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항쟁이 말들어낸 내용의 변화 측면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는 촛불항쟁의 정치적 성격을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촛불항쟁에 내재된 정치적 지향성을 올바로 이해해야 미래 우리 사회의 정치 발전 방향을 예견할 수 있다.
촛불항쟁은 정치적 성격의 측면에서도 지난 시기의 대중항쟁과는 뚜렷하게 구별된다. 4.19항쟁과 광주항쟁을 거쳐 6월 항쟁으로 꽃을 피운 한국 사회운동사의 궤적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이를 명확하게 분석하기란 쉽지 않다. 대개는 항쟁 지도부의 정치적 성격을 이해하면 항쟁의 성격이 이해되기 마련인데, 촛불항쟁의 경우는 지도부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항쟁의 성격을 대표하는 선언문과 같은 문서도 없었다.
따라서 촛불항쟁의 정치적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도부나 선언문과 같은 유형의 것이 아닌 항쟁 전체를 지배했던 구호와 정서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항쟁의 요구와 직접적 연관이 없는 듯 보이는 구호가 오히려 그 안에 숨겨진 정치성향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등장
17대 대선을 지나며 한국 사회를 규정해온 민주 대 독재의 전통적 구도는 약화되고 신자유주의 대 반신자유주의 구도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촛불항쟁 과정에서 이명박 정부의 공안통치가 전개되자 다시금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가 부각되고 있다. 이를 보며 촛불항쟁의 의의를 단순한 반한나라당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에서 찾으려는 아전인수격 해석도 등장하였다.
촛불항쟁이 새로운 민주화 운동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과거식의 민주 대 독재 구도로의 회귀는 아니다. 촛불항쟁이 추구한 민주의 가치는 신자유주의 정치체제가 만들어낸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대항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즉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 아니라 반신자유주의 민주화 투쟁으로서의 정치적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촛불항쟁이 소규모로 진행되던 5월을 지나 6월에 이르러 대규모로 발전한 원동력은 국민 다수의 뜻을 무시하는 정부에 대한 분노였다. 이러한 정부의 태도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행되는 국가들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위협 요소다.
세계화가 진행되기 이전에는 국회와 같이 보통선거로 선출된 대표자들의 협의를 통해 정부의 정치적 결정이 내려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정부의 정책 결정에 국내 정치체제를 벗어나 국제기관과의 협의나 국가 간의 협의가 오히려 더 강한 구속력을 갖는 사례가 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국론의 분열을 감수하며 일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한미FTA다. 촛불항쟁을 일으킨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역시 같은 경우다.
보통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들의 협의에 의한 정치적 결정은 선거 참여자에게 정치적 구속력을 갖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 간 또는 국제기구와의 협상의 경우는 문제가 다르다. 국제기구나 다른 나라의 정부는 보통선거를 거친 국민의 정치적 대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역외자 일뿐이다. 따라서 자신들의 의사에 반하는 협상과 결정은 강한 반발로 이어지게 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국민국가를 지탱해온 보통선거의 가치를 위협하는 국가 간 협상이 늘어나며 이는 곧 민주주의의 새로운 위협이 되고 있는 것이다. 촛불항쟁은 바로 이 지점에서 위협에 대한 대항적 성격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처럼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경제적 지배논리만이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보통선거가 갖는 민주적 가치를 근본적으로 왜곡하는 일방주의적 지배체제, 반민주적 정치체제의 등장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촛불항쟁은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일방주의적 정치체제에 대항한 최초의 반신자유주의 민주화 항쟁으로 기록될 것이다.
