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
그녀와 제가 처음 만난 건 아주 추운 겨울 저녁 홍대 지하철역 앞 은행 건물 안에서 였습니다.
10년 동안 여자 소개라고는 단 한번도 해준 적이 없던 친구 놈을 구박해 억지로 만들어낸 소개팅 자리였죠.
먼저 그녀와 제가 만나기 2시간 전의 얘기부터 해야겠네요.
집이 일산인 제가 홍대까지 나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1시간 20분 정도.. 전 오랜만의 소개팅 자리에 몹시 흥분 상태였고 한창 멋부리기에 열을 올렸습니다.
전날 저희 집에서 같이 놀다가 오후 늦게 집으로 가는 또 다른 친구놈과 함께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왠 모르는 전화번호가 핸드폰에 뜨더군요.
'누구지?'
정말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의 왠 여자가 저한테 인사를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 오늘.. 만나기로한.."
"네?.. 누구.. 아! 아~ 오늘 만나기로한.. 네 저 맞아요."
"혹시.. 저.. 오늘.. 정말 나오실 건가요?"
아니 이건 무슨 뜬금없는 말이란 말입니까. 오후내내 없는 옷 다 뒤져가며 차려입고 머리 드라이에 있는 멋 없는 멋 다 내고 이제 막 출발 하려는 사람에게 오늘 정말 나올거냐니..
"네? 네.. 네.. 전 지금 집에서 나왔는데요.. 왜.."
"아니요.. 그럼 이따 6시까지 나가겠습니다.."
"아니.. 저..저.."
다소 황당했습니다.
'아니 뭐 이런 여자가 다있어'
라는 생각도 들었구요. 버스타고 가는 내내 기분이 영 찝찝하더군요.
"야 이거 아무래도 안되겠어 나 너무 무시 당하는거 아니냐?"
"참아 임마 남자가 속 좁아 보이게.. 이쁘데잔냐.. 얼굴이나 한번봐~"
당장은 약간 화가 나긴 했지만 저도 내심 얼굴이 배우 박시연하고 닮았다는 주선자 친구놈의 말에 기대를 하고있던 터라 한번 참기로 했습니다.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예의가 아니지 가만이 있으면 안되겠어.."
전 그녀에게 문자 메시지를 쓰기 시작 했습니다.
[너무 부담되고 불편하시다면 굳이 억지로 나오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냥 가볍게 저녁이나 한끼 한다고 생각하시는건 어떨까요?]
옆에서 보고있던 친구 놈이 한 소리 합니다.
"그게 뭐냐.. 이 멍충아.. 그래도 그 여자 얼굴이 한번 보고 싶기는 한가보다? ㅋㅋ"
사실 그랬습니다. 정말 한번 보고 싶었습니다. 봐서 박시연 닮았으면 좋은거고 아니면 친구놈 구박할 구실 하나 생기는 거니까요.
그때 답장이 왔습니다.
[6시까지 나갈께요]
"뭐가 이렇게 무성의해.. 난 나름 신경써서 문자 보냈더니만.. 별로야 별로.."
"나이 너보다 4살이나 많다며.. 나이 31살에 어디 문자 요즘 애들처럼 쓰겠냐.."
친구 놈과 소개팅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다 친구 놈은 중간에 내려 집으로 갔고 드디어 전 홍대 지하철역 4번 출구 앞에 도착했습니다.
"아.. 추워.. 오늘 날씨 왜 이래.."
길이 다 얼어붙어 미끄러울 정도로 그 날의 날씨는 정말 추웠고 전 안되겠다 싶어 좀 더 따듯한 은행 건물 안으로 들어가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6시.. 검은색 롱코트를 입은 여자가 은행문을 밀고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 전 그대로 정신줄을 놓을뻔 했습니다. 아니 정신줄을 놓쳤습니다. 제 앞에 박시연과 정말 똑같이 생긴 여자가 서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 이 여자인가 보다.. 근데 진짜 이쁘다..'
전 정말 평소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믿었지만 첫눈에 이 사람과 사랑하게 될 거 같다는 느낌이 존재할 지는 정말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보는 순간 전 느꼈습니다.
'이 여자.. 사랑하게 될 거 같다..'
그 여자가 어디론가 전화를 겁니다. 그리고 역시.. 제 핸드폰이 울립니다. 우리는 서로 멋쩍은 미소를 주고 받으며 인사를 했습니다.
"반갑습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죠? 오늘 날씨 정말 춥네요."
마음은 도저히 진정이 안됐지만 최대한 여유있는 모습을 보이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네..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뭐가 그리도 수줍은지 제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그녀.. 전 그 모습에 더 마음이 끌렸습니다.
"아닙니다. 오래 기다리기는요. 시간 정확히 맞춰서 오셨는데요. 가시죠. 제가 식당 예약해 뒀어요. 여기서 멀지 않아요"
그렇게 어색한 첫 인사를 뒤로하고 저희는 건물 밖으로 나왔습니다.
