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필드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나라 캄보디아.
1천명중 138명꼴로 높은 영아사망률, 매년 1천여명 지뢰 피해 킬링필드 주범 처리와 기아 문제도 심각하다
세계적인 문화유산 앙코르와트로 널리 알려진 캄보디아. 국민의 90퍼센트 이상이 불교를 신봉하는 불자의 나라다. 그러나 지난 30여 년 동안 치러진 내전과 잔혹한 학살의 역사는 동남아시아의 작고 가난한 이 나라에 ‘킬링필드’라는 어두운 꼬리표를 따라붙게 만들었다.
킬링필드란 ‘죽음의 들판’이란 뜻으로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정권 당시 악명 높은 대학살로 생긴 집단 무덤을 일컫는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야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주범 크메르루주에 대한 법정 처리문제가 해결될 조짐이 일고 있다.
지금까지 재판부 구성 문제를 놓고 지난 6년 동안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 간의 의견 충돌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으나, 양측 간의 합의를 보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동안 크메르루주 정권이 몰락한 지 24년이 지났지만 킬링필드의 주범들은 편안한 생활을 영위해 왔다.
조만간 대량학살의 주범에게 내려지게 될 단죄는 당시 무고하게 학살당한 고인들의 넋을 위로해 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고통 속에 살아왔던 캄보디아인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달래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과 인접해 있다는 이유로 베트남 전쟁에 휘말리게 되면서 시작된 캄보디아의 현대사는 피로 얼룩진 참담한 기록들로 점철된다.
오랜 내전이 남겨 놓은 상처로 지금도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는 캄보디아인들의 생활상은 당시 참혹했던 역사의 현장으로 우리를 다시 인도한다.
외풍의 영향과 오랜 내전으로 상처투성이의 나라 캄보디아에는 지금까지도 연간 1천여 명씩 양산되고 있는 지뢰 피해자, 굶주림에 허덕이는 기아 문제, 킬링필드 주범 처리 문제 등 풀어야 할 숙제가 산적해 있다. 그렇다면 지난 30여 년 동안 캄보디아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1953년, 80년 동안의 프랑스 식민지 생활에서 갓 해방된 캄보디아는 독립의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인접한 베트남에서 발생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이를 기점으로 미국, 베트남, 크메르루주 간의 꼬리를 무는 전쟁이 무려 30여 년이나 지속되면서 캄보디아의 현대사는 피로 물들었다.
1961년 북베트남 군에 의한 남베트남의 공산화가 동남아시아의 공산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로 베트남 전쟁을 시작한 미국은 캄보디아 동부 베트남 접경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베트콩 세력을 축출하겠다며 캄보디아에도 대대적인 공습을 단행했다. 현대사에 잘 드러나지 않았던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이 바로 그것이다. 이 공격은 베트남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무고한 농민들이 목숨을 잃고 생활터전을 박탈당했다.
그런데다 1970년 미국의 도움으로 쿠데타에 성공한 친미 성향의 론 놀 장군은 시아누크 국왕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한 뒤 부정 부패를 일삼았으며, 반공산주의 정책을 펼쳐 좌익의 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무참히 처단했다.
이에 반감을 가지게 된 캄보디아인들은 급진적인 반정부 좌익무장단체인 크메르루주에 적극 가담해 치열한 내전을 벌였다.
정부군과 크메르루주 군 간의 치열한 접전 끝에 결국 1975년 4월 크메르루주 군이 수도 프놈펜을 함락시킴에 따라 이때부터 공포의 폴 포트 정권이 시작된다.
결국 미국의 명분없는 캄보디아 침공과 친미 정권 수립이 크메르루주의 집권을 도운 셈.
처음 캄보디아인 들은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루주 군을 반기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국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폴 포트는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하여 악명을 떨쳤다.
1979년 베트남 군이 캄보디아를 점령하고 나서야 폴 포트의 공포정치는 종지부를 찍었지만..