국민의 뜻에 반하는 신자유주의적 정책결정은 이미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런 점에서 광우병 쇠고기 문제에 이르러서야 대중적 저항이 일어난 것은 한국 사회의 변화를 보여준다. 우루과이라운드협정 등의 농업개방 반대투쟁은 농민들의 격렬한 저항을 낳았지만 국민적 운동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다. 또한 국가의 운명이 달린 한미FTA 반대운동의 경우도 국론의 극심한 분열을 낳았을 뿐 국민적 항쟁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위의 두 사안들이 오히려 광우병 쇠고기 문제보다 국민들에게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칠 사안이라는 것이다. 광우병 쇠고기 문제는 국민들에게 미치는 경제적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않은 반면 안정성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낳았다. 이는 운동사에 기록된 숱한 정치투쟁들과는 사뭇 다른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시기의 정치투쟁들은 정치적 민주화를 요구하는 투쟁들이었다. 3.15 부정선거를 반대한 4.19 항쟁, 12.12 군사쿠데타와 뒤이은 계엄령에 반대한 80년 광주민주화항쟁,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요구한 6월 항쟁 등은 모두 정치적 민주화를 요구하는 항쟁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투쟁은 필연적으로 정치권력의 교체를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촛불항쟁은 정치적 민주화 투쟁의 연장선 위에 있지 않았다. 광우병 위험을 방치한 정부 정책의 철회를 요구하는, 즉 정부의 정책에 대한 반대 시위였다. 따라서 촛불항쟁은 정권교체를 요구하는 데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물론 ‘이명박 OUT’이라는 구호가 등장하기도 했지만 이는 정권교체의 의지가 실린 요구라기보다는 감성적 구호였다. 또한 일부에서 이명박 타도 투쟁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지배적인 의견은 아니었다.
촛불항쟁의 직접적 계기는 미국산 쇠고기의 안정성 문제였다. 정치적 민주화를 위한 정치투쟁에서 삶의 안정성을 보장받기 위한 시위로의 전환은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정치적 민주화는 전근대적 정치체제를 청산하고 근대적 정치체제를 수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반면 삶의 안정성을 보장 받기 위한 정치행동은 근대를 넘어 현대적인 정치의제로의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돌이켜 보면 2000년대 들어 가장 격렬했던 대중시위는 부안의 핵폐기물 처리장 건립 반대 투쟁이었다. 부안 이외의 지역들에서도 환경의제를 두고 정부와 지역민들 간의 소규모 충돌이 나타나기도 했다. 보수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님비현상으로 몰아세우기도 했지만 이러한 모습들은 분명히 우리 사회의 변화 방향을 규정하는 새로운 정치적 의제다.
이와 관련해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 교수의 ‘위험사회론’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위험 사회론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불안과 재난과 불확정성에 노출돼있으며, 부의 사회적 생산은 그보다 더 많은 양의 위험을 사회적으로 생산해 낸다. 성장위주의 근대화론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발전, 풍요와 합리성과 효율적인 관리시스템을 자랑하는 현대사회의 이면에는 항상 자본과 과학기술의 맹목적인 확장에 따른 위협적 요소가 상존한다.
울리히 벡 교수는 이런 위험사회의 징표로 오존층의 파괴와 지구 온난화, 유전자 조작, 환경 오염과 생태계 파괴와 조류독감 같은 신종질환 그리고 경제 공황 등을 꼽는다. 그는 국민의 안전 보장에 실패한 사회를 위험사회라 규정하면서 한국 사회를 특별히 위험한 사회로 평가했다.
위험사회론은 정치적 민주화를 넘어서는 정치적 의제 확장의 성격을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특히나 촛불을 촉발시킨 직접적 계기에 대한 사회학적 설명으로 적합하다. 왜 국민들이 농업개방 문제도, 한미FTA 문제도 아닌 광우병 쇠고기 문제에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할 지점이 있다.
