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s more to life than little money, you know. Dontcha know that? And here ya are, and it's a beautiful day. Well, I just don't understand."
<파고> 는 세 남자의 아이러니 한 대화로 시작된다. 평범한 카 세일즈 맨 제리 런더가드 (윌리엄 H 메이시) 는 두 건달에게 자기 아내를 납치해달라는 황당한 요구를 한다. 제리는 부유한 장인을 두었고 아내가 납치된 뒤 장인의 돈으로 협상금을 지불하고 그 돈을 건달들과 나누고자 한다. 의뢰를 받은 두 건달들은 제리에게 오히려 "왜 장인에게 돈을 그냥 달라고 하지 않느냐?" "차라리 아내에게 달라고 하지 않느냐?" 라고 회유한다. 제리는 자기 사정을 말하고 한참을 생각하던 건달 칼 쇼월터 (스티브 부세미) 는 fuck it 이라고 말하며 이 은밀한 범죄는 시작된다.
칼 쇼월터와 가이어 그림스러드 (피터 스토메어) 는 계약대로 제리의 아내를 납치하나 도주 과정에서 경찰관과 주민 2명을 죽인다. 이 살인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서 임신한 경찰관 마지 건더슨 (프랜시스 맥도먼드) 가 투입된다. 반면 제리의 예상과 달리 장인은 협상금 지불을 주저하고 장인이 직접 건달들과 접선에 나서면서 사건은 더욱 꼬인다. 결국 단순히 돈이 필요해서 시작된 범죄는 인간의 욕망에 의해 잔인하게 변화하고 수 많은 사람들의 피로 얼룩진다. 사건을 해결하고 범인을 경찰 차 뒤에 두고 마지는 위의 대사를 슬프게 말한다.
90년대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파고> 의 소재는 사실 그리 신선하지 않다. 작은 범죄가 꼬이고 꼬이는 구조는 이미 여러 영화에서 선보인 적이 있으며 또 다른 코엔 형제 영화인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또한 비슷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또 인간의 욕망이 추악하다는 주제 또한 상당히 식상한 주제이다. 그런데 왜 이리 <파고> 가 새로워 보이는 걸까? 왜 <파고> 는 그 어떤 스릴러, 누아르와도 다른 느낌, 분위기, 이야기를 보여주는 걸까? <파고> 는 장르가 없는 영화다. 스릴러의 외형을 가지고 있지만 스릴러 특유의 긴박한 수사 과정은 등장하지 않는다. 전혀 스릴러답지 않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주인공이 임신한 중년 여 경찰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전혀 스릴러답지 않은 코믹한 대사들이 오고 간다. <파고> 가 새로운 이유는 영화 역사상 <파고> 같은 영화는 <파고> 밖에 없기 때문이다. <파고> 가 큰 울림이 남는 이유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 영화는 많지만 <파고>처럼 스산하게 인간의 추악함을 까발린 영화는 없기 때문이다.
<파고>를 이해하는 데는 세가지 키워드가 있다. 그 첫 번째 키워드는 "파고"다. 파고는 미네소타의 한 지역 이름으로 영화의 배경이 된다. <파고> 에서 눈에 뒤 덮인 미네소타의 설원은 한 없이 스산하게 묘사된다. 영화의 첫 씬에서 멀리 눈이 내리는 도로에서 제리의 차가 등장할 때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도 왠지 모를 불안함이 느껴진다. 영화 내내 미네소타의 설원은 무언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것 같은 불안함을 자아낸다. 또 영화 속에서 새하얀 설원은 그 위에서 펼쳐지는 인간 욕망의 추잡함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파고의 설원은 인간의 욕망을 기분 나쁘게 비웃는 존재다. <파고>가 이런 스산한 배경을 보여줄 수 있었던 데에는 촬영 감독 로저 디킨스의 공이 크다. 디킨스는 항상 한 없이 아름다운 배경 속에 도사린 불안함을 포착하는 재능을 지닌 촬영 감독이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도 아름다운 텍사스 풍광과 그 위에 벌어지는 피 빛 향연을 대조시킨 바 있다.
