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즉생 필생즉사.
살고자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목숨을 연명하려는 의지를 말하는가.
아니면 의지보다 본능에 가까운 생존을 향한 갈망인가?
그렇다면 그 생존은 무엇을 위함인가?
산다는 것은 어떠한 이유를 수반하는 것인가
아무 이유 없이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목적일 수 있는가?
죽고자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으려는 시도를 말하는가.
살고자 하는 의지의 결여를 말하는가.
어떠한 이유로 인해 죽음이 삶보다 낫다는 결론에 이른 상태를
말하는가.
살고자 한다.
나는 살고 싶다.
아니 좀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살아서 하고 싶은 게 있다.
생존의 본능은 곧 살아서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욕망과 연결된다.
살아있다는 것은 움직인다는 것이다.
식물인간이 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인간을 향해
'살아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유기체로서 호흡을 하고 신진대사를 한다는 지극히 제한된
의미에서의 살아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살아있다' , '산다'라는 말이
진정한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유기체가 의지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하고 있어야 한다.
살고자 한다는 것은
살아서 무엇을 한다는 것이다.
그 '무엇'이 무엇인지는 살아있는 개개인의 결정이리라.
허나, 그 '무엇'의 의미가 곧 살아있는 개개인의 가치를 결정한다.
즉 무엇을 하느냐가 존재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살고자 한다면 반드시 죽는다는 말은 무엇인가.
살아서 무엇을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죽는다는 의미로
바꾸어 말할 수 있는 이 말.
이 말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삶이 고통이며 지옥이던 임진년.
생존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과
생존을 위협하는 적에 대한 끝 없는 증오가 불타오르는 그 때.
이 말을 던진 이의 가슴 속에는
살아서 무엇을 하더라도
다시금 고통이며 지옥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조선'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후세를 살아갈 이들에게
살아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간절함이 있었으리라.
그래서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고 뒤이어 말했으리라.
죽고자 하는 당사가자 산다는 말이 아니었으리라.
죽고자 하는 당사자가 죽음으로써
후세가 살아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이었으리라.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다.
살아서 무엇을 하더라도 '의미'와 '가치'가 없는 이들의 푸념이다.
죽는 게 낫다는 말이 있다.
살아있음의 '의미'와 '가치'를 상실한 이들의 푸념이다.
살고자 하는 이는 반드시 죽는다.
이 말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없어 보인다.
허나 본질을 꿰뚫어보자.
여기서 말하는 '살고자 하는'이는
살아서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풍전등화인 조국의 국면은 아랑곳하지 않고
개인의 생존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는 이다.
죽고자 하는 이는 반드시 산다.
이 말의 본질은
양초와 같은 삶을 사는 이들을 빗대고 있다.
자신은 죽더라도 조국은 밝게 빛날 것이라는 소망으로
초개같이 불살라 사라진 이름모를 이들의 가슴벅찬 희생이,
오늘의 우리를 있게 했다.
나라 잃은 설움을 모르는 우리를 있게 했다.
하늘나라에서는 죽고자 하는 이를 원한다.
주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이 세상에서의 생존과 부귀영화를 목적에 두지 않고
영원한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이 모든 것을 포기한 이들에게 상이 있을진저.
세상에 머무르고자, 그것도 오래 머무르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화 있을진저.
영원할 수 없는 인간에게 영원성을 부여할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이신데
영원할 수 없는 인간이 스스로 영원하고자 함은
살고자 함이요, 곧 죽음이다.
영원할 수 없는 인간이 스스로 영원한 조물주에게 기댐은
죽고자 함이요, 곧 삶이다.
밀알.
썩어서 죽으면 산다.
가라지.
썩지 않고 살면 죽는다.
이 아찔한 역설, 모순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나를 죽이기.
'나'는, 순수한 '나'는, 본질적으로 퇴폐적이고 어두움이다.
순수한 나를 부정하는 순간
본질이 변화한 진정한 나를 발견하게 되리라.
나를 죽이고자 하면 그 분이 살고
나를 살리고자 하면 그 분이 죽으리라.
영원한 삶을 위해
이 세상에서의 짧은 칠 팔십년을 죽자.
오늘부터 나는 죽기를 연습하자.
죽을 때까지 죽지 못하겠지만,
죽지 못함을 체념치 말고
부던히 죽자.
그리고 애벌레가 긴 고통과 몸부림 끝에 화려한 날개짓화 함께
부활하듯이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그 날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