위험사회론만으로는 촛불항쟁이 일시에 전국적 대중항쟁으로 발전한 원동력을 설명할 수 없다. 촛불항쟁의 주체들은 광우병 쇠고기 문제를 단순한 먹거리의 안정성 문제가 아닌 국민주권에 대한 유린으로 이해했다. 다시 말해 직접적 계기는 안정성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지만 그 본질은 신자유주의 정치체제의 비민주성에 대한 항거였다. 이것이 촛불항쟁의 본원적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저항운동을 넘어 애국적 주권자 운동으로의 전환
이번 촛불항쟁의 거리에서 촛불과 함께 상징물로 등장한 것이 바로 태극기였다. 광주항쟁이나 6월 항쟁에도 태극기가 등장하긴 했지만 대중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때 국수주의 논쟁이 등장할 정도로 널리 사용되었다.
진보진영의 일부 인사들은 보수진영의 상징물인 태극기로 인해 촛불항쟁에 국수주의적 경향이 나타나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촛불 주체들의 의식에 대한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태극기는 항쟁 참여자들의 의식이 저항의식에서 진정한 주권의식으로 전환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즉 태극기는 애국심의 표현이자 대한민국의 진정한 주권자는 이명박 대통령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이라는 선언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당시 거꾸로 인쇄된 태극기를 들고 응원하던 이명박 대통령의 사진이 인터넷상에서 등장한 이후 그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제대로 된’ 태극기를 들자는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나 항쟁기간에 등장했던 ‘우리가 민주주의다’라는 구호는 촛불항쟁이 지닌 주권의식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태극기를 들고자하는 청년들의 의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002년 거리응원에 등장한 태극기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당시 거리를 가득 메운 태극기의 물결에 대해 모 언론은 젊은 ‘태극기 세대’를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주의’의 등장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경제 성장과 민주화 이후 성장한 이들 젊은이에게 한국이라는 공동체는 자부심과 긍지의 대상이다. 전 세대들이 우리 사회에 대해 강한 열등감을 가졌던 것과 분명하게 대별된다. 따라서 이들에게 태극기는 애국심의 상징이자 이상적 국가가 되길 바라는 내 나라의 표식이다. 더 이상 통치자에 대한 충성의 상징물이 아닌 것이다.
결국 촛불항쟁에서 태극기를 통해 표현된 것은 정부에 대한 저항 의식을 넘어 헌법과 정부의 진정한 주인이 촛불이라는 애국주의적 주권의식이다. 즉 현재의 통치자는 태극기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의식의 발로다. 이는 대단히 발전된 주권의식으로서 한국 민주화 운동사에서 중대한 의식의 발전이다.
폭압정치 아래서의 민주화 운동은 저항운동의 성격을 갖는다. 이러한 저항 의식은 곧 국가 체제에 대한 부정에 기초하고 있으며 정권교체를 최상의 가치로 만든다. 그러나 대중의 의식이 저항주의를 넘어서 애국주의적 주권의식으로 발전하면 단순한 정권교체에 만족하지 않는다.
국민의 주권을 실현할 새로운 민주화 체제에 대한 요구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촛불항쟁을 통해 애국주의적 주권의식이 나타났다는 것은 향후 반신자유주의 민주화 운동의 방향을 추정할 수 있게 하며 촛불항쟁의 정체성이 곧 국민주권의 실현을 지향하는 질 높은 민주화 투쟁임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해 촛불의 정체성을 헌정애국주의로 이해한 중앙대 신진욱 교수의 평가는 참고할 가치를 지닌다. 신 교수의 글을 통해 촛불의 정치적 성격을 이해해보자.
참여자들의 정체성에서도 의미심장한 변화가 발견된다. 이미 2002년의 붉은 악마는 태극기를 흔들고, 얼굴에 태극무늬를 새기고, 대/한/민/국을 외쳤다. 2004년 노무현대통령 탄핵반대 촛불시위에 참여한 시민들 역시 그랬다. 2008년 촛불시위의 주제가라 할 만한 ‘헌법 제1조’ 노래는 이 때 만들어진 것이다.
