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오딧세이]백두산 정계비는 누가 없앴나
백두산 정계비에서 조사활동을 하는 일본인들. 백두산 정계비는 1931년 7월 28일 없어졌다. 이 사실은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가 쓴 <백두산 정계비>라는 책의 서문에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간도는 조선땅이다>(지선당)라는 책으로 번역되어 쉽게 접할 수 있다.
이 정계비가 1931년 7월 28일부터 다음 날인 29일 아침 사이에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근년에 백두산에 오르는 사람은 안전을 위해서 일본 국경수비대의 하기행군 등산에 동행하는 것을 관례로 하고 있는데, 이 해에도 역시 혜산진 수비대 약 50명, 무산 및 삼장 수비대 약 50명과 함께 56명의 일반 등산자가 있었다.
일행이 1931년 7월 28일 오전 9시반경 정계비 소재지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을 때는 정계비가 엄연히 그곳에 존재해 있었다. 그러나 일반 등산자는 군대와 헤어져서 산정으로 올라가 천지 부근에서 노숙을 하고 이튿날 아침에 귀로에 올라 다시 정계비가 있는 곳까지 도달했을 때는 정계비는 이미 누군가에 의해서 철거되고 그 귀부 옆에 ‘백두산 등산도’라고 새겨진 표목밖에 볼 수 없었다.
이때 백두산을 올라갔던 일반 등산자 중 한 사람이 시노다 지사쿠에게 직접 이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로 기록됐다. 간도 문제를 연구했던 시노다 지사쿠에게는 백두산 정계비의 멸실은 충격이었다. 그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아, 어떤 몰지각한 자의 소행인가. 이런 중요한 사적을 인멸시켜 국경을 모호하게 하려고 꾀하다니.
시노다 지사쿠는 일본의 국경수비대를 의심했다. 일본은 1931년 9월 18일 만주를 차지하기 위해 만철 선로를 폭파하고 관동군을 투입했다. 1932년 3월 1일에는 만주국을 세웠다. 이런 일본의 만주 침략이 백두산 정계비의 멸실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만주국을 위해서는 한국과 중국의 영토 분쟁을 상징하는 백두산 정계비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린 듯하다.
1931년 일본국경수비대 의심
이렇게 백두산 정계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정계비의 내용은 탁본으로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정계비에 적혀 있던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는 동위토문(東爲土門) 문구는 중국에 가장 곤혹스러운 구절이다. 정계비가 있는 곳에서 흐르는 물줄기는 송화강으로 흘러드는 토문강이기 때문이다. 비석이 옮겨졌다거나 토문강이 두만강의 상류라는 중국의 주장은 현대 지리학에서는 잘못된 사실임이 그대로 드러난다.
정계비가 한·중 영토 분쟁에서 한국에 반드시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정계비가 들어서던 당시의 기록에서 조선 조정은 압록강-두만강 선을 지키기에만 급급했다. 백두산 정계비로 인해 한국은 압록강 너머 서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한 셈이 됐다. 하지만 두만강 너머 북간도는 청의 모호한 정계로 오히려 조선의 영유권 주장이 더욱 힘을 얻게 됐다. 어느 나라에 유리하든, 유리하지 않든 양국 국경의 역사적 징표를 인위적으로 없애버린 것은 옳지 않은 행위다. 백두산 정계비는 우리의 근대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치욕의 역사를 보여준다. 또한 강대국의 힘 앞에 약소국이 양보하며 땅을 내놓아야 했던 굴욕의 증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윤호우 기자> 2008 12/16 위클리경향 804호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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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가 만들어지고 북쪽에서는 고구려장군 대조영이 발해를세우게 됩니다
발해도 고구려 못지않은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엇죠. 후에 거란에게 멸망을 당하고맙니다
그리고 시간을 흘러서 여진족이 청을 건국한 뒤에는 이 지역을 그들 조상의 발상지라고 하여
다른 민족의 이주를 금지하였지만. 조선인들이 곳곳에 살고 있었다
조선 숙종 때 조선과 청은 국경선을 정하면서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고

간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시하였다. 그 후 많은 조선 사람들이 간도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이에 청은 우리 나라 사람들의 철수를 강요하며 간도가 청의 영토라고 주장하였으나 조선에서는 간도 관리사를 파견하여 조선에서 건너간 사람들을 보호하며 다스렸다
특히 19세기 말 이후에 일본의 침략이 심해지면서 간도로 이주하는 우리 나라 농민들의 수가 늘어났다
간도로 이주한 우리 민족은 간도의 각지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학교를 세우고 민족 교육을 실시하여 뒷날 독립 운동의 터전으로 삼았다. 을사조약 이후 일본은 안동(단둥)과 봉천(선양) 간의 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가 청의 영토라고 인정하는 간도 협약을 청과 체결하였다(1909). 이로서 간도 지역은 대한제국의 관할에서 떨어져나갔다
그리고 오는 2009년 9월 6일 이후로 중국이 간도를 취득한 시효 100년 만료가 된다 국제법상 영토영유권 제기는 100년이 시효만기이며 영토 영유권은 계속 주장하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땅을점유한 나라에 우선권이 돌아간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통념이다. 일본이 독도문제를 언급하는것도 이 이유이다 물론 영토의 취득 . 소멸 시효와 관련해 '100년설'
을 정설로 받아들이는 견해도 있지만 시효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도 하고 청일간도협약의 근거였던 을사조약 자체가 무효이므로 1909년 간도협약으로 간도에 대한 청난라(현 중국)의 간도영유가 공식화된 이후 100년이 지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질 것도 없다는 것이 학계의 입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찾지 못하더라도 다음 세대에서라도우리의 영토인 간도를 찾을수 있는 근거는 마련해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간도문제에 대한 공식적 문제제기를 반드시 해야할 필요가 있다.
-자료참조-
http://blog.naver.com/jinwoo375?Redirect=Log&logNo=110034290658
http://blog.daum.net/bellbud/13128980
그리고 간도 되찾기 서명!!
http://agora.media.daum.net/petition/view?id=58407 서명하세요 ㅋㅋ
다 퍼온건데 ..
사실상.. 간도를. ...눈앞에서 ..잃어버리는것입니다..
약소국..이란 서러움도 있는데 ..
통일만 됬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