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을 따지기 위해 필요한 텍스트의 팔 할은 당연히 원작에 대한 설명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뭐라 하면 억울한 노릇이다. 감독이나 배우가 한 일이 없다는 게 아니다. 그만큼 원작 본연의 깜냥으로부터 수혜 받은 바가 크다는 이야기다. 하물며 그 작가가 히가시노 게이고라면 더욱 그렇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은 영화로 만들기 수월한 편이다. 트릭의 완성도만큼이나 서사의 완결성 또한 철저히 챙기는 작가의 강박 탓이다. 꼭 그 만큼 각색을 하는 자와 감독의 몫이 줄어든다. 게으른 창작자들이 꼼꼼히 선후의 동선을 검증해보지 않더라도 원작에만 충실했다면 기본은 치고 어물쩍 넘어갈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등 숱한 작품이 이미 영화화된 바 있다.
똑똑하다 자부하는 추리소설들이 흔히 범하는, 그러니까 트릭의 해법에만 골몰해 독자를 지루하게 만들고야 마는 서사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 또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점이다. 그의 소설은 순수한 이야기로서의 매력을 잃지 않는다. 더불어 늘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의 체온을 담아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다. 체온이 과해 설사 신파조로 빠져들지라도 추리소설이라는 본연의 외피와 탄탄한 트릭 덕분에 손발이 오그라드는 감정의 과잉으로 비추는 일은 거의 없다. 글이 워낙에 수월히 읽혀 말미 즈음 언제나 등장하는 반전에 다다르면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숱한 독서광들이 난독증세가 찾아올 즈음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을 다시 꺼내 든다. 
작가 자신이 최고로 꼽는 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특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작품이다. 분류를 하고 넘어가자면 이나 보다 이나 쪽에 가깝다. 정교한 분류는 아니다. 대부분의 일본 추리소설 작가들이 사회파면 사회파, 신본격이면 신본격을 고수하는 반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그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양쪽의 요소를 절충하는 편이다. 사회파냐 본격이냐 따지고 들면 피차 피곤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은 확실히 본격 쪽에 속한다. 물론 중요한 건 아니다. 톤을 어림잡고 싶다면 역시 을 연상하는 게 좋겠다.
그는 범인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진행하길 좋아한다. 독자들의 방심을 유도하는 것이다. 엉뚱하게도 의 성공 이후 ‘시점가지고 장난치는’ 작품, 이를테면 류의 작품들이 추리소설 시장에 대거 범람하게 되는 난장을 초래하기도 했다(물론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일 수 있으나 우타노 쇼고의 그 작품은 나태한 사기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건 꽤나 효과적인 장치임에 분명하다. 우리는 범인의 행동을 볼 수 있을 뿐, 거기 전제된 의도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작가의 트릭이 출발한다. 은 이 같은 설정을 가장 잘 활용한 사례라 할만하다. 앞서 언급한 특유의 신파성이 충실히 드러나는 경우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이는 을 가장 대중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게 하는 요소다.
영화는 조금의 군더더기를 제외하고 소설의 이야기를 충실히 따른다. 모녀가 중년의 남자를 우발적으로 살해하면서 시작된다. 살해된 남자는 이미 이혼해 남이 된 이들 모녀를 꾸준히도 괴롭혀 왔다. 널브러진 사체를 앞에 두고 모녀가 공황상태에 빠져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옆집에 사는 수학교사다. 수학교사는 모든 걸 알고 있다. 그가 모녀를 돕기로 나서면서 필요한 알리바이와 경찰에 대응할 방법을 설명해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체가 발견된다. 경찰이 주목하는 건 당연히 모녀다. 그러나 심증은 가는데 증거가 없다. 알리바이가 워낙 탄탄해 어찌할 수 없다. 경찰은 늘 손을 빌려 조언을 얻곤 했던 천재 물리학자 유카와 마나부를 찾아간다. 유가와 마나부는 관심을 갖지 않다가 모녀의 옆집에 산다는 수학교사의 이름을 듣고 반색한다. 이시가미 테츠야. 유가와의 대학 동기면서 하늘 아래 유일하게 라이벌로 인정하는 희대의 천재다. 유가와는 이시가미가 모녀를 돕고 있다는 걸 눈치 채고 사건해결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두뇌게임의 쾌감’이라는 수사를 팔아먹는 영화들 가운데, 은 꽤 출중한 축에 속한다. 물론 트릭이나 서사의 완성도는 원작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원작의 매력만을 믿고 게으른 길을 걷지 않았음은 비교적 확연해 보인다. 니시타니 히로시의 카메라는 필요 이상으로 적극적이거나 관망하는 자세를 거부하면서 꼭 필요한 만큼만 움직이고 비춘다. 과한 욕망은 보이지 않는다. 적절한 전략이다. 덕분에 이 영화는 소설이 트릭의 해결보다 조금 더 열정적으로 방점을 찍고 있는 감정의 파고를 온전히 드러내는 데 성공한다. 츠츠미 신이치와 후쿠야마 마사히루의 연기는 소설을 읽으면서 연상했던 것 이상의 캐릭터 호흡을 갖추고 있어 관객을 기쁘게 한다. 시바사키 코우의 안일한 모습은 상대적으로 실망스러운데, 그녀가 연기하는 우츠미 카오루의 애매한 역할을 감안하면 이해할만한 수준이다.
“기하 문제인줄 알았는데 함수 문제”라는 이시가미 트릭의 해법은 영화에도 꼭 같이 적용된다.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치밀한 추리극으로 생각하고 찾았다가 아픈 결말에 눈물을 떨구며 나설 게 빤하다. 눅눅한 사랑 놀음 따위 질색이라는 관객이라도 지레 겁먹을 건 없다. 앞서 히가시노 게이고 서사를 논하며 함께 언급했지만, 말미의 뜨거운 체온도 꽤나 설득력 있는 서사와 트릭의 합리 앞에 위화감 없이 곱씹을 만하다.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인지만, 누구나 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제대로 성립되려면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의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다. 누구나 할 수 있기에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고 누구나 잘 할 수 없기에 감동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렇게, 은 원작의 팬이나 그렇지 않은 관객들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대중상업영화다. 당신은 분명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 글_ 허지웅 (한화 데이즈)
*언론시사 3월 30일 / 개봉 4월 9일
출처:[용의자 X의 헌신] 잘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