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ndinsky. Composition VI.
3월 23일
“그렇지만 파르메니데스는 대답했다. 가벼운 것은 양이고 무거운 것은 음이다라고. 그의 대답이 옳았는가? 아니면 틀렸는가? 이것이 문제다. 확실한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즉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의 대립 쌍은 모든 대립들 중에서 가장 신비스럽고 가장 타의적이라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中
“I feel so light. It’s disgusting. This lightness is just unbearable and even a little sad”
“You are NOT light, Sophia. This is not light”
“What is wrong with being light? Since when did lightness become a negative thing?”
“What’s with your obsession with the weight in life?”
솔직히 말해 짜증나는 날들이었다. 공부도 잘 안되고. 그래서 짜증의 근원을 찾으러 기억의 도처를-개인의 경험이든, 문학 속에서는, 학문적 이론에서든- 샅샅이 뒤졌고, 짜증 도발의 suspects들로 여겨지는 친구들과는 진지하고도 진실한 대화를 했다, both with and without alcohol. 하지만 우리의 토론은 끝이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도대체 무엇이 가볍고, 무엇이 무거우며, 가볍고 무거운 것 중 어떤 것이 긍정적인 것이냐 말이다.
하지만 무거운 것은 정말 무섭고, 가벼운 것은 찬란한가? 무거운 것은 어렵고 가벼운 것은 너무 쉬운가? 무거울수록 땅에 더 가까운 가 하늘에 더 가까운가? 무거운 것은 실제적이고 가벼운 것은 허상인가?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중 어떤 것이 positive의 것이냐. 그리고 나는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가 내가 봉착하게 된 요즈음의 질문들이다.
사실 모두 이 모든 시발이 심각한 고민들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었지만, 그들이 나에게 집요하고 직접적으로 질문들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내 개인 사생활과도 결부가 되었고, 결국 나에게 모든 질문들이 전이되었다. 아니 전이 되어 버렸다. 사랑, 우정, 자신감, 욕정, 말초적 신경의 흥분, 희열, 규칙 등에 대해 재고 할 수 밖에 없었고 머리 터지는 고민 끝에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고는 있는 것 같다. (악- 공부는 안하고 이게 왠 무슨 잡념의 향연이란 말이냐!!).
어쨌거나 詩다. 항상 시가 나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된다. 그러다가 우연히 김경주 시인이 한 고은 시인의 인터뷰를 읽게 되었다.
“시는 인류가 아직 시작도 못 해본 영역. 시대가 아무리 시를 외면하고 사가 읽히지 않는 시대라고 해도 시는 절대 그렇게 만만하게 사라지지는 않을 거예요. 문자 이전에도 시는 존재했고 소리를 문자로 옮긴 것이 시라고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듯이 문자의 시만 시의 역사는 아닙니다. 거대한 시간 속에 시를 던져 볼 때 시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어요.”
"저는 사는 일 자체가 하나의 춤이라고 생각해요. 내 언어도 다 그런 춤이었어요. 의도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거요. 저는 1년 중 대부분을 판단 정지 상태로 지냅니다.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들레르의 시처럼 ‘취하기 위해서’ 살고 있죠. 천국은 존재하지 않고 지옥은 이미 이 세계 안에 있습니다. 시인인 나는 그곳에서 춤을 배우다 가는 거죠."
가벼움이냐 무거움이냐
어쨌거나 시는 어떤 가락이 아닐까. 가여움과 무거움 사이의 넘나들음 사이에서 발생하는 가락 말이다. 문자로 표현되는 아니되든 시는 도처에 어떤 가락처럼 흐르고 있다. 그리고 삶은-무겁든 가볍든-그 가락에 취해서, 춤을 배우고 춤을 추다가 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