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에선 5월이 되면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여인의 광고 사진이 약국 진열대에 붙기 시작한다. 팽팽하고 싱그러운 피부는 한결같이 빛나는 구릿빛이다. 자세히 보면 약 광고. 소화제나 두통약이 아닌 ‘선탠 약’이다. 한 달간 복용한 뒤 선탠을 하면 좀 더 근사한 구릿빛으로 피부를 잘 태워준단다. 신체의 멜라닌 색소를 조절하는 효과라고 한다. 복용 방법을 보니 첫 일주일 동안은 무슨 색깔의 약을, 그 다음 3주일간은 다른 색깔의 약을 복용하라고 한다.
경기도 용인의 캐러비안베이에서 선탠을 하고 있는사람들. /사진 조선일보DB
바닷가는 물론 실외 수영장에는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선탠만 하다 가는 여성이 많아진다. 수영복도 이땐 ‘수영하기 위한 기능성 옷’이 아니라 ‘선탠하기 좋은 옷’ 정도로 개념이 바뀐다. 유럽에서 여름 휴가 이후에 갖게 되는 구릿빛 피부는 피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 사람의 경제수준과 라이프 스타일을 설명해주는 그 ‘무엇’이 된다.
오래된 프랑스 영화를 보면, 수영복을 입은 부잣집 남자가 옥상 발코니에 누워서 알루미늄 판을 움직이는 장면이 나온다. 알루미늄판을 이용한 반사광으로 햇살에 얼굴을 태우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여름이 지난 뒤 유럽의 고급 레스토랑엔 한껏 그을린 구릿빛 피부를 뽐내는 부자들이 많아진다고 한다.
사실 햇볕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북유럽이나 일부 서유럽에선 그을린 피부가 오래전부터 미덕이었다. 초여름만 되면 야외로 나와 ‘해바라기’처럼 태양을 향해 몸을 던지는 이들이 많다. 겨울철에도 따뜻한 휴양지로 떠나는 여행객이 많은 덕에, 슈퍼마켓과 약국엔 늘 선탠 관련 제품이 진열돼 있다. 선탠할 때 머리카락에 뿌리면 모발 손상을 막을 수 있는 선탠용 헤어스프레이, 입술 같이 민감한 부분에 바르는 자외선 차단용 립스틱, 선탠한 뒤 피부를 진정시키는 젤과 로션, 마스크 팩 등….
의학적인 관점에서 ‘선탠(Suntan)’은 피부가 자외선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표피 기저층에 있는 멜라닌 색소를 자극해 멜라닌 색소를 추가적으로 생성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그러니 햇살에 노출해 피부를 태운다기보다는 일종의 ‘자외선에 의한 피부 보호’ 현상인 셈이다.
이 선탠은 더 이상 유럽만의 풍경이 아니다. 국내에서도 선탠은 하나의 문화 아이콘이 됐다. ‘가부키 화장’을 하듯 최대한 하얗고 고운 피부만을 원하기보다는, 적당히 그을린 피부가 건강과 부의 이미지를 준다고 믿는 사람이 늘어났다. 선탠이 하나의 풍속도로 자리잡으면서 선탠의 과학과 건강 부분도 강조됐다. ‘무조건 태우고 보자’가 아니라 ‘제대로 잘 태우는 법’을 알아야 하는 세상이다.
구릿빛 피부는 원하지만 자외선 노출이 걱정되는 사람을 위한 제품도 개발됐다. 선탠할 때 자외선을 차단하느라 ‘햇볕과 전쟁’을 벌여야 할 필요도 없어졌다. 그야말로 ‘선(Sun)’ 없는 ‘선탠(Suntan)’이 가능해진 것이다. 바르기만 해도 피부빛이 그을려지는 화장품은 몇 년 전부터 개발돼 출시되고 있다. 요즘은 얼굴이나 팔다리에 슬쩍 ‘화장하듯’ 바르기만 해도 선탠한 효과를 내는 브론징 제품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특급호텔도 수영장에서 여유롭게 선탠을 할 수 있다며 ‘선탠용 공간’을 홍보하고 있다. 선탠을 잘못 해서 얼룩이 생기게 하느니 아예 ‘인공 태닝’으로 피부 빛깔을 제대로 만들겠다는 이들도 늘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