴보자면..

예술계 중 음악가 바그너 멘델스죤 쇼팡,  화가인 샤갈 영화배우인 찰리 채플린이있으며,  학계에는 아인슈타인 독가스발명가, 하버 법의학자 롬브로조, 정신분석학의 프로이드 등이 있다. 재계에는 영국의 로스차일즈, 프랑스의 로칠드, 오스트리아의 호프만 슈달, 미국의 록펠러 등 헤아릴 수 없다. 세계적인 대기업인 록펠러, 모건, 듀폰, 로얄더치, GE, GM, ATT, IBM,보잉 US스틸, 제록스등도 유태인 자본가들이 이룬 대기업이다. 이와 같이 미국은 1차 산업에서부터 제조, 서비스업까지 유태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분야가 없으며, 유럽의 로스차일드, 해운왕 오나시스등 각국에 퍼져있는 자본력까지 감안다면 세계경제는 뉴욕의 월가에서 홍콩자본까지 그물 같은 유태자본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또한 힘의 논리로 볼 때도 중동에서 이란을 비롯한 아랍권을 공동의 적으로 삼고 있으므로 미국 입장에서는 경제적, 군사적인 이유로 유태계와의 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현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특별한 감정은 없지만 그 옆 아랍권에 대한 패권에 특별히 예민한 미국 정부는 이 전쟁으로 인하여이스라엘이 대신 그들을 제압하리라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미국이 단순히 종교로써 동맹을 맺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사실, 크리스쳔의 유태인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은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었다.

실제로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며 탄원했던 자들은 유태인이었으니 콘스탄틴 황제의 밀라노 칙령 이후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인 유로피언들에게 유태인은 눈의 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이 뻔하다.

잘못된 크리스쳔의 역사 중에 하나인 십자가 원정 때도 유로피언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유태인들이 학살당했는지 모른다. 한 역사가가 1차 십자군 원정 당시 독일에 살았던 수천만 명의 유대인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고 한다.

 

"그들은 라인란트를 거쳐, 동쪽으로 여행했고, 유대인 마을에 다다랐다. 문득 회교도와 싸우기 위해 수천마일을 횡단할 것을 맹세한 십자군 전사들은 자기 나라에 이교도가 있음을 깨달았다. 왜 주님을 살해한 자들을 남겨두시는 겁니까? 십자군 전사들은 유대인이 사는 마을을 하나하나 사납게 공격해갔다. : 쾰른(Cologne), 보름스(Worms), 마인즈(Mainz)… 그들은 남자, 여자, 그리고 아이들 5000명 정도의 시체와 까맣게 탄 폐허를 남겨두고 떠났다."

- David Bamberger of Abba Eban이 각색한 「유대의 역사」(1979) -

 

더불어 경제 분야에서도 유태인은 유로피언들에게 가시같은 존재였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은 16세기 유럽이 보는 유태인의 이미지를 꼬집고 있고 있다. 원래 셈이 능한 유태인들은 중세 시대부터 세금징수원으로 많이 일 했는데 귀족들의 몰락으로 금전을 취득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고리대금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게 된다. 이로써 유로피언들에게는 유태인이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과 같은 존재로 비춰졌다고 한다.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이 가능했던 것도 유로피언들의 이런 냉소적인 시각을 활용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따라서 크리스쳔과 유태인간의 호의적인 관계를 지적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다.

 

어쩌다 보니 설교가 되어간다.;

크리스쳔인 나에게 요즘 이런 논제가 주변에서 쏟아지는 바람에 약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나는 분명 이스라엘 여행시 보았던 베들레헴과 헤브론의 상황에 분노했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폭격에 대하여 성경의 논리를 떠나서 인간적으로 더욱 더 분노한다. 그런데 크리스쳔이라는 이유로 이스라엘과 세트로 엮어버리는 듯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답변을 해주고 싶었다. 아마도 응어리가 졌나보다.

 

솔직히 나는 다른 종교를 종교로써는 인정하되, 신으로써는 인정할 수 없다. 그것을 타종교를 배격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면 그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왜 인류는 종교를 하나로 만들지 못했는가? 왜 신을 부르는 이름이 다른가. 왜 교리가 다른가?" 

물론 거기에 대하여 자연환경과 사회적 환경이 다르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를 댈 것이다. 그러나 자연환경과 사회적 환경이 같은 대한민국 안에서 조차 종교는 개인마다 다르다. 종교는 '믿음'에 대한 독립적인 반응이다. 내가 믿는 신과 당신이 믿는 신이 다른데 어찌 그 신을 인정할 수 있는가. 그 신을 나의 신과 같다고 인정할 때 내 안의 종교는 존재의 이유를 잃게 된다. 내 종교에 대한 존재감이 상실되면서까지 다른 신을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거야 말로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셈인 것을..

 

타종교를 인정하는 것은 인류의 신이 하나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인으로써의 삶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여행길에서 수많은 무술림과 승려들을 보았고, 그들의 기도를 경험했다. 그러나 그들이 나 같은 크리스쳔보다 하위 존재라는 것을 한순간도 느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내가 느낀 것은 그들이 기도하는 시간은 늘 경건했고, 그들의 정결한 삶은 존경받아 마땅하다는 것 뿐. 그러나 나는 무술림도 아니고, 승려도 아닌 크리스쳔일 뿐이다.

 

크리스쳔의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은 소수 크리스쳔의 잘못된 관행이거나 비크리스쳔들의 잘못된 관점으로 인한 것이다. 오히려 그런 관점으로 크리스쳔 모두를 비난하는 것 또한 배타적인 행위가 될 수 있다. 무릇 배타성이란 것은 한 쪽에선 당연한 논리이지만, 한 쪽에선 참으로 억울한 논리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일반화의 오류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상대의 장점보다 단점을 보려는 속성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세계화 되었다는 21세기에는 서로 다름 속에서 서로 다름을 존중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교육목표가 될 것 같다.  유태인의 시오니즘을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런 배타적인 요소가 없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 정치, 성,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법.

여기서 마쳐야겠다. ;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아프다. ㅋ

 

 

1년 전.. 베들레헴에서 보았던 팔레스타인의 마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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