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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위 성지(김대건 신부님2차입국)

김민희 |2009.04.19 16:10
조회 190 |추천 0

[[                                     피에타

이탈리아어로 경건한 마음,경건한 동정(同情)이라는 뜻으로“신이여 불쌍히여기소서”라고 기도할 때 이명사가 쓰인다.고유명사로는 그리스도교 미술에 자주 표현되는 주제로,보통 성모마리아가 죽은 예수의 시신을 무릎에 안은 구도를 특히 이렇게 표현한다.그러나 죽은 예수를 마리아가 등 뒤에서 받치기도 하고(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 피에타 등),예수에 시체를 지상에 눕혀놓은 것도 있으며(피옴보의 비테르보의 피에타 등),시신을 둘러싸고 성모마리아를 비롯해서 막달라 마리아,아리마타야 요셉,니코데모,사도들,성자 등이 그 죽음을 애도하는 것(조토의 스크로베니성당의 벽화 등)도 있는데,이러한 것들을 모두‘피에타’라 한다.

그러니까 피에타는 마리아에 시점에서 본 예수에 죽음이다.]]

 

 

1845년 8/31 조선 입국을 위하여 페레올 주교,다블뤼 신부,김대건

                  신부,교우 및 선원등 14명이 승선한 라폐엘 호는 상해

                   항을 출항.

                출항한지 3일만에 서해 바다에서 풍랑으로 표류

           9/28 용수리 포구에 표착하게 됨(용수리포구-제주)

          10/1 배를 수리하고 음식등을 준비하여 출발

1845년 10/12 충남 강경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한후

                     (익산 나바위성지)

           11월 서울에 도착

 

"

전라도와 충청도 사이에 있는 금강으로 들어가 은지군 강경리 나바위라는 조그만 교우촌에 정박할 계획이었다.

그곳에는 신입 교우가 몇 집 살고 있었다.김대건 일행은 줄곧 맞바람을 안고 항해를 계속했다.해류는 급했고 암초가 많았다.암초에 부딪쳐 전복의 위기를 여러번 넘겼다.가끔 모래톱에 걸리기도 했다.어떤 때는 물가로 휘어서 굽어든 후미의 안쪽에 멎어서 빠져나갈 곳을 찾느라고 당황하기도 했고,그 때마다 사람을 뭍에 보내어 길을 묻고는 했다.

늦은 가을의 밝은 햇살이 내려비치는 오후,김대건 일행은 포구에서 약간 떨어진 호젓한 바닷가에 닻을 내렸다.

김대건은 한 교우에게 일렀다.

"마을 교우에게 급히 연락하십시오.우리 일행이 도착했노라고."

날이 어두워지자 옷깃으로 스미는 바람이 제법 차거웠다.어둠은 순식간에 바다를 야청빛으로 물들였고 물결은 해안을 따라 펼쳐진 모래 밭을 철썩철썩 핥으며 음흉하게 뒤척이고 있었다.

 

 

"하선하기 전에 주교님께 먼저 변복을 시켜 드리십시오."

김대건의 낮고 은밀한 목소리가 파오 소리에 지워졌다.

"최 베드로 씨가 준비하셨지요.?"

김대건의 강한 억양이 이번에는 파도 소리를 밀어냈다.

"아,네."

최형(최방제의 형)이 얼른 보퉁이를 찾아서 빠르게 펼쳤다.

"우리 손으로 입겠소."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옷가지들을 집어들었다.

"반쯤 접은 이 작은 우산 같은 모자는 머리에 쓰면 될 것이고,베로 만든 긴 옷은 이렇게 겉에 걸치면 되지 않소?그런데 이건 뭐요?"

페레올 주교가 2개의 짧은 대나무에 베 조각을 달아 맨 포선을 들어 보였다.

"이렇게 얼굴을 가리는 거랍니다."

 

 

최형은 대나무를 두 손으로 잡고 얼굴 높이로 들어 올렸다.

"그거 아주 좋소,우리한테 알맞은 물건이구려."

페레올 주교는 미투리를 발에 꿴 다음 교우의 등에 업히어 조선땅에 내려졌다.다블뤼 신부와 김대건이 뒤따랐다.

'처음 조선땅을 밟는 상륙 행사 치고는 별로 화려한 것이 못되는군.할 수 없지.이 나라에서는 모든 것을 조용하고 은밀히 진행시켜야 하니까.'

페레올 주교가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소설 김대건 한상윤의 소설중에서- "

 

 

제대 밑에 조각상을 찍은 것입니다~

 

 

"

김대건은 길떠날 체비를 갖추고 오두막을 나섰다.페레올 주교,다블뤼 신부와 집주인이 배웅을 나왔다.

"김 안드레아 신부,너무 급하고 과격한 행동만 안 한다면 나는 김 신부를 굳게 믿소,불원간 만주에 머물고 있는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도 김 신부의 도움으로 서둘러 입국할수 있기를 바라오,"

"잘 알겠습니다,주교님."

"먼저도 말했지만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가 두만강가의 경원에 시장이 열리는 시기를 맞춰서 입국을 하도록 지시했더니 그만 실패를  한 모양이오,열흘이나 미리 경원에를 도착했다가,그 열흘을 버티지 못하고 관리에게 붙잡힌 모양이오,안타깝게 하루 전날 말이오.하기야 외국인의 몸으로 9일을 버틴 것도 잘 버틴 거지.다행히 보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불려나 요동의 신학교에 가 있다더군.이번에는 바닷길을 알아보도록 하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주교님."

서울의 돌우물골로 먼저 갈 것인가,고향 용인의 골배마실로 먼저 갈 것인가.

개천둑의 묵은 잡풀로 덮인 외딴길을 걸어가면서 김대건은 이미 여러 날째 생각해보던 것을 또 생각해보며,북쪽으로 우선 걸음을 서둘렀다.

-한상윤의 소설 김대건 중에서-

 

 

[[나바위는 나암에 우리말 표기로 광장같은 너럭바위가 화산(華山)정상에서 강가를 따라 남서쪽으로 널려있어 생긴 마을이름이다.화산이란 지명은 조선조 우암 송시렬이 근접한 황산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이곳 나바위가 아름답다고 해서 화산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이곳 나바위 성당은 1897년 본당을 설립한 베르모렐(장약슬 요셉)신부가 1906년 신축공사를 중국인부를 동원하여,1907년에 완공하였다.

설계는 명동성당 과 전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네루 신부가 하고 건축양식은 한옥에 전통양식을 택했는데,그 뒤 1916년~17년에 흙벽은 양식벽으로,용마루 부분 종탑은 헐고 성당입구에 벽돌조를 붙여 고딕식종탑을 세웠다.

현제 이곳은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31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2/28일에 갔다 왔습니다~

필름이라 소진이 되야 현상이 가능해서~ 좀 늦었네요~

소박하고 편안한 성지였습니다~ 아주 편한 마음으로 둘러보고 왔습니다

단,김대건 신부님에 배가 정착한곳이 있는데,저는 미처 그곳을 가보지 못하고 왔습니다,

그것도 다녀와서 이리 저리 정보를 뒤지다 알게되었네요,

배가 정박한곳이라 추측되는곳에 표지판과 함께 있다는것을 ^^;;

다른 분들은 놓치지 마시고 챙기시길~

그리고 밑에서 두번쩨 사진은 1955년 김대건신부 시복 30주년을 맞아 화강석으로 만든 순교기념비 입니다^^

그럼 즐거운 하루 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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