또 다시 친베트남 정부군과 잔존해 있던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 군 간의 지루한 내전이 12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이 무렵 미국은 과거와는 달리 크메르루주 군을 암암리에 지원하고, 국제사회는 캄보디아의 상황을 묵인하며 방관자적 입장을 보였다. (참으로 우습다. 자신들이 지원했던 친미 론놀 정권을 무너뜨리고 나타나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던 극좌 정치세력 크메르루주를 지원하는 미국의 이중적 행위는..)
그러다 1991년 유엔 평화유지군의 캄보디아 주둔으로 내전이 끝나는 듯했으나, 크메르루주 군의 무장해제에 실패해 정국은 또다시 불안해진다. 결국 1998년 폴 포트의 사망 이후 크메르루주 군은 완전 소탕되고 캄보디아에는 평화가 찾아온다.
크메르루주의 잔혹한 킬링필드. 캄보디아의 역사 가운데 세계 최대 학살인 ‘킬링필드’라 일컬어지는 시기는 폴 포트가 이끈 크메르루주 집권 시기다.
1978년 12월 말, 약 16만 명의 베트남 군이 캄보디아를 침공한 뒤 10여 일 만에 프놈펜을 점령하자,
크메르루주 군은 미처 증거 인멸을 하지 못한 채 도주했다.
이로 인해 4년 6개월 동안 폴 포트 정권이 벌인 참혹한 학살의 현장이 드러나면서 세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폴 포트는 110만~200만 명에 달하는 동족을 무참히 처형했던 것이다. (당시 캄보디아 인 4명 중 1명 꼴)
중국의 지원을 받은 폴 포트는 1976년 ‘민주 캄푸치아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단시간 내에 캄 보디아를 공산화시키려는 무모한 시도를 벌여 지식인들은 별다른 이유 없이 처형되었고 공산화 정책을 펴기 위해 도시민들을 대거 농촌 등지로 몰아내는 과정에서 수많은 노약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
40도가 넘는 무더위 속에서 600킬로미터를 걸어서 강제 이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폭염을 견디지 못해 탈진해 숨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목숨을 잃은 이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 뿐만 아니라 투올슬렝에서 크메르루주 군이 고문 등으로 저지른 만행은 매우 가혹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 투올슬렝은 고등학교 건물이었으나 크메르루주가 프놈펜을 장악하면서 크메르루주의 가장 악명높은 S-21 보안대의 본부 건물로 사용되었다.
제2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라 불린 투올슬렝은 당시의 참담한 역사의 현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양민 학살의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투올슬렝 박물관은 오늘날 관광객들이 빠지지 않고 들르는 명소가 되었다.
아물지 않은 캄보디아의 상처
크메르루주 군이 소탕되고 캄보디아가 안정을 찾은 지 5년이 지났지만 전쟁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고 있다.
가장을 잃은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아내들이 나서서 힘겹게 생활을 유지하는데, 지뢰 피해로 남편을 잃은 아내들이 오히려 지뢰 제거 하는 일을 맡아 생계비를 충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각 지역으로 흩어진 난민들의 귀환 문제도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뿐더러 기아 문제도 여전히 심각하다. 유니세프에 따르면 캄보디아는 1천 명 중 138명꼴로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영아사망률을 기록하고 있으며, 산모 사망률도 10년 전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무엇보다 크메르루주가 빚어낸 킬링필드 시대는 지금까지도 캄보디아의 발전을 더디게 하는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한 세대를 완전히 끊어 버리다시피한 4년간에 걸친 대학살로 다음 세대들이 딛고 일어설 기반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특히 의사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대부분 살해되었고, 수많은 교육자들 또한 목숨을 잃거나 해외로 추방됨에 따라 교육 기반이 무너지고 의료 체계의 붕괴를 가져오는 등 지적 손실도 막대하다.
또한 공산화의 영향으로 부모와 자식 간의 신뢰가 상실되는 등 다방면에서 문제점이 속속 노출되고 있다.
론 놀 정권에 의해서 가족을 잃은 소년들은 복수심으로 크메르루주 군에 지원하여 무차별적인 학살뿐 아니라 잔혹한 고문도 서슴지 않았다.