이들이 손에 쥔 태극기, 이들이 외치는 대한민국의 함성에서 권위주의적 국가주의, 공격적 애국주의, 민족적 내셔널리즘의 위험을 느끼는 것은 비판적 이성의 정당한 문제제기다. 그러나 민주공화국과 주권재민의 이념을 대한민국 헌정질서의 최상위의 원리로 규정한 헌법 제1조를 노래하는 이들의 행위맥락 속에서 그러한 위험을 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아 보인다.
촛불집회가 정치적 성격을 갖게 되자 헌법1조 노래가 주제가로 부상했고, 이어서 아침이슬, 님을위한행진곡, 광야에서, 함께가자우리이길을, 동지가가 등장했다. 사람들은 손에 태극기를 흔들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2000년대 들어 시민들, 특히 청소년과 젊은 세대들은 대한민국이라는 특수한 정치공동체와 긍정적 동일시를 하는 동시에, 민주주의와 시민적 자유, 사회적 연대라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집단행동에 참여하고 있다.
여기에서 반공주의적 국가정체성이나 저항적 민족주의와 구분되는 새로운 집단적 정체성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은 바로 헌정애국주의(constitutional patriotism), 즉 민주적 법치국가의 보편주의적인 헌법이념을 특수한 정치공동체에의 애착과 헌신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열망이다.
이것은 한국 저항운동의 역사에 매우 특징적인 현상이며, 헌정애국주의의 규범적 내용은 1960년 4.19혁명, 1980년 광주항쟁, 1987년 6월 항쟁, 그리고 2008년 촛불시위로 이어져 오면서 형식적 민주주의로부터 시민적 자결과 사회적 연대의 이념으로 서서히 발전해오고 있다.
신교수는 촛불항쟁의 정체성을 헌정애국주의라는 열망으로 이해했다. 헌정애국주의란 하버마스가 제기한 개념으로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에 대한 대항개념이다. 즉 혈연이나 문화, 관습에 대한 맹목적 지향을 가진 공동체가 아니라 보편타당한 이상적 헌법 이념 아래 혈연이나 문화를 넘어선 공동체의 형성을 지향하는 애국주의를 의미한다. 촛불항쟁의 정체성은 이러한 헌정애국주의에 있기 때문에 국수주의적 애국주의와는 구별된다고 본 것이다.
파시즘을 경험했고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는 통합을 이뤄내기도 했던 유럽적 토양에서 나온 헌정애국주의 틀로 촛불항쟁의 성격을 온전히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특히나 헌정애국주의 개념을 확장하면 민족주의와 대립점이 형성될 수밖에 없어 분단이라는 특수한 처지에 놓인 한국의 상황을 모두 설명해내지 못한다.
그러나 신 교수가 지적하듯이 촛불항쟁은 헌정의 최고 가치를 수호하고자 하는 정치성향을 보였다. 이를 한국적 토양에서 정의한다면 저항주의적 의식이 애국주의적 주권의식으로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제 한국 사회운동의 과제는 단순한 정권의 교체나 획득을 넘어 촛불항쟁에서 보여준 진정한 주권의식을 담아낼 새로운 민주화 체제를 목표로 해야 한다.
87년 6월 항쟁 체계와 2008년 촛불의 충돌
현재의 정치체제는 87년 6월 항쟁의 결과다. 당시 군부독재의 종식을 바라던 국민의 열망은 대통령직선제 쟁취로 표현되었다. 이른바 체육관 선거를 직선제로 바꾸지 못하면 군부의 영구집권을 종식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민의 대표자는 모두 보통선거로 선출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민주화 요구이기도 했다.
국민들의 개헌 요구를 수용한 6.29선언으로 뜨거웠던 6월 항쟁은 종결되고 개헌 논의가 진행되었다. 현행 정치체제의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새로운 정치체제를 논의하는 협상자리에 항쟁의 주역인 국민의 의사는 철저하게 배제되었던 것이다.
