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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화점- 성에너지와 정치에너지로 빚어낸 한편의 그리스 비극

배재희 |2009.01.28 22:38
조회 210 |추천 0

 

결론부터 털어놓자면 '쌍화점'은 동성애 영화가 아니다. 최소한 2시간의 런닝타임 속에 이끌어내는 이야기뭉치 가운데는 동성애에 대한 따듯한 시선은 '없다'. (이 영화의 문법에 따르자면, 권력을 획득한 동성애 역시 충분히 사악하고 폭력적이다.) 영화는 차라리 권력욕(혹은 군주에 대한 지고지순한 충성심)을 위해 스스로 거세된 주인공의 남성성이 우연히 발견되는, 그럼으로서 발생한 필연적인 '비극 서사'에 가깝다. 이런 면에서 영화 쌍화점은 '근대적 서사'라기보다는 '그리스 비극'의 모티브에 가깝다.

 

즉 태생적으로 '거세된' 봉건 군주는 권력을 매개고리로 삼아 호위대장 '주인공'을 거세시킨다. 즉 이 고려말의 오이디푸스왕이 미소년을 착취하는 행위는, '정치적 남근'이 '생물학적 남근'을 잘라내는 방식이다. 이 과정을 호위대장은, 정치적 신념에서인지 아니면 현존하는 권력자에 대한 복종심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적극 순응한다. 한편  또다른 주인공인 몽골 출신 왕비 역시, 남편으로 인해 여성성과 욕망을 '거세'당했다. 몽골과 외교적 타협의 상징물인 왕비는 정치적 필요에 따라 스스로의 성적 욕망을 거세해왔다. 이 과정 또한 자발적이다. 즉 영화 쌍화점 속의 '성'은 '정치'의 매개물이며 수단이다. 영화 속 주인공 3자는 현존 권력의 위압스러운 힘과 요청에 따라 거세된 자아를 적절히 외면하고 하루하루 살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현존 권력구조에 금을 내는 계기 역시, 또다른 금기라는 점이다. '거세된 3자' 모두의 정치적 안녕을 보장했던 '동성애'라는 금기는, '혼외의 사랑'라는 또 하나의 금기로 와해된다. 물론 이 '혼외의 사랑' 역시 왕자를 낳아야 한다는 군주의 정치적 강요로 발생했다. 언제나 그렇듯 금기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권력과 정치의 체스판 위에서 찢기고 접붙이기를 반복한다. 

 

호위대장과 왕비는 권력의 필요에 의해 정사를 강요받지만, 이 강요받은 혼외의 사랑으로 인해 주인공들은 그간 숨겨져 왔던 정체성을 처음으로 발견한다. 그것은 물론 권력 앞에 두려운 일이지만, 처음 자아를 되찾은 주인공들로서는 결코 버릴 수 없는 ego이고, 본질이며, origin이다. '동성을 탐닉하는 왕'에 대적하는 '이성애'는 '마이너리티'이며 '변방'의 세력이다. 이를 참을 수 없었던 군주의 '동성애 권력'은, 결국 처음으로 남성성을 깨달은 호위대장을 실제로 거세시켜버리는 참극을 빚는다. 이는 한편으로 속국 고려를 탐닉하는 몽골의 '제국적 남근'을 잘라내는 외교술과 기묘하게 오마쥬된다. 다른 듯, 같은 듯, 정치와 성은 닮았다.

 

결국 영화의 귀결은 관객들이 충분히 예상한 대로 '파국'으로 치닫는다. 왕의 호위대장은 칼을 되돌려 지난날 충심으로 섬기던 왕을 노리고, 다른 한 편에서 왕비는 왕을 증오하며, 몽골의 우산에 순응하는 착실한 새 군주를 옹립하려 한다. 미시적 性에너지와 거대담론 속 정치에너지의 기묘한 화학반응이다. 영화를 본 대부분이 그러했겠지만, 엔딩타이틀이 오르고, 허전함이랄까 싶은 알듯 모를 듯한 마음이 들어 자리를 뜨지 못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불편함'이었던 것 같다. 인간의 바닥깊은 밑둥을 정면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그 '불편함'은 엷은 '슬픔'인 것도 같다./

 

cf)

'고려와 몽골', '정치적 1인자 군주와 2인자 호위대장'같은 폴리틱한 구도를 빼고 본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주인공 조인성의 개인사로 국한해 '한 소년의 성장영화'로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다. 무섭고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이 위압적인 '성적 착취자'를 극복하는 힘. 그것은 결국 소년이 스스로의 남성성을 회복하면서부터다. 소년의 시기에 '고착'된 조인성이 어른으로 자라나는 힘은 자신을 되찾는 것, 혹은 자신을 위압하는 힘센 사람을 노려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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