근데 참 이 놈의 길이 문제였습니다. 온통 얼음 천지라 둘 다 구두를 신은 저희들에게는 너무 미끄러워 자칫 넘어질 우려가 있었던거죠.
저는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넘어지면 개망신이다.. 최대한 남자답게 보이려면 부축해주는 척 해야지..'
"조심하세요. 길이 많이 미끄러워요. 제가 손 잡아드릴께요."
"아..니요.. 괜찮아요.."
저의 호의를 거절한 그녀.. 마치 북극에 사는 펭귄이 걷듯 아장아장 최대한 조심해서 걷더군요. 전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하마터면 웃을뻔 했습니다.
"그나저나 오늘 왜 안나오려 하셨어요?"
넉넉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추워서요.."
안나오려는 이유가 추워서 였답니다. 추워서.. 전 참 변명치고는 너무 솔직해서 이건 정말 변명이 아니라 진짜 추워서 일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들게 걸어 도착한 식당.. 이미 몇달 전 달랑 한번 와본 스페인 식당이였지만 전 꽤나 있어보이는 척하려 그녀에게 자신감있게 물었습니다.
"혹시 평소에 좋아하시는 메뉴 있으세요? 여기 음식 정말 맛있어서 제가 자주 오는 곳이에요. 와인 한잔 괜찮으시죠?"
"네.."
전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역시 아무리 4살 어려도 리드는 남자가 해야지.. 후후'
주문을 하려던 찰나.. 갑자기 그녀가 저에게 귓속말을 합니다.
"저희.. 소.. 안되요?..."
너무 작은 그녀의 목소리에 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네?.. 뭐.. 어떤거.."
그리고 다시 그녀가 제게 귓속말을 했습니다.
"저희.. 그냥.. 나가서.. 소주.. 마시면 안되요?.."
전 순간 누군가에게 뒷통수 한대를 제대로 얻어 맞은 기분이였습니다.
너무나도 놀랍고 황당한 그 말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전 곧 당황스러움을 감추고 얘기했습니다.
"아.. 그럼요. 그럼요. 나.. 나가시죠. 어휴~ 저.. 소주 무지 좋아합니다. 사장님 저희 그냥 갈께요. 죄송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약까지 했으면서 메뉴판만 읽어보고 나가는건 무슨 경우냐는 듯한 사장님의 표정을 뒤로 하고 도망치듯 식당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앞장서서 스페인 식당 바로 옆에 붙어있는 실내 포장마차의 문을 열고 들어가더군요.
사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나름 기선제압도 하고 어려보이지 않으려 했던 저의 노력은 산산조각 나버렸고 실내 포장마차의 문을 열어 제끼는 그녀의 당당한 뒷 모습에서 전 제가 기선제압 당했음을 느꼈습니다.
"안 들어 오세요?"
조금전까지의 개미 목소리 만하던 그녀의 목소리는 온데간데 없고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승자의 자신감마져 느껴졌습니다.
"네..네. 드..들어갑니다.. 들어가야죠.."
가게 안은 단 한명의 손님도 없이 저희 둘만 마주보고 앉은 황량한 분위기 그 자체 였습니다.
저는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여유있어 보이는 멘트들을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아~ 진작 이런데로 올 걸 제가 괜히 좀 불편한데로 모셨었네요. 아 뭐 전 이런 분위기 굉장히 좋습니다. 편해서 좋네요. 아직 식사를 않하셨으니까.. 뭐가 좋을라나.."
"여기.. 오돌뼈하고 참 이슬 후레쉬 주세요.."
'이..런.. 나 아직 메뉴판 보고 있는데...'
그녀는 마치 이런데 안주야 다 비슷비슷하지 메뉴판을 뭘 그렇게 열심히 보냐는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오돌뼈와 소주를 시키더군요.
"야~ 또 뭐 좀 아시네요. 역시 안주는 오돌뼈죠~ 아이고 여기봐 밥도 같이 나오네.. 딱이네요. 딱! 하하하 "
겉으론 그녀의 안주 선택의 탁월함을 칭찬하며 호탕하게 웃고 있었지만 속으론 그 순간의 제가 정말 주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술이 2잔 정도 돌았을 때 그녀가 저에게 묻더군요.
"혹시.. 담배.. 피우세요?.."
전 속으로 '혹시 이 여자가 담배 피우는 남자 별로 않좋아하나?' 라는 생각이 들어 대답에 약간의 뜸을 들여야만 했습니다.
"어.. 그게 저 그러니까.."
"전.. 담배 피우니까.. 피우시면 그냥 편하게 피우세요. 저도 그럴께요.."
생긴 것과 다르게 마냥 순진한 여자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담배 피우는 모습마저도 제 눈에는 너무 이뻐보였습니다. 이미 제 눈에는 뭔가가 씌였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담배를 피우던 그녀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그냥 편하게 말 놓을까요? 그냥.. 옆집 누나처럼 생각해요.."
말을 놓는건 좋은데 옆집 누나라니.. 이 여자 혹시 제가 별로여서 그냥 동생처럼 대하려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래요. 말 편하게해요. 근데 누나라고는 부르기 싫으네요."