당시 항쟁의 지도부이던 국민운동본부 역시 개헌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한 채 대선 예비후보들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분열되어 갔다. 이런 상황에서 개헌 과정은 예비 대통령 후보들의 이해관계를 절충해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국민의 참여를 봉쇄한 치졸한 협상과 졸속 개헌 과정이었다.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전개한 것은 국민들이었으나 그 과실을 따 먹은 것은 보수적인 정치권이었다. 그 결과 선거시기 외에 국민들이 대표자를 견제할 어떠한 도구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 대통령을 탄핵할 권리는 보수적인 정당이 운영하는 국회가 갖게 되었고 국회는 그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게 되었다.
대통령의 국회해산권도 사라졌다. 국회를 견제할 어떠한 장치도 없었다. 6월 항쟁으로 탄생한 현재의 정치체제는 오로지 선거시기에만 국민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반쪽 정치체제로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별다른 불편함 없이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한국에서 민주화가 완성된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촛불항쟁은 그 환상을 여지없이 깨뜨렸다.
국민들 절대 다수의 지지 속에 진행된 항쟁에 대한 폭력진압, 인터넷과 언론에 대한 탄압 그리고 보수 언론의 왜곡보도와 공권력의 남용 등... 한국의 민주화는 거꾸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민주화의 역행을 경험하며 촛불의 요구는 비약하기 시작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고시의 철회에서 시작한 구호는 점차 이명박 탄핵이라는 구호로 바뀌어갔다.
87년 6월 항쟁이 만든 정치체제를 부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민주적인 보통선거로 뽑은 대표를 불과 3개월 만에 탄핵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87년 체제의 부정이다. 87년 체제를 부정하는 최초의 대중적 시위는 촛불항쟁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촛불항쟁을 좌초시킨 힘도 역시 87년 체제였다.
전국에서 100만이 궐기할 때까지도 순진한 촛불은 깨닫지 못했다. 현행 헌법상 대통령이 끝까지 버티면 국민들의 의사를 관철할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절대 다수의 국민들이 궐기하면 대통령은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은 환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환상이 깨지면서 촛불항쟁은 점차 소강상태로 빠져 들어갔다. 국민주권을 노래했지만 정작 주권을 행사할 길이 막혀있었다. 촛불집회는 그렇게 87년 체제에 의해 진압당하고 말았다.
정상적인 민주국가라면 국민 대다수의 요구를 수용해야 했다.
정상적인 민주국가였다면 국민들의 의사를 묻기 위해 국민투표를 시행해야 했다. 그리고 아주 정상적인 민주국가라면 대다수 국민들의 의사에 반하는 정치적 대표자인 대통령을 소환해 탄핵하는 것이 가능했어야 한다.
촛불항쟁은 결국 6월 항쟁 체제와 정면충돌을 이루어낸 최초의 대중적 진출이었으며 좌초된 최초의 항쟁이었다.
이제 한국 민주주의의 진일보를 위한 하나의 역사적 과제가 분명해졌다. 6월 항쟁이 탄생시킨 현 정치체제를 넘어 서 언제라도 국민주권을 관철할 수 있는 정치체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것이 촛불항쟁에 담긴 중대한 정치사적 의의다.
대의제의 위기와 새로운 민주주의의 요구
촛불항쟁이 지난 87년 6월 항쟁과 다른 중대한 차이 가운데 하나는 대의제와의 긴장과 충돌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대의제와의 긴장은 현행 의회정치에 대한 철저한 불신의 결과다. 그리고 이는 제1 야당인 민주당에 대한 불신과 배척의식으로 표현되었다.