<파고>를 읽는 두 번째 키워드는 유머다. 코엔 형제는 코미디와 스릴러를 오가면서 자신들이 만든 모든 영화에 코엔 형제만의 유머를 첨가하는 감독들이다. 코엔 형제의 유머 코드는 때론 너무 자의식이 강해서 관객들이 이해하기 힘들어 하는 경우도 있으며 코엔 형제의 코미디 작품들은 스릴러 작품들만큼의 평을 받지 못한다. (<허드서커 대리인> <참을 수 없는 사랑>같은 범작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파고>에서 코엔 형제의 기괴하고 아이러니 한 유머는 너무나도 효과적으로 인간 욕망의 추악함을 강조한다. 영화 중반에 등장하는 한 장면을 보자. 자신의 아내가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제리는 장인이게 전화를 하기 전에 혼자서 슬퍼하는 연기를 하며 장인에게 할 말들을 연습한다. 마침내 수화기를 든 제리가 오열하는 연기를 하려는 순간 리셉셔니스트가 전화를 받고 제리는 묵묵하게 “장인어른 좀 부탁합니다” 라고 말한다. 아내의 납치를 슬퍼하는 연기를 연습하는 제리의 모습에서 추악함을 느끼던 관객들은 마지막 대사에 허탈한 웃음을 짓게 된다. 이 장면에서 마지막 유머는 제리의 초라함과 비루함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또 납치범들이 몸값으로 10억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듣고 “5억으로 깎으면 안될까?” 라고 말하는 장인의 모습은 관객들의 웃음을 유발하는 동시의 인간의 욕망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파고>를 읽는 세 번째 키워드는 “보통 사람”들이다. 영화 속 등장 인물들은 킬러부터 경찰까지 우리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이다. 주인공 마지 건더슨은 경찰로서 상당한 추리력을 보여주지만 영화는 마지의 수사보다 마지의 일상적인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남편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오랫동안 안 만난 동창을 만나는 마지의 모습에 영화는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다. 또 마지가 임신한 형사라는 사실은 영화의 주인공들이 보통 사람들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살인 현장을 수사하다 입덧을 하는 마지의 모습에서 느낄 수 있는 친숙함은 여느 스릴러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마지 뿐만 아니라 영화 속 음모의 시발점이 되는 제리와 제리의 가족들, 장인 어른, 마지의 동료 경찰들은 모두 시골 동네 이웃들 같은 느낌이다. 이런 캐릭터들의 친숙함을 강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요소가 바로 미네소타 억양이다. <파고>에서 외지에서 온 건달 둘을 제외한 모든 캐릭터들은 독특한 미네소타 억양을 구사한다. 생소하고 다소 우스꽝스러운 이 액센트는 <파고> 속 캐릭터들의 친숙하고 어수룩한 면모를 강조한다.
위에서 말한 세가지 요소들은 인간의 욕망과 강한 대비를 이루며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추악한지를 잔인하게 보여준다. 깨끗한 설원은 인간의 얼룩진 욕망과 대조되고 코엔 형제의 뜬금 없는 유머는 영화 속 비극의 잔인함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또 영화 속 캐릭터들과 배경의 친숙함은 그 친숙함 속에서 일어나는 잔인한 욕망의 향연과 대비되며 선한 얼굴아래 꿈틀 되는 인간의 잔인한 욕망과 대비된다. 코엔 형제는 이 세 요소를 잘 엮어서 영화 후반부 두 장면에서 정점을 찍는다. 얼굴에 총을 맞고 피 흘리는 쇼월터가 파트너로부터 돈을 떼먹기 위해 설원에서 짐승처럼 절박하게 눈을 파고 돈가방을 파묻는 장면은 욕망의 추악함이라는 <파고>의 주제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또 이후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한 쇼월터의 허무한 최후를 보여주며 욕망의 허망함을 강조하고 있다.
<파고>는 인간의 밑바닥을 날 것으로 보여주는 영화고 이가 가능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배우들의 연기다. 그 해 각 종 영화제에서 여우 주연상을 독식한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연기는 특히나 아이코닉한 연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상적이다. 잔인한 인간의 폭력과 욕망에 맞서며 끝까지 희망을 보여준 마지 건더슨 캐릭터를 맥도먼드는 때론 코믹하게 때론 강하게 묘사한다. 마지에게선 후덕한 아줌마의 모습과 강렬한 여형사의 풍모를 동시에 느낄 수 있고 이는 맥도먼드의 연기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지막 경찰차에서 범인과의 대화 중 맥도먼드는 눈빛으로 영화 전체의 주제를 압축해서 전달한다. 또 윌리엄 M 메이시, 피터 스토메어, 스티브 부세미도 커리어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
인간의 욕망은 추악하다. 그 추악함을 <파고>만큼이나 잘 묘사한 영화는 없다. <파고>는 우리에게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걸까? 많은 사람들은 코엔 형제의 영화에는 해피 엔딩이 없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코엔 형제의 영화에는 “희망”이 없다고 한다. <파고>에 해피 엔딩은 없다. 하지만 난 <파고>에서 코엔 형제가 마지와 남편 놈의 관계를 통해 희망의 가능성을 이야기했다고 믿는다. <파고>는 어둡고 폭력적이며 냉소적인 영화지만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