어디서 그런 용기 나왔는지 저도 모르게 살짝 제 마음을 내보이고 말았습니다.
저에 그 말에 피식 웃어보이는 그녀..
"그래.. 마음대로 해라. 그럼 지금부터 말 놓자.."
말을 편하게 하게되자 분위기는 급속도로 친밀감이 올라갔고 이야기에 막힘이 없는 아주 자연스러운 분위기 되었습니다.
김에 밥과 오돌뼈를 싸서 제 손에 쥐어주는 그녀.. 저는 정말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예쁜 여자가 나에게 오돌뼈 김밥을 만들어 주다니.. ㅠ.ㅠ'
제 기분은 정말 황홀감 그 자체 였습니다.
어느덧 시간은 저희가 가게에 들어온 지 1시간이 지났고 저희들 앞에는 소주 3병이 빈병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너무 빠른 시간에 급하게 술을 마신 것일까 저도 살짝 취기가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조금 전부터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멍한 상태로 풀려가고 있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리고 멍한듯 다소 슬픈 표정의 그녀가 제 손을 잡고 쓰다듬기 시작했습니다.
전 정말 그 순간 백만볼트의 전류가 제 몸을 관통하고 지나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첫 만남에서 이렇게 예쁜 여자가 제 손을 쓰다듬다니요.
여차하면 손 뗄까봐 전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대로 얼음 상태를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근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표정이 왜 이렇게 갑자기 슬퍼졌지..'
그녀의 슬픈 얼굴이 다소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이미 저의 모든 신경과 정신은 그녀가 만지고 있는 저의 손에 집중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녀가 제 손을 놓더니 가방과 윗옷을 들고 일어났습니다.
"가야겠다.. 너무 취했어 집에 갈래.."
"어?.. 벌써?.. 그.. 그래 그래.."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려던 저.. 근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가방 속의 지갑을 찾기가 힘든지.. 그녀는 옆에 서 있는데 전 점점 초조해졌습니다.
'나와라.. 나와라.. 왜 이러냐.. 너..'
하지만 이놈의 지갑은 도저히 나오질 않았고 결국 자신의 지갑에서 돈을 꺼내 계산을 하는 그녀..
"아.. 아니.. 내가 낼께.."
"아니야.. 누나가 낼께.."
그깟 술값 3만원.. 대체 왜 지갑이 안나와서 이런 망신을 주는지..
먼저 나가 택시를 잡은 그녀는 인사 한마디 없이 휑하고 가버립니다.
술값만 내가 계산했어도 저러지는 않을텐데라는 안타까움이 물밀듯이 밀려왔습니다.
'하긴.. 내가 뭐 늘 그렇지.. 저렇게 예쁜 여자가 내가 마음에 들리가 있냐..'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모처럼 만난 마음에 드는 사람 이였는데.. 정말 예뻤는데..
정신도 좀 차릴 겸 옆에있던 편의점에서 캔커피를 하나 사 마시며 그녀에게 문자 메세지를 보냈습니다.
[내가 별로 였구나? 괜찮아 나 그런거 익숙하니까. 오늘 덕분에 즐거웠어. 조심히 들어가~]
마음은 비참했지만 그래도 스스로 괜찮다며 속을 달랬습니다.
근데 그때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어.. 벌써 집에 도착했어?"
"너 지금 이리로 올래? 신림역 사거리로 와.."
"어?.. 어.. 알았어 금방갈께.."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그냥 마지막으로 매너있는 모습이나 보여주자며 보냈던 문자가 효과가 있었던 겁니다. 전 한시라도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택시를 잡으려 팔을 위아래로 미친듯이 흔들었습니다.
신림역으로 가는 내내 생각했습니다.
'그래. 그 여자도 내가 싫지많은 않았던거야.. 아니야.. 그냥 너무 불쌍하게 생각되서 술이나 한잔 더 사주고 보내려는 건가보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던 중 택시는 신림역에 도착했고 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나 지금 신림역 사거리에 도착했어. 어디로 가면돼?"
"나.. 지금.. 너무.. 졸려.. 내일 얘기하자.."
그녀는 그 한마디만을 남긴체 전화를 끊었습니다.
'아니 뭐야.. 여기까지 왔는데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술도 한잔 했겠다. 전 욱하는 마음에 그녀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따지려 했지만.. 그러진 못했습니다.
술 마시고 졸려서 자겠다는 사람에게 화내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거 같았으니까요.
결국 다시 홍대로 돌아온 저는 마침 홍대에서 술 마시고 있던 친구놈과 만나서 필름이 끊어질 때까지 진탕 술을 마셨습니다.
"야.. 내가.. 그렇게.. 별로냐?.. 암튼 이쁜 것들은 눈이 너무 높아서 안돼.."
혀가 다 꼬부라지는 말투로 친구에게 푸념들만 쏟아내다 정신을 잃은 저는 다음날 눈뜨니 집에 와서 자고있는 순간이동의 마법을 다시 한번 실현해 냈습니다.
-2화 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