6월 항쟁의 시발점이 된 것은 86년 신한민주당이 2월에 시작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한 1천만인 서명운동’이었다. 민주당의 제안은 재야의 호응을 얻으며 전국적인 개헌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물론 진보진영과의 갈등이 첨예화되며 5.3인천대회가 무산되는 긴장관계도 발생했지만 국민적 수준에서는 민주당을 정치적 대리자로 인식하였다. 당시 민주당이 독재청산이라는 역사적 대의를 대변했기 때문이다. 민주당을 통한 민주화의 열망은 곧 대의정치를 정상적으로 회복하고자 하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촛불항쟁의 양상은 전혀 달랐다. 민주당은 더 이상 정치적 대리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시위에 참여한 민주당은 시위를 주도하기는커녕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였다. 시위 참여자들의 상당수는 민주당의 때늦은 참여에 대해 질타를 보낼 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들의 이런 모습은 민주당 집권 10년에 대한 냉정한 평가에 기초한 것이었다. 대중들에게 있어 그들은 이미 정치적 기득권자일 뿐 촛불항쟁의 열망을 대변해줄 존재가 아니었다.
국회를 장악한 한나라당을 적대시하면서 민주당에 대한 기대마저 접은 상태에서 국회를 통해 문제를 풀 수 있는 장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대의제를 통해 자신의 바람을 실현시킬 통로 자체가 봉쇄된 현실에서 국민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거리정치 뿐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당시 민주당은 가축전염병예방법 개정안 입법을 통해 광우병 쇠고기 문제를 국회에서 해결하겠다며 거리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8월 26일 여야 합의 아래 국회를 통과한 개정안은 촛불항쟁의 요구와는 한참 달랐다. 광우병 대책위는 개정안이 한미 간 쇠고기 협상을 예외로 하는 한편, 특정위험물질에 대한 대책조차 담고 있지 않다며 민주당을 이명박 정부의 공범으로 규정했다. 민주당은 사실상 촛불항쟁에 나선 국민의 열망을 배신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모습은 이른바 거리의 정치로 표현되는 국민들의 직접행동과 대의제가 보완적 관계를 유지한 것이 아니라 정면충돌한 것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촛불항쟁이 대의제와 충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거리에서 사용되는 에너지는 정당정치와 대의제의 발전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민주주의의 발전이 이루어진다며 사실상 촛불항쟁의 의의를 축소시키는 논리였다.
그러나 촛불항쟁은 적어도 잠재적 의식에서는 이미 현행 대의제를 넘어서고 있었다.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이제 막 취임한 대통령을 탄핵하자는 것이 촛불 참가자들의 주장이었다. 이는 현 대의제와의 충돌을 넘어 현행 정치체제까지 뛰어넘는 의식이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촛불에 의해 한국의 대의체제는 부정된 것이다.
대의체계에 대한 불신의 뿌리는 매우 깊고도 구조적이다. 국민들이 체감하는 국회는 부패의 산실일 뿐이다.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을 비롯한 정당도 예외일 수 없다. 이는 6월 항쟁 이후 20여 년간 반복된 구태정치, 부패정치를 통해 학습된 결과이기에 매우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또한 앞서 지적한 대로 신자유주의 정치체제는 보통선거가 지니는 민주적 가치를 부정하는 구조적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현재와 같은 대의제로는 국민의 의지를 통합시키는 민주적 대의제를 발전시킬 수 없다.
촛불항쟁이 대의제와 충돌을 일으키고 보통선거의 가치를 부정하며 요구한 것은 진정한 국민주권이었다. 더 많은 정치권력을 국민들에게 돌려 달라는 것이다. 선거 때만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비정상적 체계가 아니라 항상적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하자는 바람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직접 민주제적 요소를 매우 강화한 새로운 대의체제를 구성해야 한다.
한미FTA 와 같은 국가의 명운이 달린 사안은 국민투표를 거쳐야 한다. 모든 선출직 공무원에 대한 소환권은 필수다. 더 나아가 법안 발안권도 국민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대의제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새로운 대의제를 구성하는 길만이 촛불항쟁의 염원을 실현하는 길이다. 결국 촛불항쟁은 현행 대의제를 뛰어넘는 한국형 민주주의를 만들어야 한다는 대중적 제안을 한 것이다.