캄보디아 정부에게는 정체성이 채 성립되기도 전에 전쟁에 휘말려 살인 무기로 전락해 버린 소년병들의 인간성 회복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숙제다.
한편, 폴 포트 정권 이전인 1969~1973년 당시 미국은 론 놀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캄보디아에 53만여 톤의 폭탄을 무차별적으로 투하해 민간인 60만~80만 명을 학살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크메르루주의 킬링필드보다 미국이 먼저 저지른 대량 양민학살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며 미국에도 죄를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미국이 관여함으로써 발생된 모든 문제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실정이라 진정한 과거 청산은 아직도 머나먼 이야기가 되고 있다. (미국은 언제나 그랬다. 한반도에서도 동족 상잔의 비극을 야기한 것이 바로 미국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
매년 1천여 명 지뢰 피해
이 외에도 지뢰 처리 문제는 캄보디아가 해결해야 할 가장 커다란 난관 중 하나다.
캄보디아 국토 가운데 민간인 거주지역의 40퍼센트 이상에 지뢰가 매설되어 있다.
내전 당시 곳곳에 뿌려진 엄청난 양의 지뢰는 세월이 지나면서 울창한 수풀에 묻혀 이제는 민간인의 목숨을 앗아가는 살상무기로 둔갑했다.
무장단체들이 마구잡이로 매설해 놓은 탓에 지뢰가 묻혀 있는 ‘지뢰 지도’의 부재로 인접 지역 주민들이 피해를 입은 뒤에야 비로소 지뢰 위험 지역이라는 푯말이 세워지는 실정이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 속에 해마다 1천여 명의 지뢰 피해자가 양산되고 있다.
1998년까지 대략 3만여 명의 지뢰 피해자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지뢰 피해자들은 겨우 목숨을 건진다 하더라도 다리가 절단된 불구의 몸이라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고장난 기기를 수리하는 일이 전부다.
따라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이들은 대개 길가에 나앉아 구걸하면서 어려운 삶을 연명하고 있다.
1992년부터 지뢰 제거팀이 운영되고 있지만 수도 프놈펜, 바탐방, 앙코르와트 지역을 제외한 캄보디아 전역에 걸쳐 뿌려진 약 1천만 개의 지뢰를 완벽히 제거하는 데에는 자그마치 200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관광산업 육성 등으로 조금씩 활력을 되찾아 가는 캄보디아 전쟁 후유증으로 외국 원조 없이는 기본적인 생활마저 하기 힘들었던 캄보디아는 최근 들어 매년 조금씩 경제 성장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구 1341만 명 가운데 하루 1달러 미만의 소득을 올리는 빈곤층이 무려 36퍼센트에 달하는 빈국 중의 빈국이다.
하지만 캄보디아인들에게도 한 가닥 희망은 남아 있다.
앙코르와트 사원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어 그나마 관광객들을 상대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1997년 7월 쿠데타 이후의 정치 불안으로 한때 관광객 수가 급격히 감소하여 관광산업이 침체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차츰 회복 단계로 돌아섰다.
최근 캄보디아 관광부는 크메르루주 공산 반군들이 최후까지 저항했던 앙글로 벵 지역을 테마공원으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수립하면서 관광산업의 육성으로 경기 회복의 기틀을 마련하려 하고 있다.
특히 킬링필드의 학살자로 악명 높은 폴 포트의 은신처인 지하 벙커, 옥외수영장 및 그가 구금되었던 감옥 등을 재보수해 관광객들을 유치할 예정이다.
또한 캄보디아는 지난 9월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에 성공함으로써 경제개발 발전 방안을 모색하고 있으며, 특히 사회간접자본 및 정보화 사업 등 제반분야에서 우리나라와 협력을 돈독히 할 방침이다.
죽음의 땅이었던 캄보디아에도 어느덧 햇살이 비치고 있다.
분주하게 일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수도 프놈펜에서는 지난날의 아픔을 딛고 다시 일어서려는 캄보디아인들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힌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