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AM 8:00 - 44Khz의 세상

이호영 |2009.05.03 14:32
조회 57 |추천 0


대문 밖 세상에 발을 딛는 그 순간부터

나는 MP3플레이어로 음악을 듣기 시작한다.

 

귓가에서 진동하는 그 44khz의 울림은 오직 나만의 세상이다.

나만이 들을 수 있고, 나만이 느낄 수 있으며,

나만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그 44khz의 울림은 점점 더 무서워지고 난폭해지는

바깥 세상 속에서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방어벽이 되어준다.

 

집 안에서 MP3플레이어를 켜서 집 앞 골목을 지나고

버스정류장이 있는 큰 길가를 지나고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면서

나는 점점 더 커지는 바깥 세상의 소음에 대항하기 위해

MP3플레이어의 볼륨을 점점 더 높여간다.

어쩌면 볼륨업 버튼을 누르는 것만이

커다란 세상 속에서 한없이 작은 내가

세상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몸부림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양쪽 귀에 44khz의 울림을 담고서

몇번이고 볼륨업 버튼을 눌러가며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이 때,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져버린 울림 사이로

너무도 어색하고 낯선 울림이 들려온다.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다.

나는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무심코 뒤를 돌아본다.

이름모를 누군가가 나를 향해 걸어오며 인사를 한다.

나도 그 이름모를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며 어색하게 웃어보인다.

그와 나는 잠깐 길가에 서서 얘기를 나눈다.

출신학교 이름이며

몇몇 기억나는 선생님 이름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그는 나의 동창인듯하다.

 

하지만 나는 모르겠다.

아무것도 떠올릴 수가 없다.

그의 이름도, 그와 함께했던 날들도,

유년시절의 즐거웠던 추억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궁금하지도 않은 그의 근황을 묻고,

기억나지도 않는 옛날 얘기에 즐거운 듯 맞장구를 치고,

아마 다시는 누를 일이 없을 열한자리 숫자의 나열을 꾹꾹 누르며

언제 한번 만나자는 인사치레를 하고,

손에 쥔 이어폰을 끊임없이 만지작거리는 것 뿐이다.

그와 얘기를 마치고 나는 다시 뒤돌아선다.

그리고는 잠깐 내 귀를 떠났던 이어폰을 다시 귀에 꽃는다.

 

다음 노래가 시작되었다.

나는 44khz의 익숙한 울림을 다시 귀에 주워담고

44khz의 세상을 약간 빨라진 걸음으로 걸어간다.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