반신자유주의로의 의제 확장
촛불항쟁은 광우병 쇠고기 문제로 촉발되었으나 그 바탕에는 국민주권과 국가주권의 실현 이라는 의식이 깔려있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광우병 쇠고기 문제만이 아닌 더 폭넓은 사회적 의제들로 확장될 에너지를 풍부하게 가지고 있었다. 주권의식이란 국가운영의 주체로서 가지는 책임 의식이기에 이명박 정부의 잘못된 정책 일반에 대한 반대 의식으로 비약되는 것은 필연이다.
6월을 경과하며 광우병대책회의는 5대 의제를 제기하며 촛불항쟁의 의제 확장을 제안했다. 이후 5가지 의제 역시 함께 촛불의 의제로 구호화 되었다. 의제 확장을 두고 보수 언론들은 촛불이 정치화되었다며 이데올로기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때 마침 촛불의 동력이 줄어든 시점이었던 탓에 의제 확장의 타당성 여부를 두고 논란도 벌어졌다. 타당성 여부는 논외로 하기로 하자. 그러나 대책회의의 제안이 촛불항쟁의 참여자와 괴리된 상층만의 제안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아고라에서의 토론을 통해 네티즌들은 이미 의제를 확장해 가고 있었다. 한국 교육에 대한 문제제기는 촛불의 첫 제안자들인 중고생들을 통해 이미 광우병 쇠고기 의제와 병렬적으로 제기 되었다. ‘미친 소 미친 교육’이라는 구호는 촛불 초기에 등장한 구호다.
대운하 반대 구호 역시 초기부터 태동한 구호다. 이후 의료와 수돗물을 중심으로 한 이명박 정부의 민영화 음모가 온라인상에서 퍼지면서 이들 역시 빠르게 의제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또한 조중동에 대한 반대 의식과 행동 역시 초기부터 나타났으며 이는 곧 공영방송 사수라는 의제로 나아갔다. 이렇듯 촛불항쟁의 주역인 네티즌들의 자발적 의지에 의해 이미 의제는 확장되고 있었으며 대책회의는 이것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즉 촛불은 광우병 쇠고기 문제를 넘어서 이명박 정부의 정책 전반에 대한 반대로 의제를 확장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정책은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이며 개발주의 정책이다. 촛불항쟁은 이처럼 광우병 쇠고기 문제에서 시작되었으나 의제 확장을 통해 빠르게 반신자유주의 운동으로 의식 전환을 이뤄냈다.
당시 한미FTA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아 의제화 되지는 못했지만 촛불항쟁의 의식은 이미 한미FTA 반대 투쟁으로까지 번질 수 있는 충분한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촛불항쟁은 한국에서 최초로 발생한 반신자유주의 대중항쟁으로 기록될 것이다. 의료와 수돗물 민영화에 대한 반대를 통해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반대를 명확히 하기도 했으며 대운하 반대로 개발주의적 성장론을 거부했다. 경쟁 위주의 교육에 대한 반대 역시 분명히 했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시장근본주의에 대한 반대이며 사회 공공성과 연대성에 대한 가치 지향을 밝힘으로써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의지를 밝힌 것이다.
촛불항쟁으로 97년 이후 브레이크 없이 추진된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1차 저지선이 만들어졌다. 촛불항쟁이 반신자유주의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는 의미는 곧 본질로 들어가면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대를 넘어서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대해서도 분명한 대중적 평가가 내려진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제 대한민국 국민의 의식은 촛불항쟁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실천을 통해 이미 마련된 것이다.
