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오시는 '그 분'이 있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오듯이 꼬박꼬박.
사람들은 그를 맞이하려고 불도 붙지 않은 등불을
가로수 사이에 금줄 마냥 늘어놓는다.
바람에 나부끼는 금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도 싱숭생숭한 게 영 마뜩치가 않다.
해마다 12월이면 마찬가지로 오시는 '그 분' 또한
5월에 오시는 '그 분'처럼 성대한 환영을 받는가 생각할 때
그렇지 못하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5월의 '그 분'이 오신 날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고 오로지 '그 분'의
오심을 축하하는데
12월의 '그 분'이 오신 날에는 염불이 아닌
절밥에 눈독들이는 이들로 그득하다.
둘 다 꼭같이 세상에 사랑과 자비와 평화를 베풀고
용서와 화합을 위해 오셨다 하는데, 이를 축하하는 모습은
왜 이리 상반된 양상으로 나타나는가.
12월 25일은 '혼자인 사람에게 비참한 날'
혹은, '눈이 내리지 않으면 싱거운 날'
혹은, '선물 하나 받지 못한 사람에게 쓸쓸한 날'
혹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날'
등으로 이름이 바뀌어도 무방하다.
아니, 이렇게 불리는 게 더 자연스럽다.
크리스마스에 어느 누구나 연인과 함께 팔짱을 끼고
함박눈 내리는 화려한 도시의 네온사인 숲을 걷고 싶어하며
숨겨둔 선물을 둘만의 장소에서 나누는
행복한 상상에 빠지고 싶어한다.
혹은 가족과 함께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은은하게 울려펴지는
캐롤을 흥얼거리며 부드러운 생고기 스테이크를 포도주와 곁들여
먹는 상상을 할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밤잠을 설치며 산타 할아버지의 실체를 밝히고 말겠다고
두 눈을 부릅뜨다가 자기도 모르게 잠들것이고 부모님들은
이런 아이들을 한시라도 빨리 재우고 몰래 선물을 갖다 놓고
잠자리에 들고 싶어할 것이다.
12월의 유일한 법정 공휴일인 크리스마스는 이런 날이다.
연인과 가족의 달콤한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날.
11월 말부터 대형 상점과 거리에서 형형색색의 조명과 장식들이
한 달도 더 남은 그 날의 행복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킬 때 즈음이면
루돌프는 변함 없이 부끄럽지 않은 빨간 코를 뽐내며
산타 할아버지를 태우고 돌아다니고
우는 아이들에게는 선물을 안준다는 이 독특한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받고자 하는 아이들은 자신이 받게 될 선물을 상상하며
울먹임을 꾹꾹 삼키며 애써 웃어보이려 노력하며
연인들은 서로의 마음 속에 더욱 깊이 들어가려는 욕망에
멋진 선물과 이벤트를 준비하려고 골머리를 앓을 터이다.
아아!!
연인이 없어도 좋고,
산타클로스가 없어도 좋다.
선물을 받지 못해도 좋고 주지 못해도 좋다.
다만,
5월에 오실 '그 분'과 12월에 오실 '그 분'을 맞이하는
뭇 사람들의 상반된 생각과 행동의 아찔한 차이가
더 벌어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2552년 전 인도 땅에서 태어나 삐쩍 마른 모습으로 죽어서
'열반'에 '입적'했다는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찬사와 경외에조차
우리가 믿는 믿음의 빙거 되시는 그리스도가 미치지 못할 바에야
왜 그 날을 크리스마스(Christ - Mas : 그리스도를 경배)라고
부르는가? (더 말해 나와 우리 모두에게 잔소리일 뿐.)
5월은 잔인한 달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전 세계 만방에
"우리 나라는 다신교(多神敎) 국가입니다!"
라고 공포하는 달이다.
5월에는 부처가, 10월에는 단군이, 12월에는 예수가 오시는
동양신화, 서양신화, 민족신화 모두를 믿고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는 포용력 있고 관대한 나라임을.
이 셋 중에 유독 서양(굳이 따지지만 동양이지만)에서 건너온
예수만큼은 자기가 난 날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자신이 난 날에조차 환영 받지 못하고 소외당하는 이가
어찌 평상시라고 환영 받고 존경 받으며 높임 받을 수 있겠는가.
어쩌면, 5월과 12월에 오는 '그 분'을 대하는 이 나라 사람들의
태도가 각각의 '그 분'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음은 아닐런지.
앞에서도 인용한 바 있는 '염불에는 관심 없고 절밥에만 관심 있는'
사람들은 실상 불교도들이 아닌 기독교도들이 아닌지.
예수가 주는 평화와 기쁨과 사랑과 자비와 행복과 달콤함.
이것들은 세상 신 그 누구라도 다 주겠노라고 말한 것 아닌가.
부처도 단군도 알라도 서낭당 신도 모두 다 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로 만족할 수 있는 존재 아닌가.
다른 무엇을 바라보고 예수를 믿는 것인가?
천국에서 예수와 함께 영원히 살기를 소망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인 아니었던가?
"이 땅에서 행복하자 하는 소박한 꿈이 뭐가 잘못됐단 말이오?"
라고 묻는 사람들,
그 행복이, 행복을 주는 이보다 더 커지게 되면 그 행복에 묻혀
행복을 주는 이를 보지 못함을 어찌 깨닫지 못하오!
5월, 거리에 즐비한 연등을 보며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려 예루살렘 성에 나귀 타고 들어가실 때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옷을 깔아 길을 내며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외치는 모습을 생각해본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을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구원으로
생각하고 그를 왕으로 모시려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이 땅의 어려운 현실과 답답한 이내 마음을 시원케 해결해 줄
정치적 경제적 왕으로서의 예수를 우리는 바라고 있지 않은지.
왜 예수 자체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지.
왜 예수께서 주시는 다른 그 무엇으로 만족하려는지.
일본과 중국이 역사를 물에 물타고 술에 술 탄 듯 왜곡하듯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왜 이리 왜곡시키는지.
철쭉이 흐드러지는 이 5월,
나의 믿음이 철 따라 피고 지는 꽃 마냥
이따금씩 출석하여 잠간 동안 드리는 예배나
특정한 절기를 맞이하여 소나기같이 반짝이는 행위로서가 아닌
삶을 지배하고 이끌어나갈 만한,
말 그대로 믿음으로 산다고 할 수 있을만한 믿음이기를 소망한다.
낮에는 해로 밤에는 달과 별로 비추는 하나님의 빛에
나 자신을 항상 비추어보기를 또한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