계급주의와의 간극
촛불항쟁의 정치적 성격을 평가하면서 중간층 운동의 성격이 강하고 노동계급적 성격이 약하다는 주장도 있다. 촛불항쟁 참가자들이 시위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데 있어 유럽의 시위에서처럼 노동자라는 표현보다는 국민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점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가 결합되지 못했다는 점 등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유럽의 계급주의와 기계적으로 비교를 한 결과다. 한국사회의 역사성을 가장 크게 규정하는 특징은 예속성이다. 일제의 지배로부터 미국 강점에 의한 분단에 이르기까지 식민성과 예속성은 한국사회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산업화가 진행되고 경제 발전과 민주화의 진전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한국 사회는 아직 식민성과 예속성을 자력으로 청산한 바가 없다.
이런 역사적 특징으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는 노동계급의 고유한 문제역시 민족이나 국가단위의 식민성, 예속성을 철폐하는 문제에 투영돼왔다. 그리고 촛불항쟁 역시 이런 연장선 위에 존재한다. 촛불항쟁의 원동력은 국민주권이 실현되는 새로운 민주화에 대한 지향이었으며 미국의 일방적 요구에 굴복하는 정부에 반대해 국가주권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의지였다.
또한 한국의 노동자들은 노동계급이라는 정체성으로 진보를 표현하기보다 국가나 민족 단위로 자신의 급진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데 익숙하다. 이런 익숙함을 한국 노동자들의 한계로 바라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한국적 정황에 맞게 노동자들의 계급적 진출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특징 탓에 한국에서는 노동자들의 문제 역시 국가적 의제로 전환시키지 않으면 당사자의 문제로 협소해져 정치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예컨대 비정규직 문제가 그렇다. 비정규직 문제 역시 당사자의 문제로 국한된 상태이며 더 심각한 것은 비정규직 문제가 노노 갈등이라는 기반 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 정치적 문제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전체 노동계급의 고용 문제로 의제를 확장하고 더 나아가 전 국민의 고용 안정과 민주적 고용체계 수립을 목표로 하는 국민적 의제로 전환해야 한다.
촛불항쟁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와 결합한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목숨을 건 장기단식을 진행한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투쟁에 촛불 네티즌들이 지지와 성원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역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네티즌들의 적극적인 지지 행동으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여러 분야의 비정규직 투쟁이 있었음에도 기륭전자의 문제에 관심이 집중된 것은 목숨을 건 장기단식에도 대화 자체를 거부하는 기륭자본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었다.
이는 넓은 의미로 해석하자면 노동계급의 의제가 촛불항쟁과 결합되었다기보다는 기륭노동자들의 인권을 수호하자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노동계급의 문제도 촛불 의제로 전환될 때는 확장된 민주주의의 수호 문제로 전환되는 것이다.
촛불항쟁을 통해 확인된 것은 노동계급성과의 괴리가 아니다. 오히려 한국적 상황에서는 노동계급의 문제가 국민적 의제로 전환될 때만이 대규모 연대가 가능함을 확인한 것이다. 이는 오랫동안 고립적으로 진행된 한국 노동운동에 대해 촛불항쟁이 주는 메시지로 이해해야 한다.
새로운 민주주의의를 향하여
촛불항쟁은 한국 사회가 새로운 민주주의로 향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반독재 민주화로의 회귀가 아닌 반신자유주의 민주화다. 또한 저항주의적 사회운동을 넘어 국민주권의 실현이라는 지향을 전면화하면서 직접민주제의 확산이라는 요구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런 점에서 촛불항쟁은 체제 변혁적 성격을 띤다.
하지만 촛불항쟁은 체계적으로 준비된 정치세력에 의해 시작되고 주도되지 못한 탓에 이러한 성격이 전면적으로 발현되지는 못했다.
이제 다시 진행될 촛불항쟁은 단순한 반한나라당 운동이나 반이명박 운동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사회운동은 한 번의 실천을 겪으며 진화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소강국면은 진화를 위한 준비과정이다. 촛불항쟁에 담긴 메시지를 올바로 해석하고 전 국민적 의제를 주도적으로 제기하는 정치집단이 촛불항쟁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진정한 주역이 될 것이다.
커널뉴스 [보고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